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g 농축 우라늄’ 때문에 IAEA 사찰단 한국에 들이닥치다

이하원 외교안보 에디터 2025. 3. 23.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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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원 기자의 외교·안보 막전막후 <52회>]
노무현 정부, IAEA 의정서 비준 계기로 핵 물질 실험 신고
“북핵 해결해야 하는데 과학자들이 쓸 데 없는 일 했다”
80년대 플루토늄 추출 사례까지 나오면서 사태 증폭
‘반미’ 盧 정부에 불만 품은 미국 강경파의 음모론 등장

최근 미국 에너지부가 한국을 ‘민감 국가 및 기타 지정 국가 목록(SCL)’에 포함시키는 방안을 추진,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이는 앞으로 원자력을 포함한 에너지 협력에서 한국과 거리를 두려는 의도로 해석돼, 실제 지정이 이뤄지면 유·무형의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습니다.

이에 대해 조셉 윤 주한 미국 대사 대리는 한국이 민감 정보를 부주의하게 다룬 것이 문제의 원인이라며 외교·안보 정책과는 무관하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이후 한미 양국은 긴급 협의를 통해 한국이 문제의 목록에 포함되지 않는 방향으로 의견을 모았지만, 논란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IAEA 추가 의정서 비준 후 과거 핵 실험 신고

이번 사태의 근저에는 한국 내에서 확산되고 있는 핵무장론이 미국의 경계심을 불러일으킨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민주당을 비롯한 진보 진영에서 나왔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2007년 7월 11일 청와대에서 국제원자력기구(IAEA) 창설 50주년을 맞아 한국에서 개최된 '한-IAEA 협력 50주년 기념 컨퍼런스' 참석차 방한한 무함마드 엘바라데이 IAEA 사무총장을 접견하고 있다. 엘바라데이 사무총장은 2004년 한국의 핵물질 실험 사건에 대한 강경 대응을 주도했었다. /e영상역사관

최근의 상황은 2004년 한국의 비밀 핵물질 실험이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던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당시 한국은 미량의 우라늄 농축 실험에 이어 플루토늄 추출 실험 사실이 알려지면서, 미국의 주도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부 가능성까지 거론돼 전례 없는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2004년의 논란은 한국이 국제원자력기구(IAEA)와의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안전조치협정 추가 의정서(Additional Protocol)’를 비준하면서 시작됐습니다. 이 의정서는 원자력 기술 발전에 따라 각 국의 이와 관련된 활동의 보고 범위를 확대한 겁니다.

한국은 1999년 오스트리아 주재 대사관을 통해 추가 의정서에 서명하였고, 2004년 2월 국회 비준을 거쳐 이를 발효시켰습니다. 이로써 한국은 과거에 보고하지 않았던 핵 활동에 대해서도 IAEA에 상세한 정보를 제출해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2000년 12월 한국원자력연구소(KAERI)에서 진행된 비밀 우라늄 농축 실험이 드러났습니다.

천연 우라늄에는 원자량 238과 235가 섞여 있습니다. 원자력 발전 및 우라늄 핵 무기에 사용되는 우라늄은 235인데, 천연 우라늄에는 전체의 0.7%밖에 되지 않기에 농축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2000년 KAERI에서 극비리에 새로운 레이저 기술(AVLIS·원자증기 레이저 동위원소 분리법)을 이용한 소규모 우라늄 농축 실험이 진행됐습니다. 그 결과 총 0.2g의 고농축 우라늄을 분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일부 검출치에서는 77~80%에 이르는 고농축 우라늄이 나온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충남 대전시 대덕특구에 위치한 한국원자력연구원(KEARI) 모습. 원자력연구소가 2007년 원자력연구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KAERI 홈페이지

◇ 핵 물질 실험에 비상 걸린 청와대와 외교부

한국의 핵 물질 실험은 원자력연구소에서도 소수만 알고 있던 것으로 과학기술부가 이를 인지한 것은 2004년 6월이었습니다. 과기부는 이 사안이 외교적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해 청와대와 외교부에 이를 알렸습니다. 당연히 노무현 정부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추가 의정서에 따르면 비준한 지 180일 이내에 과거 핵 활동에 대한 신고서를 제출하도록 돼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정부 내에는 8월 23일 IAEA에 신고서를 제출할 때까지 원자력연구소의 실험을 어떻게 판단해야 하며, 어디까지 보고해야 하는지를 둘러싸고 비밀리에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당시는 북한이 핵실험을 하기 전이었고, 한국의 핵 무장론은 아직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원자력 발전에 사용되는 우라늄을 전량 수입하는 우리나라가 IAEA에 맞선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습니다. 이 때문에 노무현 정부 내에서는 “북핵 문제 해결에 주력해야 하는 상황에서 원자력연구소가 불필요한 행동을 했다”는 비판이 강했습니다.

