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를 밀어주는 손, 그 손이 지켜온 생명들 [.txt]
병원 이송반 베테랑 이운회씨
우리는 일을 해서 돈을 벌고,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보람도 얻습니다. 지금 한국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일 이야기를 ‘월급사실주의’ 동인 소설가들이 만나 듣고 글로 전합니다.
병원 하면 하얀 가운이 먼저 떠오른다. 드라마에서는 멋진 의사들이 가운 자락을 휘날리며 침대를 끌고 다급하게 달려간다. 우리가 처음 떠올리는 병원 일은 의사 아니면 간호사의 업무다. 하지만 이들만으로 환자를 진료하기는 불가능하다. 의료는 대표적인 노동집약산업이고 모든 일은 분업화되어 있다. 병원은 다양한 직종의 협업이 필요한 일터다.
그중 침대를 미는 업무가 있다. 병원에는 스스로 걸을 수 없는 환자가 많다. 다리가 불편하거나 보행 능력을 상실한 환자들이다. 그런데 입원 환자는 스케줄을 관리해야 할 만큼 바쁘다. 수술, 검사, 시술, 진료 등이 매시간 예약되어 있다. 게다가 대학병원은 의료진도 정확한 장소를 찾아가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하다. 반면 침대는 알아서 정확한 위치로 굴러가지 않는다. 환자의 침대를 밀어 목적지에 도달하는 일은 현재 인간만이 가능하다. 오히려 효율적인 동선을 고려해 안전하게 환자를 이송하는 일은 인간이 직접 맡아야 하는 중요한 업무다.
나는 병원에서 오래 일을 했다. 이전에는 나도 침대를 끄는 일에 대해 막연히 드라마처럼 생각했다. 병원에 입사하고서야 의사가 가운 자락을 휘날리며 침대를 끄는 일은 아주 드물게만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았다. 환자가 질서정연하게 이동하지 않으면 병원은 엉망진창이 된다. 그런데 환자의 발이 되어주는 이들은 따로 있다. 일명 ‘이송반’이다. 침대를 끄는 일을 전담하는 이들이다.
이운회(62)씨는 우리 병원에서 가장 베테랑 이송반이다. 다부진 체격과 주름진 미소가 인상적인 노년의 남성이다. 내가 근무하는 이대목동병원이 개원했을 때부터 일을 시작해, 얼마 전 정년을 채우고도 다시 계약해서 돌아와 있다. 그는 성실한 근태와 친절한 말투, 다른 이에게 건네는 다정함으로 의료진 모두에게 신뢰와 사랑을 받고 있다. 내가 처방을 낼 때마다 그는 환자에게 인사를 건네고 지정된 위치로 안내한다. 그가 퇴근하고 시간을 보낸다는 한 교회에서 그를 만났다. 흰머리를 검게 염색한 그는 육십대의 나이보다도 훨씬 젊어 보였다.
“이 일을 어떻게 하게 되었느냐면요. 85년에 제대하고 이런저런 일들을 해보다가, 병원 일이 가장 안정적이라고 들었어요. 88년에 간호조무사 자격을 취득하고 89년부터 이 일을 했죠. 처음에는 석촌호수 근처에 있는 남서울병원에서 4년 정도 일을 했어요. 93년에 이대목동병원이 새로 오픈한다고 해서 직장을 옮겼어요. 그때 목동은 허허벌판이었어요. 주위 인맥으로 어떻게 아는 사람 통해서 입사한 것 같아요. 지금은 정규직 되기 힘들죠. 정규직 퇴직하면 딱 빠진 만큼만 공고를 내서 새로 뽑아요. 교수님들 정년은 65살이죠. 우리는 60살이에요. 같은 직종에서 제가 처음으로 정년을 채우고 퇴직했어요. 2022년 12월 말에 퇴직했다가, 병원에서 요청이 와서 다시 일하고 있어요.”
이송반의 업무는 3교대다. 밤에도 환자들은 어딘가로 가야 한다. 낙상 사고가 나기도 하고 갑자기 의식이 떨어지고 상태가 안 좋아지거나 열이 난다. 심야에 자기공명영상(MRI)이 예약되어 있거나 새벽 6시에 정규 엑스레이(X-ray)를 찍기도 한다. 병원 이송반은 업무량이 많다. 교대할 때마다 환자 인계도 필요하다. 내가 근무하는 병원은 동선이 간단한 편이지만, 대형 병원일수록 이송반의 동선은 고되다. 그는 현재 응급실 근무를 고정으로 한다. 응급실 환자들은 엑스레이, 시티, 엠아르아이를 찍거나 추가 진료를 위해 외래에 가거나 병실이나 중환자실에 입원한다. 안타깝게 영안실에 가기도 한다. 자리에 앉아 있는 그에게 간호사 선생님이 메모지로 환자 정보와 위치를 알려준다. 그러면 환자 이름을 확인하고 그 위치까지 모셔다드린다.
