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불로 쑥대밭된 의성군 신월리…“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현장]

백경열 기자 2025. 3. 23.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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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산불로 주택이 전소된 경북 의성군 신월리 한 마을 모습. 백경열 기자

“조금만 대피가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아닌교.”

23일 오전 10시반쯤, 경북 의성군 안평면 신월리에서 만난 김호철씨(57)는 불에 타 형체도 알아보기 힘든 집터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 집은 아흔살 된 노모가 홀로 살던 곳이었지만, 전날 이 지역에 발생한 산불로 인해 모두 불에 탔다.

안채와 바깥채는 무너졌고 슬레이트 지붕은 아무렇게나 찌그러진 채 방치돼 있었다. 집의 경계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벽돌과 흙 등이 집터 주변에 널브러진 채였다. 밥솥이나 선풍기 등 가전제품과 각종 가재도구 등도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산불로 주택 5채가 전소되는 등 피해가 큰 경북 의성군 신월리 한 마을에서 23일 김삼한 어르신(78)이 불에 탄 곳을 가리키고 있다. 백경열 기자

김씨는 산불이 난 지난 22일 다른 두 형제와 함께 어머니를 찾아뵙고 함께 식사를 하기로 예정돼 있었다. 한 달에 3~4번 이뤄지던 가족모임이었다.

당시 김씨는 모친을 뵙기 전 이 지역에서 발생한 산불 소식과 안전을 위해 집에 설치해 뒀던 2대의 폐쇄회로(CC)TV를 보며 크게 당황했다. 비교적 멀리 떨어진 마을 뒷산에서 확인되던 불길이 갑자기 집 앞에서 목격된 것이다. 다행히 김씨의 어머니는 마을 사람들의 안내를 받아 인근 중학교로 몸을 피한 뒤였다.

김씨는 “조금만 (대피가) 늦었어도 큰일날 뻔했다. 인근 산에서의 불씨가 바람을 타고 갑자기 날아와 집을 덮쳤다”면서 “불길의 방향을 CCTV로 확인하고 있었는데 전혀 다른 방향으로 번졌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어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급히 어머니 집을 찾아 가스통을 분리하고 전기를 차단한 뒤 우리도 대피했다. 급박한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23일 산불로 주택이 전소된 경북 의성군 신월리 한 마을 모습. 백경열 기자

경북도가 현재까지 안평면에서 피해를 확인한 전소 가구 9곳 중 신월리에만 5곳이 있다. 김씨 어머니의 집와 앞집이 모두 불에 탔고, 옆집이 부분적으로 피해를 입었다.

주목할 점은 김씨 집과 직선거리로 가깝게는 약 50m, 멀게는 100~150m 쯤 떨어진 이웃의 집 3채도 산불 피해를 봤다는 것이다. 산불 때 강한 바람을 타고 불씨가 여기저기 퍼진 것이다.

23일 산불로 주택이 전소된 경북 의성군 신월리 한 마을 모습. 백경열 기자

실제 김씨 이웃인 김삼한씨(78)는 “전날 이른 오후쯤 마을 인근의 산에서 연기가 나는 것을 확인했지만 그 불씨가 갑자기 날아다녔다”고 전했다. 김씨의 집은 바깥채가 모두 타고 마당 일부가 그을리는 피해를 입었다. 불길이 조금만 더 번졌으면 그의 집도 피해가 클 뻔했다.

김씨는 “불이 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낮 12시쯤에 대피하라는 안내가 와서 아내와 함께 황급히 몸을 피했다”며 “귀중품 등 아무 것도 챙길 생각을 못하고 입고 있는 옷 그대로 대피했는데 집을 다시 찾아보니 (불에 탄 광경에) 서글프다”고 말했다.

이날 비슷한 시각, 신월리 마을에서 약 10㎞ 떨어진 의성군 의성읍 한 농업회사법인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돼 있었다.

23일 경북 의성군 의성읍 한 농업회사법인 건물이 불에 탄 채 방치돼 있다. 백경열 기자
23일 경북 의성군 의성읍 한 농업회사법인 건물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백경열 기자

법인 사무동과 생산동, 창고동 등 건물 3곳의 외벽은 엿가락처럼 휘어 있었다. 건물 내부에서는 검고 매캐한 연기가 계속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건물 내부도 심하게 그을려 있었다. 소방관들이 건물을 향해 물줄기를 계속 쏴댔지만 연기는 사그라들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현장 관계자에 따르면 과일과 채소 도매업을 하는 이 업체는 2015년쯤부터 영업을 시작했다. 약 1주일 전에는 생산동 1곳을 추가로 지었다. 다음 주 준공식이 예정돼 있었지만 활용도 해보지 못하고 전소 피해를 봤다.

창고 안에는 20㎏짜리 상자 약 1만개에 판매를 앞둔 배와 사과, 토마토가 담겨 있었다고 한다. 피해 금액은 약 70억원으로 추산된다. 화재 당시 직원 20여명이 급히 대피해 인명 피해는 없었다.

23일 소방대원들이 경북 의성군 의성읍 한 농업회사법인 건물에서 진화 작업을 벌이고 있다. 백경열 기자

설비를 담당하는 남모씨(50대)는 “전날 산불에서 시작된 불씨가 양쪽에서 공장을 덮친 것으로 안다. 모든 게 불에 탔다고 보면 된다”면서 “피해 복구를 어떻게 할지 막막한 상황이다. 의성이 특별재난지역으로 분류되길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현장에서 만난 이 업체 오규수 이사는 “옆 마을(안평면)에서 시작된 불길이 골짜기를 타고 넘어와 하천에 있던 억새에 옮겨붙은 뒤 불과 몇 분 사이에 공장 설비로, 또 공장 전체로 번졌다. 막막한 마음뿐”이라고 말했다.

이날 오후 취재진이 찾은 의성실내체육관 내부는 이재민과 대피 주민, 자원봉사자 등으로 가득했다. 이곳에는 의성읍 업1리·중리3리·철파리 등에 사는 39가구 44명이 대피해 있었다. 주민들은 임시 거처로 마련된 텐트 41동에서 지내고 있었다.

23일 경북 의성군 의성읍 의성실내체육관 내부에 주민들의 임시 거처인 텐트가 설치돼 있다. 백경열 기자

대피자 명단에는 인근 아동양육시설과 요양원 등에서 머물던 110여명도 포함돼 있었다. 어르신들은 차가운 체육관 바닥에 깔린 보온비닐과 이부자리 위에 자리를 잡고 요양보호사 등의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

지병을 앓던 일부 어르신은 힘겨운 발걸음을 이끌고 텐트 밖을 나서기도 했다. 산불로 급히 대피하느라 집에서 평소 먹던 약을 챙겨오지 못해 차량을 타고 인근 보건소 등으로 약을 받기 위해서다.

전날부터 체육관으로 몸을 피한 주민 등이 한때 200명을 넘기도 했지만 이날 진화 작업에 속도가 붙으면서 40여명이 귀가했다.

한 70대 어르신은 “집이 모두 타 버려 갈 곳이 없게 된 주민이 많다. 오늘부터 텐트 생활을 하게 됐는데 언제까지 지낼 지는 기약이 없다”며 “하루 빨리 불을 끄고 사태가 마무리되길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백경열 기자 merc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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