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유일 엔진 자체생산 조선사…환경에도 ‘진심’, 탄소실증설비 3배로 키운다 [그 회사 어때?]
“암모니아, 메탄올, 수소 선박…아이템 쌓였다”
선박·엔진 글로벌 1위 업체, 차세대 기술력 확보 중
테라파워, 팔란티어…글로벌 기업과도 협력
[헤럴드경제=박혜원 기자] 울산 HD현대중공업 야드 한켠에는 컨테이너로 만들어진 실험실 같은 공간이 있다. 기자가 지난주 찾은 이곳에는 3평 남짓한 제어실을 둘러싸고 가스 탱크와 파이프 등 각종 설비가 모여 있었다. 바로 옆에선 새로운 실증 설비를 3배 규모로 짓는 공사도 한창이었다. HD현대중공업이 지난해 4월 준공한 ‘선박 탄소중립 연구·개발(R&D) 실증 설비’다.
실증 설비는 엔진기술센터 바로 옆에 마련됐다. 서진해 HD현대중공업 조선사업부 선장설계부 책임엔지니어는 “설비 부지를 선정할 때부터 요청했던 부분”이라며 “친환경 엔진을 개발하는 엔진사업부와 긴밀하게 소통하며 기술 개발을 진행하려는 목적”이라고 강조했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엔진을 자체 생산하는 조선사로서의 특성을 최대한 살렸다는 설명이다. 사업부가 고객사로부터 요구 받은 기술이나 설계를 즉각 반영해 검증할 수 있다는 것도 강점이다.
실증 설비에선 현재 서 책임엔지니어를 비롯한 20여 명의 전문 연구원이 기술 개발을 맡고 있다. 이밖에도 HD그룹 내 전문 기술 인력이 매년 50여 명 규모로 투입돼 신기술 실증, 제작, 시운전 등을 담당한다.
기존의 대형 조선사 실증 설비는 가스 선박 위주로 구성돼 있었다. HD현대중공업은 ‘친환경’에 초점을 맞춰 설비를 새로 구축했다. 국제해사기구(IMO) 환경규제에 맞춰 발빠른 기술개발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서진해 매니저는 “친환경 선박 수요는 높아지는데 고객사들 역시 새로운 기술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며 “완성도 높은 실험과 설계로 신뢰를 확보하려는 취지”라고 말했다. 발빠른 몇몇 해운사들의 수주도 이미 이뤄지고 있다.
친환경 선박 기술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액화천연가스(LNG) 선박 등 현재의 친환경 선박도 2050년까지 목표로 세운 ‘넷제로(Net-Zero·완전한 탈탄소화)’에는 역부족이다. LNG를 연료로 태우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탄소가 발생한다. 이 때문에 탄소를 아예 배출하지 않거나, 배출된 탄소를 다시 포집할 수 있는 선박 기술 개발에 모든 조선사들이 달려들고 있는 상황이다.
이같은 차세대 친환경 선박 핵심 기술 중 하나로 주목 받는 것이 올해 이곳에서 기술 실증을 마친 액화 이산화탄소(LCO2) 화물운영시스템(CHS)이다. HD한국조선해양이 수주한 1790억원 규모 LCO2 운반선에 적용될 시스템 실증이 지난해 진행됐다.
CO2 운반선은 대기에서 포집한 탄소를 액체로 만들고 이를 운반하는 선박이다. 그런데 액화된 CO2 화물을 운반하는 과정에서는 드라이아이스가 발생하기 쉽다. 드라이아이스가 선체 배관과 장비 내부를 돌아다닐 경우 설비에 손상을 입힐 수 있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는 것이 관건이다.
올해는 여기에서 한 단계 발전된 CO2 재액화 기술을 실증할 계획이다. LNG가 기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기화가스(BOG)를 효과적으로 억제하는 기술이다. 쉽게 말해 탄소를 대기에 배출하지 않고 다시 저장하는 목적이다.