“병원 초창기에는 의무부 소속이어서 업무가 다양했어요. 간호조무사 면허가 있으니까요. 수술 전에 피부를 면도하거나 상처를 식염수로 세척하거나 관장하는 일도 저희 업무였어요. 팀워크를 가지고 보람차게 일했지요. 처음 일할 때는 농약이나 약물을 음독하신 분이 정말 많았어요. 그때 끔찍한 상처도 많이 다뤘는데, 점차 의료기관 인증을 하고 분업화가 진행되면서 업무가 하나씩 없어졌어요. 지금은 환자를 이송하는 업무만 하고 있지요.”
이송 업무는 누군가에게는 단순 육체노동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병원 경력이 나보다 훨씬 긴 베테랑이다. 또한 병원 일은 세분화되어 있고, 나는 응급의학과 전문의의 일 외에는 잘 알지 못한다. 그는 걸을 수 있는 환자를 안내하거나 소아 환자, 휠체어 이송까지도 한다. 그에게 숙련자로서 일의 노하우를 물었다.
“안전이 최우선이에요. 일이란 건 순서가 있어서 여유 있게 해야 해요. 환자가 아무리 급하다고 하더라도 낙상이나 안전사고가 발생하면 큰일 나니까요. 가드레일이 잘 올라가 있나, 팔다리가 침대 바깥으로 빠져나와 있나, 잘 봐야 해요. 이동하는 데도 걸림돌이나 요철 같은 위험 요소가 있는지 파악해야 하고요. 휠체어를 타신 분들은 발이 많이 부딪혀요. 척추 손상 환자는 딱딱한 스파인 보드가 깔려 있거나 목에 넥칼라가 채워져 있는데, 다른 침대로 옮길 때 충격을 최소화해야 해요. 신생아나 영아는 엄마가 아이를 안고 휠체어로 이동하는데, 정서적 안정을 고려해야지요. 또 정자세로 밀어야 해요. 근골격계를 많이 쓰는 노동이잖아요. 이송반에 허리가 안 좋은 사람이 많아요. 항상 허리를 곧게 펴고 바른 자세로 일해야 합니다.”
그는 병원 초창기를 회상했다. 그가 입사했을 때는 내 전공 분야인 응급의학과가 한국에 도입되기도 전이었다. 당시에는 교수들이 권위의식이 높아서 수술방에서 빈번하게 폭행이 일어났다고 했다. 게다가 전산화가 되어 있지 않아서 젊은 의사들이 필름이나 의무기록을 찾으러 뛰어다녔다. 나로서는 술자리에서 선배들에게만 들은 이야기였다. 그는 그때 의사들이 정말 힘들었다고 회상했다. 인턴이나 레지던트 선생님들이 화장실에서 몰래 울다가 나와서 일하는 건 예사라고 했다. 옛날 그렇게 챙겨주었던 젊은 의사들이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병원 보직도 맡으면서 벌써 오십대 중반이 되었다며 같이 그 시절을 회상한다고 했다. 그들에게 퇴직한다고 인사를 건넸던 그가 병원에 다시 출근하기까지 약간의 공백이 있었다.
“아직 젊으니까 계속 일을 해야지요. 퇴직하고 요양병원에 식사를 배달하는 일을 했었어요. 외부 식당에서 조리된 식사를 끼니때마다 병원에 전달하는 거죠. 3개월 정도 하고 에어컨으로 넘어왔어요. 이전부터 에어컨 수리나 설치를 종종 했었거든요. 대기업 외주 회사로 들어가서 설치나 수리 등을 했죠. 또 틈틈이 피아노 조율하는 일도 했어요. 제가 피아노 조율 기능사도 있거든요. 여름 시즌이 지나서 에어컨 수리 일이 없어졌는데, 마침 병원에서 연락이 와서 계약직으로 복귀했어요.”
나는 놀랐다. 왜인지 병원 직원이 다른 업무를 했을 거라고 상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퇴직 뒤에도 일을 찾는 사회지만, 침대를 끄는 모습과는 너무 다른 일이었다.
