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겨운 남자와 동거중입니다”...늙은 재벌의 ‘정부’가 된 그녀, 진짜 사랑 앞에 무너지다 [씨네프레소]

박창영 기자(hanyeahwest@mk.co.kr) 2025. 3. 23.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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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프레소-149] 영화 ‘브로큰 임브레이스’

*주의: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남자는 어느 날 자기 애인을 계단에서 밀어버렸다. 여자가 자신을 떠난다고 한 다음이었다. 그의 표정에는 어떠한 비장함도 없었다. 그저 잘 움직이지 않는 문을 열듯 손에 힘을 줘 쑥 밀었을 뿐이다.

남자는 계단 아래로 떨어진 여자를 보고 뛰어 내려왔다. 여자는 남자가 자신을 죽이는 건가 싶어 필사적으로 기었다. 그러나 남자는 여자가 아파할까 봐 걱정했고, 그녀를 데리고 곧장 병원으로 갔다. 앞서 여자를 밀었던 행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마치 여자가 우연히 실족해서 계단에서 굴렀고, 자신은 이를 발견한 것처럼 말이다.

‘브로큰 임브레이스’(2009)는 운명의 짝을 만난 남녀의 이야기다. 그리고 이것을 옆에서 보며 극심한 질투와 복수심을 느끼는 옛 연인의 표정을 담았다. 아무리 변심했다지만 그래도 한때의 연인인데 이 남자는 왜 여자를 죽음의 위기까지 몰아가는 것일까. 세 사람에겐 어떤 사연이 있을까.

‘브로큰 임브레이스’는 인생의 연인을 만나 뜨겁게 사랑하는 남녀의 이야기다. 그리고 이 화면엔 잡히지 않은 한 남자, 다시 말해 화면 밖에서 두 사람을 보며 질투를 느끼는 옛 연인의 이야기다. [씨나몬㈜홈초이스]
집안을 이끌어야 했던 여자, 사랑하지 않는 남자의 연인이 됐다
비극은 여자의 가난에서 시작됐다. 가난하기만 했으면 별 문제가 아니었을지 모르는데 레나(페넬로페 크루즈)는 착하기까지 했다. 기울어져 가는 집안을 어떻게든 지탱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꼈다. 자신이 떠받치지 않으면 가족이 위험에 빠질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자는 노(老) 재벌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어떻게 출발한 관계인지는 정확히 묘사되지 않는다. 아마 처음엔 어니스토(호세 루이스)가 레나의 금전적 필요를 채워줬을 것이다. 어니스토는 레나의 ‘감사하다’는 말을 사랑의 표현으로 받아들였을 것이고, 레나는 그 오해를 굳이 바로잡지 않았을 것이다. ‘사랑’에 대한 정의는 달랐지만, 어쨌든 둘은 연인이 됐다.

그러나 영화감독 마테오(루이스 호마르)가 나타나면서 관계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애초 영화배우가 되고 싶었지만 집안 사정 때문에 접었던 레나는 마테오를 만나 날개를 단다. 레나는 아름다웠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맞춰가는 과정도 필요 없었다. 그냥 서로 맞았을 뿐이다. 마테오는 레나의 매력을 스크린에 그대로 옮기고 싶었고, 레나는 마테오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 즐거웠다. 두 사람의 사랑에는 간극이 없었고, 온도 차도 없었다.

마테오는 레나의 매력을 스크린에 옮기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힌다. 레나는 마테오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 즐거웠다. [씨나몬㈜홈초이스]
집착이 심했던 재벌, 독순술사까지 고용
문제는 옛 연인 어니스토였다. 어니스토는 두 사람이 영화 촬영 현장에서 나누는 감정이 업무의 범위를 넘어선단 사실을 모를 정도로 둔하지는 않았다. 자기 의심이 맞는지 아닌지를 어떻게든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마테오의 표현대로라면 ‘여자에 대한 집착이 어마어마한 남자’였다.

그는 촬영 현장에 ‘메이킹 필름’을 찍는다는 명목으로 자기 아들을 투입하고, 해당 필름에서 감독과 배우가 나눈 대화를 파악하기 위해 독순술사(입술 모양으로 말을 읽어내는 사람)를 고용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레나가 그를 혐오하게 돼 이별을 통보했고, 이를 참지 못한 어니스토는 그녀를 계단 아래로 밀친 것이다.

