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루마리 화장지 중심에 둥근 관…근데 그거 뭐지? [그거사전]

홍성윤 기자(sobnet@mk.co.kr) 2025. 3. 22.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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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사전 - 62] 두루마리 화장지 다 쓰면 나오는 종이심 ‘그거’

“그거 있잖아, 그거.” 일상에서 흔히 접하지만 이름을 몰라 ‘그거’라고 부르는 사물의 이름과 역사를 소개합니다. 가장 하찮은 물건도 꽤나 떠들썩한 등장과, 야심찬 발명과, 당대를 풍미한 문화적 코드와, 간절한 필요에 의해 태어납니다. [그거사전]은 그 흔적을 따라가는 대체로 즐겁고, 가끔은 지적이고, 때론 유머러스한 여정을 지향합니다.
[사진 출처= The Art of Education University]
명사. 1. 지관(紙貫) 2. 휴지심 3. (美) 토일렛 페이퍼 튜브, 카드보드 튜브 【예문】게으른 룸메이트와 살다 보니 화장실엔 버리지 않은 지관이 가득하다.

지관(紙貫)이다. 종이로 만든 원통형의 심을 뜻한다. 흔히 휴지심이라고도 하지만 제조 현장에서 쓰이는 공식 명칭은 지관이다. 한뼘도 안되는 짧은 심을 왜 구태여 ‘관’이라고 부를까. 두루마리 화장지의 제조과정을 보면 이유를 알 수 있다. 공장에 입고된 대형 화장지 원지를 풀어 무늬를 인쇄하고 오돌토돌한 엠보싱 패턴을 입히는 작업을 끝내고 나면 가공이 끝난 화장지를 긴 지관에 일정한 길이로 감고, 지관과 화장지를 함께 일정한 길이로 끊어낸다. 김밥을 만드는 과정과 똑 닮았다.
두루마리 휴지와 휴지심. [사진 출처=-국립국어원]
사실 지관이라는 단어는 없다. 땅속에 파묻은 관을 뜻하는 지관(地管)이나 골무를 뜻하는 지관(指貫), 불교에서의 천태종을 다르게 부르는 지관(止觀)은 있지만 지관이란 단어는 등재돼있지 않다. 다만 한자 생활권인 한국에서 ‘종이로 만든 관’임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단어가 오랫동안 쓰이면서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인다. 포스터 등이 구겨지지 않도록 돌돌 말아 넣어두는 종이 재질의 원통은 ‘지관통’이라고 하는데 이 역시 지관에서 파생된 단어다.

휴지심도 표준어로 채택되지 못했다. 변비가 아니라면, 적어도 하루에 한 번씩은 만나게 되는 일상 속 필수품(의 일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름 없는 ‘그거’인 셈이다. 속(특히 한가운데)에 있는 물건을 이르는 심(心·芯)과 합쳐진 연필심·볼펜심이란 단어가 이미 표준어로 등재된 것을 보면 아쉬움은 더 커진다. 국립국어원에서는 휴지심에 대해 ‘표준국어대사전의 표제어로 올라 있지는 않지만 국립국어원의 참여형 사전인 우리말샘에 올라 있으므로 이를 써서 표현하길 권한다’고 밝히고 있다.

조지프 가예티가 1857년 발명한 최초의 상용 휴지. 위 사진은 해당 제품의 복각판으로 추정된다. 현재 인류가 품위를 지킬 수 있게 된 것 모두 그의 덕이다.
미국의 사업가 조지프 가예티(Joseph C. Gayetty, 1827~1895)는 1857년 최초의 상용 휴지를 발명했다. 알로에가 함유된 마닐라삼 재질의 휴지로 치질을 예방하는 치료용 제품으로 판매됐는데, 낱장으로 된 화장지 500장을 상자에 담은 형태였다. 현재의 갑티슈와 비슷하다. 가예티는 자신의 자랑스러운 발명품 한장 한장 마다 자신의 이름(J C Gayetti NY)을 새겨놓았다. 지나친 자기애 무엇. 덕분에 가예티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이들의 엉덩이를 닦아준 영예로운 이름이 됐다.