“그래도 직장이 병원이니까 배운 게 많았어요. 응급실에서 환자들 치료받는 것도 많이 보고요. 주변 사람들도 병원에서 오래 근무했다면 든든해하시더라고요. 직접 진료 보러 가도 잘 대해주시고 진료비 혜택도 받았고요. 저도 환자분들을 만나니까 건강하게 퇴원하시는 모습을 보면 기쁘죠. 같은 병원에서 30년 넘게 일하다 보니까 환자분들이 알아보실 때가 있어요. 아직도 근무하시냐고 안부도 건네시고요. 그렇게 성심성의껏 대해드리면 보람이 있어요. 직장이 대학이라서 지금은 사학연금도 나오고요. 두 자녀 키우면서 학자금 대출도 받았고, 부족하지 않게 가정을 꾸렸어요. 지금은 계약직 신분이라서 월급이 많이 줄어들었긴 하죠. 이제는 1년 단위로 계약을 갱신하다 보니까, 또다시 최선을 다하려고 하고 있어요. 1년 농사예요. 계약 연장 안 되면 퇴직해야 하잖아요. 뒤돌아보지 말고 열심히 일해야죠.”
그는 교회에서도 관리자라고 했다. 교회 차량이나 주차장 관리를 직접 했다. 소방안전관리자도 맡고 있다고 했다. 요즘 건축물에는 스프링클러나 수신기 기준 맞추기가 까다로워서 하나하나 공부한다고 했다. 교회에서 노약자를 위한 에어컨 예산이 배당되면 직접 설치하는 달란트 봉사를 하기도 하고, 교회 피아노도 직접 조율한다고 했다. 개척교회나 군대에서 조율 의뢰가 들어와도 봉사하러 간다고 했다. 그는 ‘달란트 기부’라는 말을 강조했다. 달란트대로 즐겁고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나는 마지막으로 병원 선배로서 현장의 달라진 점을 물었다.
“병원에서만 36년 있었는데, 체계는 많이 개선된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은 협업이나 배려가 조금 부족한 것 같아요. 전반적으로 개인적인 경향이 있죠. 이전에는 자격증 관계없이 업무가 주어지면 열심히 하려고 했는데요. 지금은 담을 쳐둔 것처럼 이건 내 담당이 아니고 내 업무가 아닌데요? 하는 경우가 많아진 것 같아요. 옛날에는 다른 일을 적극적으로 돕는지를 평가에 넣기도 했는데, 각박해진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런데 시대가 그렇게 요구하면 따라가야지요.”
그는 마지막으로 ‘시대의 요구’라는 표현을 썼다. 다양한 일을 해온 그에게 분업화된 세상은 인간미가 옅어지는 과정으로 보였던 것 같았다. 물론 전문 직종이 해당 업무를 맡는 게 시대의 흐름이겠지만, 많은 기술을 습득해온 그는 몸과 머리로 스스로 익혀서 남을 돕는 습관이 있었을 것이다. 그가 말한 달란트는 처음에는 화폐 단위로 쓰였지만, 점차 개인의 재능이나 소질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그는 나보다 윗세대 노동자로 자신에게 주어진 가치와 달란트를 개발하며 살아왔다. 에어컨을 수리하고 피아노를 조율하고 소방안전을 관리하고, 심지어 침대를 끄는 일에 대해서도 나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침대를 이끄는 손은 보통 환자들의 뇌리에는 남지 않는다. 하지만 그 손은 세심하게 노력하고 배려하며 나아가려는 손이다. 현장을 떠나면 무엇인가를 이끄는 힘을 지닌 그 손은 다른 인생을 개척해나갈 것이다.
그는 인터뷰 내내 다부진 몸으로 햇살이 드는 교회 창가에 앉아 있었다. 성실하게 가정과 사회를 이끌어온 모습이었다. 그는 내가 멀리까지 찾아왔다며 교회 마크가 새겨진 대형차를 몰고 인근 식당에서 백반을 한 끼 사주었다. 막간에도 그는 대형 버스 면허가 있어 이럴 때 유용하다고 했다. 그 식사는 병원에서 오래 일한 나로서도 이송반 선생님과 나누는 첫 끼니였다.
남궁인 l ‘월급사실주의’ 동인. 산문집 ‘만약은 없다’, ‘지독한 하루’, ‘제법 안온한 날들’ 등을 냈고 앤솔러지 ‘인성에 비해 잘 풀린 사람’에 참여했다. 현재 응급의학과 전문의로 이대목동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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