'아는 노래'로 다시 태어난 송필근의 '숙녀에게'
아이즈 ize 김성대(대중음악 평론가)
책을 쓰고 있는 요즘, 집필의 긴 호흡을 잠시 내려놓을 때 쇼츠를 보곤 한다. 나에게 쇼츠는 휴식이기도 하지만 트렌드의 탐색이기도 하다. 최근엔 두 영상에 눈이 갔다. 하나는 97년생 비트박서 윙(WING)이 'Dopamine'이라는 곡을 선보인 것이었는데, 사람 입에서 나이트클럽을 게워내고 있는 모습에 몇 번이고 감탄하며 본 기억이다. 2018년 한국인 최초로 아시아 비트박스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윙의 믿기 힘든 비트박스는, 현재 한국을 넘어 세계인들의 탄복을 자아내며 문화 현상이 되고 있는 중이다. 윙의 초현실적 비트박스와 함께 내 관심을 끈 또 다른 영상은 KBS 개그콘서트의 코너 '아는 노래'였다. 말 그대로 세대별 '아는 노래'들을 극에 심어 이야기를 전개하는 코너다. 개그콘서트 고유의 무대 코미디에 뮤지컬을 접목한 이 코너의 영상들엔 보통 세 가지 '주의'가 붙는데 눈물주의, 감동주의, 반전주의가 그것들이다. 내가 본 건 변진섭의 '숙녀에게'를 다룬 편이었다. 그리고 거기엔 저 세 가지 '주의'가 모두 적용됐다. 눈물과 감동, 반전까지 있는 이야기. 시청자들은 서둘러 손수건을 준비해야 했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한 남자(필근)가 한 여자(현영)에게 반해 사랑을 고백하는 스토리다. 극 초반, 음악다방 디제이가 변진섭의 '숙녀에게'를 튼다. 이어 곡의 도입부 가사는 아르바이트를 하던 현영에게 첫눈에 반한 필근의 심리를 따라간다. 필근은 데이트 신청 멘트를 열심히 연습했지만, 알다시피 그 연습은 실전에서 종종 꼬리를 감추는 법이다. "저... 좋아합니다. 커피 되시면 시간이라도 한 잔!" 무릎 꿇고 장미 꽃다발을 바치는 필근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현영은 그의 고백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 싸늘하다. 친구는 "세 번째 까였다"라고 진단했지만, 필근은 "아직 대답을 못 들은 것"일뿐이라며 희망을 놓지 않는다. "걔가 어디가 그렇게 좋은 건데?" 친구의 물음에 필근은 '숙녀에게'의 유명한 프리 코러스로 대답을 대신한다. 노래는 그렇게 현영과 필근의 사랑을 조금씩 빌드업해나간다.
벌써 열 번째 시도. "현영 씨, 오늘은 제 얘기 좀 들어주세요." 돌아서려는 현영에게 필근은 '숙녀에게'의 후렴 가사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 여전히 필근을 빤히 쳐다보기만 하는 현영. 그녀 손에는 수첩과 볼펜이 있다. 수첩과 볼펜은 앞으로 벌어질 상황의 복선이다. "저도 자존심이 있는데... 싫으면 싫다 얘기를 하시면 되잖아요." 필근이 섭섭함을 토로할 때 갑자기 차가 달려오지만 현영은 그대로 서 있다. 필근은 가까스로 현영을 구하고 "차 소리 뻔히 들리는데 뭐 하는 거예요!" 속상해한다. 이때 음악다방과 슈퍼마켓에서 투잡을 뛴다던 현영의 오빠가 나와 이렇게 말한다. "현영이... 못 들어요." 반전이다. 카메라는 이 의외의 사실에 탄식하는 관객석을 잡는다. 수화로 필근에게 "미안하다"라고 말하는 현영. 그리고 사라진 필근. 한참 뒤 필근은 다시 현영 앞에 나타난다. 그는 들고 온 스케치북을 한 장씩 넘긴다.
"겨울이 왔어요 / 들리지 않아도 보이는 것들이 있죠 / 제 사랑도 보여드리고 싶어요."
그러면서 필근은 '숙녀에게' 후렴을 한 번 더 부른다. 이번엔 수화를 곁들여서다. 지켜보는 이들의 감동과 눈물이 반전의 뒤를 따른다. 손으로 전달된 필근의 마음에 눈시울을 붉히는 현영. 무대 뒤로는 세계 장애인의 날(12월 3일)이 오늘이라는 걸 가리킨다. '와, 저 노래가 저런 메시지를 전할 수도 있구나.' 필근의 노래는 그대로 '숙녀에게'를 향한 비평이 되었고, '숙녀에게'라는 노래의 진화가 되었다. 음악과 노랫말의 생명력, 그것이 지닌 서사의 힘은 생각보다 강력했다.
'숙녀에게'는 1989년 노래로, 곡 자체가 곧 불혹이다. 아는 노래이기 전에 옛날 노래인 셈이다. '숙녀에게'는 작곡가 하광훈의 '너에게로 또다시'와 싱어송라이터 노영심의 '희망사항'이 히트한 변진섭 2집에 실렸다. 변진섭 2집은 당시 해외 팝 발라드의 아성에 맞선 한국 팝 발라드의 쾌거였고, 변진섭은 이 작품으로 슈퍼스타가 됐다. 변진섭을 스타덤에 올려준 2집의 두 번째 곡이었던 '숙녀에게'에서 유독 눈에 띄는 단어는 '허면'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자초지종을 물을 때 쓸 법한 이 말을 쓴 작사가는 당대를 호령했던 박주연. 박주연은 노래하는 사람의 성격까지 감안해 가사를 써나갔던 인물로, 변진섭에겐 "스윗하고 예쁜" 느낌이 어울리리라 생각하고 '숙녀에게' 노랫말을 지었다고 한다. 변진섭 역시 이 곡에 대해 "정말 예쁜 노래"라며 실제 "숙녀에게 들려준다는 심정으로" 불렀다고 했다. 쓴 사람과 부른 사람의 의도가 정확히 일치한 드문 사례다.
그런 변진섭의 '숙녀에게'는 지난 3월 16일 송필근의 '숙녀에게'로 다시 태어났다. 거기엔 원곡과 같게 현악도 있고 피아노도 있다. 다만 원곡이 솜사탕처럼 감미로웠다면, 다시 부른 곡은 박하사탕처럼 쓸쓸하다. 아마도 '아는 노래' 에피소드의 분위기를 따른 듯 보인다. 꿈속을 나는 것보단 현실을 걷는 모양새다. 또 변진섭 버전에 있던 산들바람 같은 여성 화음이 빠진 게 눈에 띄는데, 뮤직비디오에도 함께 출연한 나현영이 불렀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보게 된다. 송필근의 리메이크는 '아는 노래'를 본 사람들의 뜨거운 요청에 대한 화답이었다. 필시 감동은 듣는 쪽보다 부른 쪽에 더 사무쳤을 법하다. 시청자들의 성원은 송필근 자신이 힘든 투병을 거친 뒤 받은 귀한 관심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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