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부와 결혼합니다, 재산이 많거든요”...이 남자의 노림수, 세계를 바꾸다 [히코노미]
[히코노미-17] 슬픔도 세월 속에 풍화하기 마련인가 봅니다. 사랑하는 남편이 두 아들을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난 지 몇 달. 다시 삶의 의지가 작은 불꽃이 되어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지친 내 옆을 지켜주던, 위로를 건네주던 남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잘생기고, 건실하기까지 한. 죽은 남편을 참 많이 닮은 남자. 어느 날 그가 건넨 꽃다발에 눈물이 터졌습니다. 결혼하자는 청혼을 받아들였습니다.
눈만을 그윽하게 쳐다봐 주던 새 남편. 결혼 후부터 그의 눈길은 자주 ‘장부’로 향했습니다. 전 남편이 모아놓은 재산을 노렸기 때문입니다. 그가 사랑했던 건 제가 아니었습니다. 재산이었습니다. 사랑이라고 믿었던 그 모든 행위가 그의 계산 속에서 이뤄지던 것이었습니다.
새 신부의 돈을 빼돌린 잔혹한 남자의 이름은 토마스 그레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샴의 법칙은 이 남자의 이름에서 따왔습니다.
동시에 잉글랜드를 세계적인 국가로 만든 사내이기도 했습니다. 사생활에서도, 공인으로서도 계산과 실리에 밝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잔혹한 성정이 세계 경제를 이끈 동력이라는 역설. 오늘의 이야기가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그레샴의 메뚜기 소리는 잉글랜드 전역에 울렸습니다. 잉글랜드 섬유를 네덜란드에 수출하고, 그곳의 곡물을 수입해 부를 쌓으면서였습니다. 형 리처드와 동생 존은 이 부를 기반으로 런던 시장까지 올랐습니다. 잉글랜드에서 의류 무역을 담당하는 상인을 ‘머서’(Mercer)라고 불렀는데, 그 최고봉에 있던 사람이 바로 리처드와 존 형제였습니다.
낮에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이론을 배우고, 저녁에는 무역 회사에서 실무를 학습하는 일. 경제란 그의 핏속에서 흐르는 것이었고, 뼈에 각인된 것이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24세부터는 그는 본격적으로 패밀리 비즈니스에 뛰어듭니다.
잉글랜드는 엄청난 혼란기였습니다. 국왕 헨리 8세가 교황이 자신의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라 전체의 국교를 바꾸고자 했기 때문입니다(히코노미 11화 참조). 천년을 믿어 온 가톨릭을 억압하고, 개신교인 성공회를 새로운 국교로 바꾸는 대혼란. 헨리 8세는 가톨릭 교육의 산실이던 수도원까지 해체해 버립니다.
토마스 그레샴. 그의 나이 어느덧 24살이었습니다. 앤트워프와 런던을 왔다 갔다 하는 바쁜 삶. 아버지와 삼촌은 그에게 결혼을 권합니다. 애가 둘 딸린 과부 앤 퍼넬리였습니다. 남 부러운 것 없는 집안에서 훤칠한 아들을 과부에게 장가보내려고 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앤 퍼넬리의 전 남편이 런던에서 알아주는 상인 윌리엄 리드였기 때문입니다.
윌리엄이 이른 나이에 사망하자, 재빠르게 앤과 결혼을 추진합니다. 그녀의 재산을 그레샴 가문의 사업 자금으로 활용한다는 계산이었습니다. 그레샴 가문에겐 결혼도 비즈니스의 일환이었기 때문입니다.
헨리 8세에게 매일같이 국가 재정 위기 보고서가 올라오는 나날. 그가 묘안을 떠올립니다. 화폐를 생산할 때 들어가는 은의 양을 줄이라는 것. 싸구려 금속을 섞어서 더 많은 은화를 생산해 왕실 빚을 갚자는 획기적인 ‘제안’(화폐주조차익·시뇨리지)이었습니다. 자신의 사치적 행위를 그만둘 생각이 없어서였습니다.
꼼수의 유효기간은 짧습니다. 악화를 만든 대가를 치를 시간이 찾아옵니다. 앤트워프 상인들이 누구입니까. 유럽 경제를 주무르는 대가들입니다. 잉글랜드 1파운드 은화의 실질 가치가 예전 1파운드와 같지 않다는 걸 재빠르게 눈치채고 있었습니다.
앤트워프 상인은 잉글랜드 화폐를 거부합니다. 그 돈의 가치가 ‘쓰레기’라는 걸 알고 있어서였습니다. 잉글랜드 화폐 ‘대타락’(The great debasement)이라고 부르는 사건이었습니다.
헨리 8세가 죽었습니다. 막대한 빚을 남기고서였습니다. 그의 어린 아들 에드워드 6세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무엇보다 재정 문제가 제1 해결과제였습니다. 그가 처음 찾은 건 토마스 그레샴이었습니다. 런던과 앤트워프를 연결하는 ‘민간 외교관’이었기 때문입니다.
