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송 시작하자 "각서 쓰고 들어와라" 복귀 회유

김성후 선임기자 2025. 3. 22.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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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 언론의 편집장, 안종필 평전]
㉓법정투쟁, 3년 7개월만에 패소
1975년 3월17일 동아일보에서 쫓겨난 해직언론인들은 6개월(3월18일~9월17일)간 매일 아침 동아일보사 앞에서 침묵시위를 하고 신문회관까지 행진했다.

'길거리 언론의 편집장'은 안종필 기자(1937~1980)에 대한 기록이다. 안종필은 1975년 3월 동아일보에서 쫓겨난 후 동아투위 2대 위원장을 맡아 권력의 폭압이 절정으로 치닫던 1970년대 후반 자유언론실천운동을 이끌었다. 신문과 방송이 일체 보도하지 않은 민주화운동과 인권 관련 사건 등을 <동아투위소식지>에 실었다가 구속됐고, 투옥 중 얻은 병마로 1980년 타계했다. 안종필의 이야기를 매주 2회 연재한다. [편집자 주]

1978년 1월9일 안종필은 서울고법 226호 법정에서 열린 ‘해고 및 무기정직처분 무효확인 청구소송’ 항소심 판결공판에 참석했다. 가슴을 졸이며 판결을 기다리던 안종필은 낙담했다. 서울고법민사1부(재판장 전상석, 배석판사 이태훈, 최종백)는 동아투위 측 63명 전원에게 패소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원고 63명이 어떤 행위를 했는지 개인별로 간추려 설명하고 있는데 안종필에 대해서 “편집부 차장으로 일반 평사원을 계도하여야할 직책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75년 3월12일자 편집국 집회의 결의사항에 적극 찬동하여 신문제작 등을 거부하여 그 직무를 유기하고 편집국 농성에 참가하였으며, 그 농성이 해제된 1975년 3월17일 이후에도 계속 출근을 거부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1심에서 승소한 장윤환, 박지동, 서권석, 김병익, 임부섭 등 5명도 패소판결을 내렸다. 징계기간 중임에도 회사에서 금지하고 있는 유인물 ‘알림’을 제작·배포했다(장윤환), 주필 이동욱에게 욕설을 했다(박지동), 제작거부를 결의한 1975년 3월12일 총회에 참석하고 방송국 주조정실을 점거해 방송을 방해했다(서권석), 사규와 회사 간부의 지시를 어기고 한국기자협회 회장에 출마, 취임했다(김병익), 제작거부 의사를 밝히고 출근하지 않았다(임부섭)는 이유였다.

동아투위는 항소심 판결 관련 성명에서 “지금까지 내세웠던 자유언론 수호활동이 이 판결에 불구하고 1심 판결에서 그 정당성이 공인되었음을 기정사실로 확인한다”며 항소심 판결에 불복하고 대법원에 상고하겠다고 밝혔다.

1975년 9월29일 서울민사지법 224호 법정에서 열린 '해고 및 무기정직처분 무효확인 청구소송' 3회 공판에서 동아일보가 신청한 10명의 증인 발언 요지를 전한 동아투위 유인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동아투위 “49명 해고, 84명 무기정직 무효”
동아투위 소속 121명은 1975년 6월21일 동아일보사와 대표이사 김상만을 상대로 해임 및 무기정직처분 무효확인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소송의 청구요지는 동아일보사가 1975년 3월8일부터 5월1일까지 7차례에 걸쳐 49명을 해고하고 84명을 무기정직처분한 것은 근로기준법 27조1항(부당해고 등 금지) 위반이므로 법률상 무효라는 것이었다.

서울제일변호사회와 서울변호사회가 공동으로 소송을 맡았다. 소송 대리인은 김제형, 황인철, 이일재, 김춘봉 변호사였다. 이 사건을 배당받은 서울민사지법 합의9부(재판장 김용준 부장판사, 박재윤, 이영애 판사)는 1975년 8월19일 첫 공판을 시작으로 1976년 6월12일까지 모두 14차례 공판을 열었다.

1심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121명 가운데 52명이 소를 취하했다. 소 취하는 회사복귀 움직임과 관련이 있었다. 동아일보사는 1975년 7월 초 무기정직을 받은 사원을 대상으로 복귀조건을 제시했다. △1974년 3월 노동조합 파동 때 인사조치 당한 전력이 없을 것 △동아투위에서 간부직을 맡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을 것 △3월12일부터 회사 2층 공무국에서 단식농성을 한 기자들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을 것 △3월18일 이후 계속되어 온 회사 앞 도열시위에 열심히 참여하지 않았을 것 △이후 사내에서 어떤 집단행동도 하지 않는다는 등 회사가 요구하는 소정의 각서에 서명할 것 △현재 민사지법에 제기하고 있는 부당인사조치 무효확인 청구소송에서 자기의 이름을 지운 다음 그 사본을 회사에 제출할 것 등 6가지였다.