하지만, 원자력연구소가 과학적 측면에서 해야 할 일을 했다는 분위기도 있었습니다. “우리도 기술적 가능성을 점검해볼 필요가 있었다”는 반론이 맞섰습니다.

외교부는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투명하고 신속한 조치를 강조했습니다. 자발적인 정보 공개를 통해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는 것이 최선이라는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외교부 고위 관계자는 “과학적으로는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우라늄 분리 실험에 성공했다는 측면이 있다”며 “우리는 이것이 IAEA의 새로운 규정 위반이 아니라는 입장이지만 IAEA가 문제 삼을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습니다.

◇ “정부 승인 없이 이루어진 단독 실험”

결국, 노무현 정부는 2004년 8월 “2000년 핵무기 개발과 무관한 순수 연구 목적의 실험에서 극미량의 농축 우라늄을 얻은 후 실험실을 폐쇄했다”는 입장을 보고서에서 밝혔습니다. 정부는 해당 실험이 공식 승인 없이 과학자들에 의해 독자적으로 수행된 것이라며, 핵무기 개발과는 관계없다고 해명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원자력연구소의 장인순 소장도 실험의 목적이 학문적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아울러 IAEA의 규정뿐만 아니라 남북 비핵화공동선언을 어기지도 않았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1992년 남북 비핵화공동선언 3항은 “남과 북은 핵 재처리 시설과 우라늄 농축 시설을 보유하지 아니한다”고 명시돼 있는데, 연구·실험 차원의 우라늄 농축은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겁니다.

당시 반기문 외교부 장관과 오준 국제기구정책관 등은 비확산 체제의 신뢰를 지키는 것이 우선이라 보고, 국제사회의 오해와 제재를 사전에 차단하고자 했습니다. 원자력 발전에 필요한 우라늄을 전량 수입에 의존하는 상황에서 IAEA 제재가 현실화될 경우, 원자력 산업 자체가 타격을 입을 수 있었습니다.

2000년 원자력연구소의 농축 우라늄 분리 실험을 보도한 조선일보 2004년 9월 3일자 2면. IAEA는 이를 규정 위반으로 보고 즉각 사찰단을 파견했다.

◇IAEA 이례적으로 1주일 만에 사찰단 파견

정부는 이 사안을 조용히 처리하고자 했으나, IAEA와 미국의 반발로 사태가 확대됐습니다. 미국은 “동맹국인 한국이 비밀리에 핵실험을 했다”고 보고, 강한 우려를 표명하며 유엔 안보리 회부를 검토하기 시작했습니다. IAEA는 한국의 보고를 받은 지 불과 일주일 만인 2004년 8월 31일, 이례적으로 즉각 사찰단을 파견했습니다. 장인순 전 원자력연구소장은 21일 인터뷰에서 “통상적으로 IAEA가 사찰단을 파견하는 데 수개월이 걸리는데, 우리가 신고한 지 불과 1주일 만에 사찰단이 들이닥쳤다”고 했습니다.

사찰단은 9월 4일까지 원자력연구소에서 실험에 참여한 과학자들을 조사하고, 분리 실험에 성공한 0.2g 중 절반인 0.1g의 시료를 가져갔습니다. 서방 언론은 일제히 한국을 비판하는 보도를 쏟아냈는데, 일부 외신은 “실험량은 미미하지만, 순도는 무기급에 근접했다”고 자극적인 보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터졌습니다. 2004년 9월 9일, AP통신이 한국이 2000년 우라늄 농축 실험 전인 1980년대에 플루토늄 추출 실험을 했다고 보도하면서 사태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습니다. 일각에서는 반미 정서를 바탕으로 집권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미국 강경파의 불신이 이번 사태 확산의 배후에 있다는 음모론도 제기되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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