앤트워프에 도착한 그레샴은 밤낮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잉글랜드의 화폐가 다시 옛 위상을 찾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습니다. 잉글랜드 정부가 얼마나 노력하는지를 상인에게, 또 은행가에게 설명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왕실 재정의 상황을 흉금을 열고 고백합니다. 지금의 높은 이자를 줄여달라는 부탁도 청했습니다. 그레샴의 노력이 통했는지 파운드화에 대한 가치가 조금씩 부활합니다.
에드워드 6세가 즉위한 지 9개월 만에 나랏빚이 절반으로 줄어듭니다. ‘메뚜기’ 그레샴이 이리저리 뛰어다닌 덕분이었습니다. 1552년 토마스 그레샴에게 기사 작위가 내려진 배경이었습니다.
1553년 잉글랜드는 다시 대혼란입니다. 에드워드 6세가 15살의 나이로 요절하면서 누나 메리 1세가 임금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메리 1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 헨리 8세가 만들어놓고 에드워드 6세가 지키려 했던 개신교의 잉글랜드를 다시 뒤흔듭니다.
그녀의 별명은 ‘피의 메리’(Bloody Mary). 에드워드 6세의 애정을 받은 ‘개신교도’ 토마스 그레샴의 자리도 온전치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그가 실각한 배경입니다.
잉글랜드의 부름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시 네덜란드로 건너가 메리 여왕에게 필요한 급전을 낮은 이자로 빌려왔습니다. 필요하면 자신의 신용도 함께 걸었습니다. 화약·무기 등의 수입을 주도한 것도 토마스였습니다. 유럽에서 전운이 고조되는 걸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잉글랜드가 메리 1세 통치 시기 종교 분쟁으로 정치적 대혼란 속에서도 국가 신용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건 그레샴이라는 경제인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음 여왕은 그 유명한 엘리자베스 1세. 그레샴의 자리는 여전히 보장돼 있었습니다. 세 명의 군주는 모두 성향이 달랐지만 그레샴을 향한 믿음만큼은 같았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그에게 전폭적인 권한을 부여합니다. 그레샴은 믿음을 기반으로 대대적 화폐개혁을 단행합니다.
나쁜 돈과 동의어가 되어버린 파운드화를 다시 좋은 돈으로 돌려놓자는 고언이었습니다.화폐의 질이 국가의 신뢰를 결정한다는 걸 알아서였습니다. 대규모 화폐 교체 작업이 수반됩니다. 잉글랜드가 다시 부국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왕립거래소는 훗날 주식이 거래되는 런던증권거래소의 모태가 됩니다. 세계금융 중심지의 초기 모델에 그레샴의 흔적이 남았다는 의미입니다. 잉글랜드를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만든 숨은 조력자로 그레샴이 빠지지 않는 이유기도 합니다.
1579년 그레샴은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아내 앤 퍼넬리와 아들 하나를 뒀지만, 그의 유일한 적자는 17살이 되던 해 세상을 떴습니다. 남은 자식은 앤 퍼넬리가 전 남편 사이에서 낳은 두 아들과 사생아 딸 하나뿐. 그는 자신의 재산 대부분을 대학 설립에 사용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습니다.
아내 앤 퍼넬리가 자신과 두 아들을 위한 유산을 되찾기 위해 소송을 건 배경이었습니다. 토마스 그레샴은 공적으로는 애국자였지만, 가정에서만큼은 죽어서까지 폭군으로 남았습니다.
국가적 석학들이 대중의 언어로 지식을 전달합니다. 세인트 폴 성당을 지은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도, ‘세포’(Cell)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물리학자 로버트 훅도 바로 이곳에서 강의한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레샴 컬리지를 과학혁명의 요람이라고 부르는 이유였습니다.
런던 왕립거래소를 비롯해 도시 곳곳에는 그레샴 가문의 상징인 황금메뚜기가 놓여 있습니다. 잔혹한 남편이었고, 제국을 만든 위대한 경제인이었으며, 무엇보다 뜨거운 애국자였던 한 남자. 런던을 넘어 대영제국의 초석을 다졌던 사내. 토마스 그레샴이었습니다.
ㅇ‘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샴의 법칙은 16세기 상인 토마스 그레샴에서 따왔다.
ㅇ토마스 그레샴은 잉글랜드 군주들이 은화 화폐에 은함량을 줄이는 일이 국제적 타격이 된다는 걸 잘 알았다.
ㅇ세계적 상거래 장소인 네덜란드 앤트워프에 직접 찾아가 잉글랜드 정부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열심히 뛰기도 하고, 잉글랜드에서는 다시 제대로 된 화폐를 만들 것을 주문했다.
ㅇ국제 무역에서 신뢰를 되찾은 잉글랜드는 다시 충만한 재정으로 부국의 길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레샴이 ‘글로벌 금융의 첫 번째 마법사’로 불리는 이유였다.
<참고문헌>
ㅇ존 가이, 그레샴의 법칙:엘리자베스 1세 시대 한 은행가의 삶과 세계, 프로파일북스,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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