사람들의 ‘뒤를 봐준’ 인물은 가예티가 처음이긴 했지만, 마지막은 아니었다. 2019년 영국의 한 경매에서 160파운드(약 28만원)에 낙찰된 두루마리 휴지가 있다. 1930년대 후반 영국에서 생산된 이 휴지는 20칸 정도 남아있었는데, 여기에는 히틀러를 포함한 나치를 조롱하는 캐리커처 이미지가 그려져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던 당대의 시대상을 보여준다. 히틀러 그림 아래 “나는 이제 온통 갈색 셔츠네요.”라고 적힌 부분은 좀 많이 더럽긴 하지만 말이다. 히틀러 이후 ‘휴지 초상화’의 명맥이 끊기나 싶었지만 2016년 화려하게 부활했다. 주인공은 바로 당시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이자 후일 미국 대통령이 된 도널드 트럼프였다.

히틀러와 나치 캐릭터가 그려져 있는 1930년대 화장실 휴지. 영국인들의 비틀린 유머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사진 출처=Chorley‘s Auctioneers]
다시 휴지의 역사로 돌아가자. 뉴욕주의 소도시 알바니 태생의 세스 휠러(Seth Wheeler, 1838~1925)는 쉽게 휴지를 끊어서 쓸 수 있도록 돕는 절취선(1871년 특허)과 지관을 중심으로 둥글게 말린 두루마리 형태의 화장지(1883년 특허)를 발명한 두루마리 휴지의 아버지다. 하지만 당시 대중들은 ‘뒤처리’를 창피하게 여겼던지라 지금처럼 생활 필수품으로 자리 잡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세스 휠러는 자신이 발명한 두루마리 휴지를 여러 차례 개선했는데, 위 특허 이미지도 그중 하나다. [사진 출처=구글 특허]
세스 휠러가 낳은 정(情)이라면 어빙·클라렌스 스카트 형제(Irvin Scott, Clarence Scott)는 기른 정이다. 비유가 좀 이상하지만 아무튼 그렇다. 이 형제는 화장지 시장을 개척했다. 1879년 스카트 페이퍼 컴퍼니를 차리고 1890년 두루마리 형태로 된 휴지를 대중화했다. 스카트는 1907년에는 키친 타올(종이 행주), 1930년에는 갑 티슈를 내놓으며 시장을 선도했다. 1980년대 쌍용제지(현재 쌍용C&B)와 제휴를 맺고 비바·스카티 브랜드를 한국에 내놓기도 했다.
쌍용제지의 1985년 스카티 광고. 킴벌리의 스카트 인수 이후에는, 한국 유한킴벌리에서 스카트란 이름으로 다양한 제품을 내놓고 있다. [사진 출처=광고정보센터]
스카트가 화장지 시장을 공격적으로 확장하는 과정에서 내놓은 광고 중 ‘당신의 화장실이 볼셰비키를 키우고 있습니까?’라는 도발적인 문구의 잡지 광고가 눈에 띈다. 1932년 타임지에 실린 이 광고는 질 좋은 스카트 화장지를 제공하면 회사 직원들이 급진적인 공산주의 혁명가가 되지 않을 것이란 내용을 담고 있다. 사소한 부분부터 직원 복지와 편의를 챙기라는, 의도는 좋았다.
스카트社 광기의 1930년대 잡지 광고. “당신의 화장실이 볼셰비키를 양산하고 있습니까?”라고 묻는 패기가 놀랍다. [사진 출처=공공 저작물]
스카트는 1995년 경쟁사이자 세계 최대 미용화장지 생산업체인 킴벌리-클라크에 인수됐는데, 인수 규모는 94억 달러(약 13조 7300억 원)에 달했다. 지금 기준으로 엄청난 금액이지만, 당시의 화폐 가치를 체감할 수 있는 사례를 하나 찾아봤다. 1997년 12월 3일 IMF 구제금융이 체결된 직후,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범국민적 금 모으기 운동이 전개됐다. 석 달간 국민 351만 명이 참여해 227톤에 달하는 금을 모았는데 그중에는 수많은 결혼 반지와 돌 반지, 운동선수들의 금메달, 김수환 추기경의 십자가도 포함돼 있었다. 이렇게 모은 금 대부분을 수출해서 확보한 외환이 18억 달러였다.
  • 다음 편 예고 : 책 사이에 있는 줄 ‘그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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