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인] 독립정신 일깨운 지도자… 거국적 3·1 만세운동 이끌다
⑨ 3.1만세운동 33인 의암 손병희
천도교 3대 교주, 대중교육 앞장
만세보 창간… 반민족행위 비판
계몽운동가·혁명가 발자취 남겨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되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하겠소!"
1919년 3월1일 만세운동을 앞두고 의암 손병희가 한 말이다.
일제하 독립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3.1만세운동은 누가 시작하고 주도했을까? 3.1운동 하면 흔히 33인을 떠올린다. 기독교계를 이끈 남강 이승훈도 있고, 독립선언서 본문을 작성한 최남선과 공약 3장을 지은 한용운도 있다. 이중에서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인물이 천도교 3대 교주 의암 손병희이다. 독립선언서 맨 앞에 이름을 올렸고, 일제의 3.1운동 재판 문서에도 우두머리로 나와 있다. 주도자 중에서 가장 긴 3년형을 받았고, 병보석으로 가석방됐다가 세상을 떴다.
손병희는 1861년 충북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금암리에서 태어났다. 서자 출신이라는 이유로 집안의 제사에서 배제되자 곡괭이로 조상의 묘를 파내려고 할 정도로 저항적이었고, 호방한 기질에 의협심과 의리도 강했다. 집안 조카가 동학을 믿으면 온갖 재난을 면할 수 있다며 입도를 권했으나 "이런 세상에 나 혼자 편안하게 살면 뭐하겠느냐"며 거절한다. 얼마 뒤 동학이 널리 백성을 구제하는 '광제창생', 나라를 도와 백성을 편안하게 하게 하는 '보국안민'의 종교라는 설명을 듣고 입교하게 된다.
□ 광제창생, 보국안민에 감명 동학에 입문
동학에 들어서부터 종교인으로의 투철한 삶을 살게 된다. 스승 해월 최시형을 만난 뒤 하루에 주문을 삼만 번이나 외울 정도였다고 한다. 1892년에는 억울하게 죽은 1대 교주 수운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교조신원운동에 참여한다. 조선왕조는 수운이 창시한 동학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들을 속인다는 이유로 1864년 최재우를 처형했다. 동학의 교조신원운동은 농민들의 반봉건 반외세 요구와 연결돼 갑오동학농민운동으로 확산된다.
1894년 동학운동이 일어나자 손병희는 동학의 지도자로 호서동학군(북접)을 이끌게 된다. 손병희의 동학군은 전봉준이 이끄는 호남동학군(남접)과 연계, 공주 이인에서 승리했으나 우금치전투에서 패배했다. 전봉준과 김개남 손화중 등 동학군 장수들은 모두 붙잡혀 처형됐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손병희는 해월 최시형을 모시고 피해다니며 포교에 힘썼고, 이 무렵 최시형으로부터 의암이라는 도호를 받았다. 1897년에는 해월의 종통을 이어받아 동학의 3세 교조가 되었다. 최시형은 1898년 원주에서 체포돼 참형을 당했다.
동학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의암은 1901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체포를 피하기 위해 충청도 출신 갑부 이상현이라는 가명을 쓰며 생활했고, 망명 중이던 개화파 박영효 권동진 오세창 등과 교류했다. 의암은 새로운 문물을 체험하면서 개화와 민족계몽, 부국강병, 독립의 필요성을 체감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 머무르는 동안 그는 동학교단과 긴밀하게 소통했다. 교인들에게 개화의 필요성을 알리게 했고, 2차례에 걸쳐 학생 64명을 일본에 보내 신문물을 배우게 했다. 동학교도를 중심으로 진보회를 조직, 문명개화운동도 벌였다. 이 단체는 전국에 390여개 지회, 회원이 11만 명이나 됐다. 진보회는 개화에 앞장서겠다며 30만 명이 함께 상투를 자르고 흰 대신 실용성 있는 검은 옷을 입는 캠페인을 벌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동학의 간부 이용구가 주도한 진보회는 친일단체인 일진회에 매수돼 친일을 걷게 된다. 이 때문에 동학이 친일세력이라는 비판을 받자 의암은 '동학'을 '천도교'로 바꾸고 대내외에 이 사실을 선포했다.
