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사상 탄핵안 발의는 총 50건…실제 탄핵 인용은 ‘박근혜’가 유일
헌재로 간 탄핵 16건 중 13건이 尹 정부와 관련…판결 나온 8건은 기각
(시사저널=김현지 기자)
대한민국의 최고 권력자도 그 직에서 끌어내릴 수 있는 수단이 바로 탄핵 제도다. 행정부 수반인 현직 대통령을 견제하기 위한 국회만의 고유 권한이다. 헌정사상 세 번째 대통령 탄핵 사건을 마주한 2025년 3월20일 현재, 윤석열 대통령의 명운이 중대한 갈림길에 놓였다. 윤 대통령을 포함한 대통령 3인의 운명을 불과 20여 년 사이 헌법재판소가 좌우하고 있다. 대통령이 임명한 헌법재판관이 국민이 세운 권력도 무효화할 수 있는 권력기관이 된 모습이다. 윤 대통령 탄핵심판에 대한 최종 결정을 앞두고 대중적 관심이 높아진 가운데, 법조 인사들의 설명과 사료 등을 토대로 탄핵의 역사를 되짚어봤다.
1~8번째 탄핵 대상 대법원장·검찰총장 등 37명 도마에
70여 년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총 50건의 공직자 탄핵안(중복 발의 포함)이 발의됐다. 1948년 제헌국회부터 2025년 3월20일을 기준으로 하면, 국회가 1년6개월에 한 번꼴로 탄핵안을 내놓은 셈이다. 한 공직자에 대한 여러 건의 탄핵안을 제외하면 37명이 도마에 올랐다. 2022년 5월 출범한 윤석열 정부에서는 23명이 탄핵의 표적이 됐다. 국회 재적의원 300명 중 3분의 1 이상인 100명, 많게는 150명(대통령은 재적의원 과반수) 이상이 모여 대통령이나 국무총리, 장관 등에 대한 탄핵안을 발의했다는 의미다.
그렇다고 모든 탄핵안이 국회 문턱을 통과한 건 아니다.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은 국회의원 재적 3분의 2인 200명, 국무총리 등 다른 공직자의 경우 과반수인 150명 이상이 모여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할 수 있다. 이러한 '머릿수'를 채우지 못한 사례, 즉 여야의 정치적 셈법에 따라 발의됐다가 폐기 혹은 철회된 경우 등도 수차례 있었다. 결과적으로 현 정부 공직자 13명을 포함해 역대 정부에서 탄핵안 16건만이 본회의에서 가결돼 헌법재판소로 넘어갔다. 그 첫 사례가 16대 국회에서의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사건이다(표 참조).
당초 1948년 7월17일 헌법 제정 때만 해도 탄핵의 실현성은 낮게 점쳐졌다. "공직자, 특히 대통령을 탄핵소추하고 파면하는 일이 설마 벌어지겠는가"라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는 것이다. 그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탄핵은 심각한 위헌·위법 사유 발견, 까다로운 국회 발의·통과 등의 절차를 거쳐야 했다. 노 전 대통령이 헌재 심판정에 오른 첫 사건의 주인공이 됐을 때 예상치 못한 반응이 나온 배경이다. 헌정사상 처음 탄핵이 인용된 박근혜 전 대통령 사건 역시 숱한 논란에 휩싸였었다. 현재로서는 박 전 대통령만이 헌재에서 파면된 유일한 공직자로 기록되고 있다.
노태우 정부 때인 1988년 헌법재판소가 출범할 당시만 해도 사실 이 기관을 주목하는 시선은 별로 없었다. 헌재의 전신인 탄핵재판소 등에는 지금처럼 헌법재판관이 존재하지도 않았다. 1948년 제정된 헌법 제47조는 "탄핵재판소는 부통령이 재판장의 직무를 행하고 대법관 5인과 국회의원 5인이 심판관이 되지만, 대통령과 부통령을 심판할 때에는 대법원장이 재판장의 직무를 행한다"고 규정했다(이승만 정권의 제1공화국 때엔 우리도 미국처럼 대통령과 부통령 제도를 두고 있었다). 별도의 재판관을 두는 게 아니라, 행정·입법·사법 권력이 탄핵제도를 공동 운영한 셈이다. 이들 심판관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야 공직자가 파면되도록 했다. 당시에도 파면된다고 해서 민형사상 책임이 면제되는 건 아니라는 단서 문구는 있었다.
