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 술도가’ 해창주조장 정원 매화 ‘활짝’/스카이워크·해상케이블카 오르면 ‘명량해전’ 울돌목 회오리 물결 ‘아찔’/대형 어린왕자 만나는 산이정원 해남여행 ‘핫플’
해창주조장 정원 매화.
어느새 이리 폈을까. 모질게 춥던 겨울 잘 버틴 나무 가지마다 엄지손톱만큼 작고 하얀 꽃 나른한 기지개 켜며 나 좀 봐달라고 수줍게 미소 짓는다. 백년 가까이 술도가 마당을 한결같이 지킨 매화나무 한 그루. 누룩 익어가는 술 내음마저 뚫고 나오는 향기에 순간 정신이 어찔하다. 반도의 봄이 가장 먼저 시작되는 땅끝 마을 해남. 봄님 오신다기에 종종걸음으로 나섰다 그만 매화향에 흠뻑 취했다.
세계일보 여행면. 편집=김창환 기자
세계일보 여행면. 편집=김창환 기자
◆봄은 땅끝 마을 매화로 온다
전남 해남군 화산면 해창주조장으로 들어서자 구수한 효모향이 마당에 눅진하게 깔려 있다. 오랜 세월을 지닌 살림집 안뜰에는 이리저리 휘어지며 자란 배롱나무 고목이 늘어뜨린 가지 하나가 작은 연못에 닿을 듯하다. 여름에는 자홍색 꽃이 백일 동안 피고 지겠지. 배롱나무 뒤로 매화향이 흥건하다. 3월 절반이 지나도록 남도 매화 축제에 꽃이 없어 애를 태우게 하더니 이제야 느긋한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연두와 노랑은 봄의 색깔. 하얀 꽃, 연두 꽃받침, 노랑 꽃수술 어우러지며 봄 이미지를 완성하니 매화야말로 봄의 전령사다. 가지 사이 얼굴 파묻고 숨을 깊게 들이 마시자 아름다운 향기 폐 속 깊숙하게 파고들어 겨울 찌꺼기 몰아내고 봄으로 가득 채운다.
해창조주장 정원.
해창조주장 정원 매화.
해창막걸리는 우리나라 막걸리의 으뜸을 다툰다. 알코올 도수 5% 안팎인 기존 막걸리에서 벗어나 9%, 12%, 15%를 선보였고 무려 18% 막걸리도 있는데 소비자가 10만원을 훌쩍 넘는다. 비싼 이유가 있다. 보통 고급 막걸리는 덧술을 많이 하는데 해창막걸리 18%는 무려 아홉 차례 덧술하는 ‘구양주’로 만들고 6개월 동안 발효와 숙성을 거친다. 오랜 기간 숙성하다 보니 조금만 방심하면 식초가 돼 버리기 때문에 세심하게 양조해야 한다. 주조장 관계자는 “18% 제품은 물을 섞지 않은 원액이라 냉장 보관을 잘하면 1년도 끄떡없이 보존된다”고 설명한다. 원액이라 요거트처럼 걸쭉한 막걸리를 작은 잔에 따라 한 모금 마시자 눈동자가 커진다. 아주 꿀맛이다. 감미료를 전혀 넣지 않고 찹쌀로만 단맛을 냈는데 산도가 잘 뒷받침돼 질리지 않고 술술 넘어간다. 다만 송명섭 막걸리처럼 드라이한 맛을 좋아한다면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다.
해창막걸리.
해창주조장 건물은 일본 군마천에서 태어나 해남에 정착한 뒤 광주와 목포에서 정미소를 운영하던 일본인 시바다 히코헤이가 일제강점기에 지은 미곡창고였다. 그의 살림집은 원래 다다미방, 실내복도, 가파른 나무 계단이 있는 2층 목조 건물이었다. 집을 개조하면서 장작을 때는 부엌과 다다미방 등은 없어졌지만 건물 외형과 당시 조성한 정원은 그대로 보존돼 있다. 해창주조장은 1927년부터 해방 전까지 청주를, 해방 이후 탁주를 각각 만들고 있는데 4대째 이어지고 있다.