이날 현장에선 새롭게 진행될 실증을 위한 설비 구축 작업이 한창이었다. 지황 가스솔루션연구실 책임연구원은 “암모니아 운반선, 멀티가스 추진선 등 내년까지 아이템들이 쌓여 있다”며 “단계별로 설비를 증설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HD현대중공업은 국내에 조선 산업 토대가 없었던 시기, 1972년 울산에서 설립됐다. 정주영 명예회장이 그리스 선사 리바노스로부터 260만t(톤)급 초대형 유조선(VLCC)을 수주한 것을 시작으로 대량 생산체제를 구축하며 대형 조선사로 자리 잡았다. 지난달 말 수주 잔고 기준으로 한 글로벌 점유율은 5.7%로 1위를 차지하고 있다.
현재는 조선업 ‘슈퍼 사이클’ 속에서 선박 수요가 급증하며 순항 중이다. 지난해 신규 수주만 108억 달러를 넘긴 것으로 추정되는 가운데 앞으로 쌓인 일감, 즉 수주 잔고 역시 업계 최고 수준이다. 지난해 말 기준 수주 잔고는 46조9000억원으로 전체 매출의 3배에 달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해군 전력을 강화하겠다고 밝히면서 미국 선박 유지·보수·정비(MRO) 사업 활로도 열렸다. HD현대중공업은 지난해 미국 함정 MRO 사업 참여 자격을 획득해, 올해 처음으로 입찰에 참가했다. 미국 해상수송사령부(MSC) 7함대 소속 군수지원함 1척에 대한 MRO 사업으로, 사업 규모는 수백억 원이다. 이를 비롯해 연내 미국 함정 MRO 2~3척을 수주하겠다는 게 목표다.
선박 엔진을 자체 생산하는 역량을 갖추고 있는 것 역시 강점이다. HD현대중공업은 조선뿐아니라 엔진 분야에서도 글로벌 점유율 35%로 선두에 있다. 지난해 HD현대중공업 모회사인 HD한국조선해양이 STX중공업을 인수하면서 이같은 입지가 더욱 공고해졌다.
다만 글로벌 경쟁 속에서 해결해야 할 숙제도 만만치 않다. 특히 올해는 조선 업계에서 몸집을 키우고 있는 중국과의 격차 확보가 관건이다. 중극은 저가 공세 전술로 컨테이너선 분야에서 입지를 넓히다, 최근에는 친환경 선박 기술력도 높이며 한국을 추격해오고 있다. 이상균·노진율 HD현대중공업 대표이사도 올해 신년사에서 “중국 조선 업계에 경쟁 우위 확보를 위한 기술 혁신에 힘써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같은 전략 아래 최근에는 글로벌 기업들과의 협력이 두드러지고 있다. 올해는 소형모듈원자로(SMR) 개발 청사진도 구체화됐다. 빌 게이츠가 창업한 SMR 기업 테라파워와 나트륨 원자로 상업화를 위한 전략적 협약을 체결하면서다.
SMR은 탄소 배출이 없는 데다 영구적으로 사용이 가능해 대표적인 미래 선박 기술로 꼽힌다. 앞서 HD현대는 2030년까지 선박용 SMR을 개발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는데, 이번 협약으로 개발에 속도가 붙을 것으로 예상된다. HD현대중공업 모회사인 HD한국조선해양은 지난달 교환사채로 조달한 자금 6000억원을 SMR, 수소연료전지, 해상풍력 등 연구개발에 사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미국 인공지능(AI) 소프트웨어 기업 팔란티어 테크놀로지스(팔란티어)와의 협력도 계속될 전망이다. 정기선 HD현대 수석부회장은 올해 다보스포럼에 참석해 팔란티어와 AI 기술 등이 적용된 미래형 조선소를 구현하겠다고 밝혔다. 최근에는 알렉스 카프 팔란티어 대표와도 직접 만나 양사가 2021년부터 진행해온 AI 조선소 프로젝트 상황을 공유했다.
정기선 부회장은 2030년을 목표로 인공지능 기술 등이 구현된 AI 조선소를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AI 조선소에선 자동화 설비를 통해 생산성을 30% 향상하고, 선박 건조 기간을 30% 단축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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