마테오가 레나를 주인공으로 삼아 찍던 ‘여인과 가방’의 한 장면. ‘영화 속의 영화’는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이 즐겨 사용하는 장치다. [씨나몬㈜홈초이스]
둘은 영화를 완성하고 싶었지만, 어니스토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 촬영을 막으려 했다. 그렇기에 레나는 작품이 완성될 때까지만 어니스토와 같은 집에 살기로 마음먹는다. 일종의 계약을 한 셈이다. 그녀는 증오하는 남자와의 동거를 이어갈 만큼이나 마테오가 영화를 완성하는 것을 돕고 싶었다. 마테오 이야기의 주인공으로서 영화를 끝맺고 싶었다.
두 사람은 떼어놓을 수 없는 사이가 됐다. 어니스토는 그런 둘을 떼어놓을 수만 있다면 악마와의 거래라도 기꺼이 할 수 있을 만큼의 복수심에 불타오른다. [씨나몬㈜홈초이스]
그러나 과연 어니스토가 두 사람을 가만히 뒀을까. 사실 이 영화는 레나와는 약 20년 전에 헤어져 버린 마테오의 하루를 담으면서 시작된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앞을 볼 수 없게 된 마테오는 자기 본명마저 버린 채 케인이라는 이름의 작가로 살아가고 있다. 무엇도 떼어놓을 수 없을 것 같았던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가 궁금하다면 직접 확인해보길 바란다.
왼쪽이 어니스토의 아들. 어니스토는 자기 아들이 찍어다준 메이킹 필름에서 마테오와 레나의 입술 모양을 읽어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한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씨나몬㈜홈초이스]
남의 호의에 주저해야 한다
‘브로큰 임브레이스’는 고전적인 사랑 이야기다. 현실에선 깨어져 버렸던 포옹을 필름으로라도 붙여보려는 영화감독의 슬픈 사랑을 담았다. 관객의 가슴에 아릿함을 남긴다. 액자식의 서사 구성도, 등장인물의 상황을 그대로 읊어 내리는 듯한 삽입곡도 모두 두 사람이 꼭 행복해지길, 아니, ‘덜 불행해지길’ 응원하게 만든다. 이 영화가 얼마나 멋진 러브 스토리인지를 논하는 것이 이 작품에 대한 공정한 평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 칼럼에서는 다른 면을 짚어보려 한다. 바로 돈의 속성이다. 이 작품은 누군가에게 큰돈을 쓴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본전을 찾고 싶어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백만장자 어니스토는 레나를 사랑해서 그녀에게 돈을 펑펑 썼고, 레나가 자기와 연인 관계를 유지할 땐 이를 돌려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을 사랑해준다는 데서 충만감을 느끼며 보상받은 것이다.

어니스토는 레나를 멋진 여성이라고 생각했지만, 레나는 어니스토가 자신을 안을 때 시체와 포개진 느낌을 받았다. 레나의 진심을 안 어니스토는 어떻게든 본전을 찾고 싶은 마음으로 충만해진다. [씨나몬㈜홈초이스]
그러나 레나가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를 사랑한다고 하자 그는 별안간 추심하는 악덕 사채업자처럼 변해버렸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방식으로 레나를 괴롭혔다. 레나는 그때까지 어니스토와 함께한 것만으로 자기 의무는 다했다고 생각했지만, 어니스토는 자신이 지출한 돈, 그리고 내어준 마음에 고금리의 이자까지 붙여서 돌려받기를 원했다.

윤리적으로 보면 당연히 어니스토는 비난받아 마땅한 인물이다. 아름다운 러브 스토리의 완성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추잡한 훼방꾼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철저히 레나의 입장에서 반성해본다면, 그녀는 인생의 어느 시점에 자기 운명을 스스로 꼬아버리는 선택을 내렸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그건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금전적 지원을 받아버린 것이다.

어니스토는 다리를 다친 레나를 살뜰히 보살핀다. 그녀의 부상에 마음 아파한다. 그 부상은 자신이 그녀를 계단에서 밀며 생긴 것이다. [씨나몬㈜홈초이스]
아마도 돈을 사랑했기 때문에 거부(巨富)가 됐을 어니스토는 돈과 자신의 진심을 동일시하게 됐다. 다시 말해 어니스토는 레나에게 돈을 내주며 자기 마음을 내준 것이다. 레나의 마음이 변하자 그는 투자 후에 원금 회수를 위해 노력하듯이 자기 진심을 보상받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처음부터 레나가 그의 ‘마음’을 받지 않았다면 생기지 않았을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체절명의 시기, 내 앞에 놓인 남의 호의에 주저해야 할 것이다. 나에게 크나큰 금전을 거리낌 없이 내준 사람은 진정 아무런 대가를 받지 않는 천사일 수도 있지만, 어니스토일지도 모른다. 그 호의엔 아무런 차용증도 붙지 않고, 법적 구속력도 없어서 그저 취하기만 해도 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원금을 회수하지 못했다고 판단한 순간, 그 호의는 당신의 영혼을 어떤 식으로든 할퀴어가고 말 것이다.

‘브로큰 임브레이스’ 포스터 [씨나몬㈜홈초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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