□ 3.1운동 각계 참여 이끌고 재정도 지원
1906년 5년여 만에 일본에서 돌아온 의암은 동학의 체계화와 개혁, 민족 계몽운동에 나선다. 친일파로 전락한 이용구와 추종 세력 1백여 명을 교단에서 쫓아냈다. 서울에 중앙총부를 설치하고, 지방에 72개 대교구를 뒀으며, 종교의례를 근대적으로 바꿨다. 보성학교(고려대)와 동덕여학교(동덕여대)를 인수, 운영했으며, 서울과 지방의 여러 사학을 지원했다. 박문사라는 인쇄소를 설치하고 만세보를 창간하였다. 만세보는 국민교육이 목표였으며, 친일단체인 일진회와 친일파 이지용 등 반민족행위 세력을 강하게 비판했다.
의암은 윌슨 미국의 대통령이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서 제시한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돼 천도교도인 권동진 최린과 오세창에게 독립운동을 도모한다. 마침 기독교계에서도 이런 흐름이 있었던 터라 자연스럽게 함께 만세운동을 추진하게 됐고, 불교계, 학생들과도 연대하게 된다.
3.1만세운동 추진 과정에서 천도교는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각계와 연대를 추진하고, 종교계에 5천원의 자금을 지원했다. 천도교도인 권동진의 집에서 민족대표 33명을 결정했으며, 천도교계에서 손병희를 비롯 최린 권동진 이종훈 홍병기 오세창 박준승 이종일 김완규 홍기조 나용환 나인협 임예환 양한묵 권병덕 등 15명이 참여했다.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 2만1000 매를 인쇄했으며, 천도교 중앙대교당에서 인쇄물을 배포했다.
천도교가 3.1만세운동 전면에 적극 나설 수 있던 것은 교단 내에 대한독립에 대한 열망과 의지가 널리 퍼져있던 데다가 인적 물적 토대가 탄탄했기 때문이다. 1919년 당시 조선 인구는 1800만 명이었고, 천도교인이 300만 명에 이르렀다. 종교단체라 응집력이 강했고 전국적으로 일사불란한 조직을 갖췄으며 재정도 풍부했다.
□ 징역 3년형… 병보석으로 풀려났다가 사망
이런 준비 끝에 3월 1일 만세운동이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작되고 그 물결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종교계 학생 농민 상인 노동자 등이 대거 참여한 일제하 최대 항일운동이 벌어진 것이다.
천도교 자체적으로도 전국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 경기 전북 황해 평남 평북 강원도 등에서 조직적, 주도적으로 나섰다. 교구마다 인쇄시설을 갖추고 있었던 터라 선언서를 제작, 배포하기에 어려움이 없었다. 특히 평안남도 맹산군에서는 천도교도가 시위를 벌이다가 헌병분견소를 공격, 일제헌병의 무차별 발포로 54명이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손병희는 3월 1일 태화관에서 독립선언 기념식을 마친 뒤 일제 경찰에 붙잡혀 수감됐다. 검찰의 신문과 법원의 재판 과정에서 의암은 시종일관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앞으로도 계속 독립운동을 벌일 것이라며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일제는 당초 내란죄로 중벌에 처하려 했으나 출판법과 보안법 위반, 소요죄를 적용, 3년형을 내렸다. 중병으로 생명이 위험해지자 병보석으로 풀려났다가 1922년 5월 61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의암은 구한말에서 일제 강압통치 시대의 중심을 관통한 종교지도자요 계몽운동가, 독립지사, 혁명가였다. 혹자를 그를 '격동기의 경세가'라고 부른다. 동학에 입도하여 천도교 교주를 지냈고, 동학농민운동과 3.1운동의 중심에 서서 새로운 세상, 보다 나은 세상을 실현하는 삶을 바쳤다. 천도교와 함께 3.1만세운동을 이끈 사실 하나만으로도 민족사에 지워지지 않을 큰 자취를 남겼다.
민족종교인 천도교의 역할도 기억해야 할 부분이다. 교계 전체가 혼연일체로 만세운동을 도왔으며, 전국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 수많은 교도들이 희생되고, 3.1운동으로 교세가 급격하게 무너진 것도 안따깝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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