지금의 헌재와 유사한 기구가 등장한 건 1960년 6월15일의 일이다. 당시 개정안에는 헌재가 탄핵재판 등을 담당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는 제5차 개정헌법(1962년 12월26일)에서 사라졌다. 대신 탄핵심판위원회를 두도록 했다. 탄핵심판위원회 위원장은 대법원장이, 위원은 대법원 판사 3인과 국회의원 5인으로 구성됐다. 6인 이상 찬성 규정은 이때에도 적용됐다. 제4공화국 유신헌법에서는 탄핵심판위원회가 헌법위원회(1972년 12월27일)로 바뀌었다. 1987년 10월29일 9차 개정 과정에서 지금의 헌재 체제가 완성됐다.
헌재는 이를 토대로 1988년 9월 공식 출범했다. 당시만 해도 재판관 9인 중 6명만 상임이었다. 3명은 비상임이었다. 당시 국민 뇌리 속에는 헌법재판관의 존재조차 희미할 정도였다. 1991년에야 비상임 재판관 3명이 상임으로 전환됐다.
이러한 헌정사 이전의 역사에도 탄핵의 흔적은 존재한다. 상해 임시정부 시절의 일이다. 고(故)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19년 4월10일 구성된 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로 임명됐다. 1919년 6월에는 대한민국 대통령의 명의로 각국 지도자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동시에 미국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했다. 임시정부 규정에 없는 대통령 직책을 사용한 데 대해 내부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입법부와도 같은 임시정부 의정원은 1919년 9월 이 전 대통령을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문제는 이 전 대통령의 국제연맹 위임통치안이 논란을 부르면서 불거졌다. 사실상 미국의 위임통치라는 반발이 거세졌다. 의정원은 결국 1925년 3월11일 이 전 대통령을 탄핵해 직을 박탈했다.
21·22대 국회에서 탄핵 남발…26명 중 14명이 헌재 심판대에
60년이 흘러 유태흥 대법원장이 대한민국 헌정사상 처음 탄핵 대상이 됐다. 공안 사건 피의자들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는 등 군사정권과 결을 달리한 판사들의 인사 조치가 발단이었다. 유 대법원장이 정권을 위해 보복성 인사를 했다는 취지다. 다만 이는 국회에서 가결되지 못했다. 이후 12·12 군사반란 사태 관련자들에 대한 기소유예 등 '봐주기' 처분, 보수 정당에 불리한 선거사범 수사 등 여야 각자의 정치적 셈법에 따른 검찰총장 탄핵안이 수차례 발의됐다. 1~8번째 탄핵안에 이름을 올린 공직자가 모두 사법부 혹은 준사법기관 소속이라는 사실은 공교롭다. 이때부터 20대 국회까지 탄핵 발의 명단에 오른 공직자는 국회 대수별로 최대 4명에 그쳤다.
2020년 21대 국회가 시작되자 탄핵 건수는 급증했다. 21대에서는 13건, 22대에서는 18건의 탄핵안(중복 발의 포함)이 발의됐다. 입법부의 표적이 된 공직자만 21대에 9명, 22대에 17명 등 모두 26명이다.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21대)을 제외한 나머지는 더불어민주당 등이 내놓은 안이다. 전체 발의안 31건 가운데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 헌법재판소에 접수된 건은 14건이다. 2022년 5월 현 정부가 출범한 후 탄핵소추된 공직자는 이 중 13명으로 집계됐다.
헌재는 이와 관련해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에 휩싸인 임성근 전 판사의 경우 '현직 법관이 아니'라는 이유로 각하를, 나머지 8건은 중대한 위헌·위법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기각 결정했다. 각하는 소송 요건조차 되지 않아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각은 형식적인 요건이 되지만 받아들일 만한 내용이 아니라는 점을 각각 의미한다. 민주당으로서는 '9전9패'인 셈이다.
다만, 아직 결론이 나오지 않은 사건도 존재한다. 12·3 비상계엄 사태와 관련해 윤석열 대통령, 박성재 법무부 장관, 조지호 경찰청장 탄핵심판이다. 한덕수 총리 탄핵심판은 3월24일 선고된다. 윤 대통령(사건 당시 검찰총장) 비판 세력 고발을 정치권에 사주한 의혹을 받는 손준성 검사의 사건도 현재 진행 중이다.
Copyright © 시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