울돌목 스카이워크.
◆명량해상케이블 타고 울돌목 아찔하게 즐겨볼까
해남은 세계 해전사에 길이 빛나는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 무대다. 판옥선 13척으로 왜군 전함 133척을 격파한 곳이 바로 해남과 진도 사이 너비 294m 좁은 물길, 초속 약 6m의 조수가 흐르는 ‘울돌목’이다. 마치 건장한 사내가 울음을 토해내고 고함을 지르는 것처럼 들리고 물이 회오리치듯 돌아나가 울돌목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순신 장군은 울돌목을 지나 서해로 북상하려던 왜군을 무찔러 정유재란 전세를 역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울돌목 스카이워크에 오르자 바닷속 바위에 부딪친 바닷물이 솟아오르며 회오리치는 모습에 간담이 서늘하다. 스카이워크는 강강술래를 하듯 거센 물살 위를 회전하면서 걷도록 설계해 더 아찔하다. 스카이워크 입구에선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의 주력 함대이던 판옥선 모형도 만난다.
명량해상케이블카와 진도대교.
고뇌하는 이순신 장군상.
스카이워크에서 해안을 따라 명량대첩기념공원 산책로가 연결된다. 바위에는 명량대첩을 앞두고 고뇌하는 이순신 장군이 서 있다. 밀물 때면 발목까지 바닷물이 차오도록 설계해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표현한 점이 눈에 띈다. 맞은편 진도타워를 연결하는 해상케이블카를 타면 울돌목을 더 아찔하게 즐길 수 있다. 바닥을 강화유리로 설계한 케이블카가 고도를 높여 첫 번째 주탑을 지나자 회오리치는 물살이 또렷했다.
산이정원 가든뮤지엄.
산이정원 이영섭 작가 작품.
◆어린왕자 만나는 산이정원 가보셨나요
지난해 5월 문을 연 산이정원은 요즘 해남여행 핫플레이스로 입소문이 났다. 유명 작가들의 조각 작품이 어우러지는 예쁜 정원으로 꾸민 덕분이다. 산이정원은 간척지에 만들었는데 작은 섬 달도, 독도, 송도, 중도는 산이 되고 바다는 땅으로 바뀌어 정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시야가 탁 트이는 넓은 호수 너머로 복합문화공간 가든 뮤지엄이 아름답게 서 있다. 주변의 부드러운 산세처럼 물이 흐르는 듯한 곡선으로 꾸민 디자인이 돋보이며 마치 그랜드피아노를 닮은 것 같다. 산책로 스피커에는 아이들 재잘거리는 소리를 섞은 음악이 잔잔하게 흐른다.
산이정원 이영섭 작가 ‘어린왕자’
산이정원 이재효 작가 ‘0121-1110=116501’
바닷물을 그대로 가둬서 신비한 초록색을 띠는 호숫가에는 긴 머플러를 휘날리는 대형 어린왕자 조각상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영섭 작가 작품으로 그는 ‘발굴조각’이란 독특한 기법을 사용한다. 흙 마당에 유리원석 등 재료를 묻은 뒤 굳으면 이를 캐내는데 모던하면서도 오랜 세월 풍화된 것 같은 흔적이 표면에 남는다. 호수 맞은편 긴 의자 두 개도 그의 작품이다. 어린왕자가 소행성 의자에 앉아 노을을 보는 장면에서 착안했다. 어린왕자 오른쪽 작품은 이재효 작가의 ‘0121-1110=116501’. 그는 주로 나무로 다양한 공 모양 작품을 선보인다. 산이정원 작품은 동그란 철판들이 모여 커다란 공을 완성하는데 심오한 우주를 표현한 듯하다. 맞은편 언덕은 지역 주민과 어린이들이 탄소저감 수종 2050주를 심은 약속의 정원으로 작은 결혼식을 올리는 공간이다. ‘봄에 피는 단풍’ 홍가시나무가 붉은 잎을 드러내 봄소식을 전한다.
