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터 미사일처럼 불씨 날아다녀… 평생 이런 불은 처음” [전국 동시다발 산불]

장한서 2025. 3. 23.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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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민 대피소 가보니
마을주민 “불 언제 꺼지나” 발 동동
새까맣게 변한 터전 보며 한숨만
“눈 감아도 불길이 보이는 것 같아”
진화대원 등 사망 소식에 “슬픔 커”

“평생 여기서 살았는데, 이런 대형 산불은 처음이에요.”

23일 오전 경남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에서 만난 60대 최미자씨는 잿더미가 된 산 중턱을 허탈하게 바라봤다. 이날 새벽까지도 산불의 기세가 강했던 이곳은 날이 밝자 까맣게 타들어간 재와 매캐한 연기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소방과 산림청 등 관계당국은 밤새 산불 진화작업을 벌인 끝에 불씨를 잠재웠지만, 최씨가 소유한 산의 감나무와 밤나무, 고사리밭, 컨테이너 등이 전부 불타버렸다.
폐허가 된 마을 경남 산청군 시천면 외공마을 주민들이 23일 불에 탄 주택들을 보며 허탈해 하고 있다. 외공마을은 이번 화재로 주택 6채가 전소했다. 산청=연합뉴스
산 아래 있는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의 묘까지 불에 타자, 최씨는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는 “어제 불이 확산하면서 시부모님의 묘까지 태웠다”면서 “아버님, 어머님을 생각하면 안타깝기 짝이 없다”고 울먹였다. 그는 이어 “혹여나 잔불이 확산할까 봐 오늘 새벽 3시까지 흙을 날라 불씨를 껐다. 몇 번을 넘어지기도 했다”며 급박했던 상황을 전했다.
21일 산청군에서 발생한 산불이 사흘째 이어지면서 평화롭던 농촌은 쑥대밭이 됐다. 경북 의성과 울산 울주 등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산불이 이어지며 이재민이 발생하는 등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경북 의성군 대형 산불 발생 이틀째인 23일 의성군 산불 발화지점 인근 야산에서 산림청 헬기가 산불 진화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날 산청군 시천면과 단성면 일대는 오전 10시쯤에도 산불의 영향으로 연무(煙霧·연기와 안개)가 가득 끼었다. 인근 산들은 불길이 지나간 흔적으로 새까맣게 변했고, 산 아래 도로가와 강둑까지 그을린 모습이었다. 아직 산불이 잡히지 않아 매운 연기가 코끝을 찔렀다.
22일 전날 경남 산청에서 발생한 산불이 산등성이를 타고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산림청 소속 공중진화대가 산불을 진화하고 있다. 뉴시스
당국은 이날도 화재 진압에 매진했다.
산림청 중앙사고수습본부는 산청군에 진화 인력 2243명, 진화 차량 217대를 투입해 총력 진화에 나섰다. 아침 일찍부터 진화 헬기를 띄우려 했던 당국은 자욱한 연기와 안개 탓에 오전 10시가 넘어서야 투입하기 시작했다. 산청소방서는 덕산고등학교에 현장지휘소를 설치하고, 현장 투입을 위해 펌프차 수십 대를 대기시켰다. 물이 다 떨어진 펌프차가 마을 도로에 있는 소화전에서 신속하게 급수하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경북 의성 산불이 이틀째 이어진 23일 경북 의성군 단촌면 한 우사에서 노인이 소 곁을 떠나지 못한 채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뉴스1
인근 대피소에 피신한 마을 주민들은 “불이 언제 꺼지나”라며 발을 동동 굴렀다.

산청군 금서면 동의보감촌 휴양림에도 전날 밤부터 대피소가 마련됐다. 산청군 후평마을에 거주하는 김남곤(75)씨는 “어제 오후부터 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불씨가 전쟁터의 미사일처럼 정신없이 날아다니기 시작했다”며 “아직 불이 꺼지지 않아 불안하다. 사람은 피했지만, 집은 못 피하지 않나”라고 말했다.

산청군 단성중학교 대피소에도 이재민 100여명이 모였다. 배복순(88)씨는 “간이 두근두근했다. 우리 마을까지 불이 넘어올지 몰랐는데 놀랐다. 밥도 안 넘어갈 정도”라며 가슴을 두들겼다. 학교 체육복을 입고 친구들과 대피한 임윤희(16)양은 “21일 학교를 마치고 운동장에서 운동하는데 재가 날아왔다”며 “당시 집이 있는 마을에까지 불이 번졌다고 해서 친구도 울었다”고 떠올렸다.
경북 의성군 대형 산불 발생 이틀째인 23일 의성군 안평면의 한 주택이 산불로 전소된 가운데 철거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연합뉴스
주민들은 전날 진화작업에 나선 창녕군 소속 진화대원 60대 3명과 30대 공무원 1명 등 4명이 숨졌다는 소식에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60대 주승남씨는 “타지에서 산불 진화를 위해 우리 마을에 왔는데, 사망했다는 소식에 눈물이 났다”며 “투철한 봉사정신에 슬픔이 크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전했다.
경북 의성군 대형 산불 발생 이틀째인 23일 의성체육관에 설치된 텐트에서 이재민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의성 산불 이재민을 위한 임시대피소가 차려진 의성체육관 실내에도 노란색 텐트 25여동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김모(81)씨는 “눈을 감아도 불길이 보이는 것 같다”며 “뉴스에서 산불 이야기를 볼 때는 남 일 같았는데, 막상 겪어보니 심장이 벌렁거릴 정도로 공포감이 컸다”고 회상했다. 대피소에는 요양병원에서 이송된 환자 60여명과 외국인 노동자 수십명도 피신했다.

울산 울주군 양달마을 주민 10여명도 전날 인근 마을회관으로 대피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모습이었다. 60대 김모씨는 “집 뒷산까지 불이 내려왔길래 이웃집이랑 대야에 물을 받아 정신없이 계속 뿌렸다. 소방차가 오면서 불길이 잡혀 건물 피해는 없지만, 텃밭과 뒷산에 있던 산소는 모두 타버렸다”고 한숨을 쉬었다.

산청·의성·울산=장한서·이예림·변세현·최경림·배소영·이보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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