당시 소송 취하 상황을 정연주는 이렇게 증언했다. “1975년 6월 말을 데드라인으로 정해 이런 메시지가 동아투위에 들어왔다. ‘복귀하려면 지금 해라. 앞으로는 기회가 없다.’ 쫓겨난 사회부 기자 7명이 따로 모여 회의를 했다. 복직신청을 하자, 안 된다 등 주장이 엇갈렸다. 나는 그렇게 의견을 밝혔다. 각자 독립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사람이고, 동아일보에서 나올 때도 실존적 결단을 내리고 나왔다. 복귀하는 문제도 각자에게 맡겨야지. 회의로 결정할 문제는 아니다. 자연스럽게 각자에게 맡기는 게 옳다. 누가 복직을 신청했는지 대강 알았다. 한동안 서먹서먹했다.”

5개월 동안 겪은 생활고와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회사로 복귀를 희망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생계를 책임져야 했고, 돌봐야 할 아이들이 있었고, 쫓겨났을 때 곧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사람도 많았다. 함께 돌아가야지 나 혼자는 안 된다는 사람도 있었다. 저마다 사정이 다 다른데 누가 옳다고도 할 수 없었다. 8월 초 무기정직처분을 받은 사원 30여명이 복직을 신청했는데, 최종적으로 복귀한 사람은 4명에 불과했다.

당시 동아일보 주필이던 이동욱은 2001년 6월 MBC 특집프로그램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작진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왜 그런 사람들이 나중에 동아일보 다시 들어오겠다고 야단합니까? 그때도 하나하나, 우리 들어오라 그랬어요. 하나하나 각서 쓰고 들어오라. 그렇지 않고 떼거지로 들어오면 여기 일 하는 사람들, 벌써부터 동아일보 지키고 있던 제작파하고 제작거부파가 있지 않습니까? 제작파하고 나중에 제작거부파하고 또 싸움이 붙어요. 그러니까 한 사람 하나씩 각서 쓰고 들어오라. 한 사람 하나씩 쓰고 들어와 일들 하고 있는 사람들 있습니다. 몇 명.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발간한 '2008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일부.

1심 법정공방에는 23명의 증인이 나왔다. 원고 측 증인으로 전 편집국장 송건호, 서울여대 교수 이우정, 피고 측 증인으로 강제축출 현장 책임자였던 판매 2부장대우 조종명, 인사부장 유옥재 등이다.

송건호는 해고 등 무효확인소송 5차 공판(1975년 11월8일)에 증인으로 나와 이렇게 증언했다.

3월8일 사원 18명을 해임할 때 사전협의를 한 바 없고 간부회의에서 사장이 주주총회 보고형식으로 통보했다. 광고사태로 야기되는 경영난은 2, 3개월 후 나타나는 것으로 들었으며, 3월8일 무렵에 경영난이 심각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회사 측은 최근 취재범위가 줄어 기자 수를 줄여왔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사실은 그 반대로 출입처가 확대되어 몇몇 부장들이 기자 증원을 요청해오곤 했다. 감원 해임 후 스스로 봉급을 깎아 함께 일하고 싶다는 기자들의 뜻을 전했으나 김상만 사장은 “주주총회의 결정이니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언론사의 특수성으로 보아 기구축소를 하더라도 제작부서가 아닌 외각지원부서부터 하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되며, 그렇지 않을 경우라도 제작부서와 비제작부서 반반씩 감원하는 것이 마땅하다. 기구축소로 폐지된 기획부, 과학부, 출판부 등에는 노조임원이나 자유언론실천특위원 등 회사 측에서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기자들이 많았다. 위계질서문제는 제작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언론기관은 속성상 위계질서가 엄격하지 않아서 언론보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될 때는 아랫사람이 시정을 요구하거나 항의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김상만 “경영난보다는 위계질서 문란이 해임사유”
이우정은 같은 공판에서 1975년 3월 집단해직 때 동아일보 사장 김상만을 면담, 해임 철회를 요구했던 내용에 대해 “윤보선 대통령 부인 공덕귀 여사, 기독교장로회 주재숙 여신도연합회장, 서울연합회장 김명주, 총무 구충회, 기장총무 김윤옥씨 등 6명이 김상만 사장을 면담했을 때 김 사장이 ‘광고 해약사태로 경영이 어려워 기구 축소했다’고 밝혔다. 이에 ‘우리 신구종교단체에서 해임사원들의 인건비를 맡을 테니 복직시켜달라’고 했더니 경영난 때문이라기보다는 위계질서 문란이 해임사유라고 번복했다”고 증언했다.