산이정원 약속의 정원.
산이정원 하늘마루 유영호 작가 ‘브리지 오브 휴먼’
산이정원 하늘마루 유영호 작가 ‘브리지 오브 휴먼’
가든뮤지엄 오른쪽 언덕 하늘마루에 오르면 거대한 조각 작품이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는다. 유영호 작가의 ‘브리지 오브 휴먼(Bridge of Human)’으로 몸을 숙이고 두 팔을 곧게 펴 스스로 다리가 된 거인을 형상했다. 거인 팔 위로 다양한 인종과 다양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서 있다. 지구와 환경, 인간과 자연, 모든 생명을 포용하며 우주를 향해 활짝 열린 인간을 표현했다. 후박나무 군락지를 보존한 나비의 숲에는 청띠제비나비가 산다. 이곳은 치유와 명상의 시간을 갖는 공간. 대나무 중 가장 큰 맹종죽으로 오솔길을 꾸민 소리의 정원을 거쳐 생명의 나무 언덕으로 오르는 길은 애기동백이 수줍게 인사한다. 바닥에 붉은색 꽃잎이 떨어져 꽃길을 걷는 기분이다. 야트막한 언덕에는 커다란 동백나무 한 그루가 자리한다. 나이는 무려 200살. 산이면 밭을 가꾸던 농부가 작업할 때 트랙터에 자꾸 부딪혀 상처나는 게 안쓰럽다며 기증한 나무로 산이정원에서 새 생명을 얻었다.
산이정원 소리정원 맹종죽숲.
산이정원 애기동백.
이런 아름다운 공간을 설계한 이는 이병철 산이정원 원장. 그는 경기 가평 아침고요수목원을 설계한 인물로 30년 동안 가평을 지키다 몇 해 전 해남으로 옮겨 산이정원을 조성했다. 해남군은 산이면에 미래정원도시 ‘솔라시도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태양(Solar)과 바다(Sea)가 어우러진 곳이라는 뜻을 담아 ‘솔라시도’로 이름 지었고 모두 9개 정원이 들어선다. 국내 최초 태양광발전소 내에 조성한 태양의 정원에 이어 산이정원이 문을 열었고 야생조류 서식지를 보존하는 바람의 정원, 가로수로 도시 숲을 조성하는 길정원, 해남 꽃축제가 열릴 대지의 정원, 도시로 유입되는 오염수를 정화하는 달빛정원, 주민 건강을 위한 생계밀착형 별빛정원, 휴양과 치유를 위한 하늘정원, 근린형 수변공간 물의정원이 들어설 예정이다. 보성그룹이 현재까지 약 500억원을 투자한 산이정원은 전체 부지 약 16만평(52만3082㎡) 중 1단계로 5만평을 지난해 개장했고 올해 말까지 나머지 공간도 공개된다.
산이정원 이백살 동백나무.
4성급 해남126호텔.
해남126호텔 인피니티풀 저녁 노을.
지방을 여행하다 보면 숙소가 마땅치 않은 경우가 많다. 해남도 비슷했는데 지난해 11월 오시아노관광단지에 처음으로 4성급 해남 126호텔이 문을 열면서 숨통이 트였다. 호텔로 들어서자 고산 윤선도의 고택인 해남 녹우당 건축양식을 모던하게 재해석한 깔끔한 외관이 눈에 띈다. 250명을 수용하는 연회장, 카페, 레스토랑 등을 갖췄다. 120개 객실이 모두 바다를 조망하도록 지어져 코앞의 작은 섬들과 멀리 신안군의 섬들이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풍경이 장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