1심 재판은 해를 넘겨 선고공판이 1976년 7월13일 오전 10시 서울민사지법 224호 법정에서 열렸다. 김병익, 장윤환, 박지동, 서권석, 임부섭 등 5명이 승소하고 안종필 등 나머지 64명은 기각판결을 받았다.

1심 재판부는 “농성행위나 방송제작 방행해위가 해고된 동료들을 구제하고, 자신들의 언론활동의 자유와 신분보장을 위한 조처를 취해달라는 의사를 회사에 표시하기 위한 마지막 수단이었다 하더라도 회사의 본래 업무나 기능에 현저한 지장을 주는 한 정당한 행위라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동아일보는 1심판결에 불복해 항소했고, 1심판결에 패소했던 동아투위 69명 중 6명을 제외한 63명도 항소했다. 1978년 1월9일 항소심 판결공판에서 재판부는 1심의 일부 승소를 뒤엎고 동아투위 측 63명에 대해 전원 패소판결을 내렸다. 이에 동아투위는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대법원 민사부(재판장 임항준, 판사 주재황, 양병호, 라길조)는 1979년 1월30일 ‘이유없다’고 원고 전원에 대해 패소판결을 확정했다.

대법원은 “경영난 때문에 기구를 폐지하고 소속인원을 해고한 사실이 인정되고 노조간부나 실천특위 위원을 해고하기 위해 기구 폐지를 했다고 보기 어렵다”면서 원심을 확정했다. 1975년 6월 소송을 제기한 이후 대법원 판결이 있기까지 만 3년 7개월이 걸렸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일부 사원들의 감봉제의나 외부 사회단체의 봉급부담 제의는 일시적이고 목가적인 조치에 불과하여 피고회사의 경영상태를 호전시키는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없다”면서 “원고들이 상사들에 대해 모욕적인 발언을 하거나 방송제작 및 신문제작 거부 결의를 하고 방송국 주조정실을 점거하며 방송을 불가능하게 하였으며, 신문사 편집국과 공무국에서 농성을 하여 신문제작을 방해하였다는 원심의 판정을 인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언론자유를 수호 발전시켜야 한다고 해도 사규와 질서를 초월, 무시하여 감행하는 이른바 자유언론실천운동을 내세워 극한투쟁을 일삼는 것은 제재를 받아야 할 것으로 본다”고 판시했다.

대법원은 동아일보가 1975년 3~5월 언론인 49명을 해임하고 84명을 무기정직한 것은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경영상 이유로 해임 및 정직했다는 동아일보 주장을 받아들이고, 사규와 질서를 초월해 극한투쟁을 벌인 것은 제재를 받아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사원들의 감봉 제의나 외부 사회단체의 봉급부담 제의를 일시적이고 목가적인 조치라고 폄훼했다.

하지만 훗날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언론인 해직에 동아일보사도 책임이 있음을 분명히 했다.

진실화해위는 2008년 10월29일 “1974~1975년 동아일보 광고탄압 및 강제해직 사건은 국가 공권력이 자행한 중대한 인권침해에 해당한다”고 발표했다. 진실화해위는 “1974년 동아일보 광고탄압과 1975년 기자 해직 사건은 유신정권 당시 중앙정보부가 직무 범위를 벗어나 모든 역할을 주도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진실화해위는 국가와 동아일보사 쪽에 “당시 해직자들에게 사과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강제해직과 관련해 “동아일보사는 비록 광고탄압이라는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로 야기된 경영상의 압박이 있었다고 해도 언론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헌신해왔던 기자들을 보호하기는커녕 정권의 요구대로 해임함으로써 유신정권의 부당한 요구에 굴복했다”며 “결과적으로 언론의 자유, 언론인들의 생존권과 명예를 침해한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참고자료>

◎ 동아일보사 노동조합, 『동아자유언론실천운동백서』, 1989
◎ 동아투위, 『자유언론 40년』, 다섯수레, 2014
◎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2008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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