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남긴 타임 캡슐… ‘다섯 번째 애인’의 비밀

김동식 소설가 2025. 3. 22. 00:4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주말]
[김동식의 기이한 이야기]
유언에 얽힌 마법의 약속
그래픽=한상엽

아버지는 현명한 사람이었다. 무역 회사에서 근무하며 내가 알기로만 3개 국어를 구사했던 분, 지금처럼 해외여행이 흔치 않은 시절이었기에 아버지의 출장은 늘 기대감을 부풀게 했다. 돌아올 때마다 신기한 뭔가를 꼭 사 오셨기 때문이다. 러시아 마트료시카 인형이나 일본 다루마 인형, 이탈리아 베네치아 마스크 같은.

그러던 어느 날, 아프리카 출장길에 아버지가 타조알 모양의 나무 알을 가져왔다. 전에 본 적 없는 신비한 문양의 알록달록한 알이었는데, 아버지는 그걸 타임캡슐처럼 땅에 묻는 거라고 했다.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날 거라고. 실제로 얼마 뒤, 아버지는 할아버지 묘가 있는 산으로 가 그 알을 묻었다. 내가 10년 뒤에 파낼 거냐고 물었더니, 아버지는 나를 붙잡고 진지한 얼굴로 신신당부했다.

“이 알은 먼 훗날에 아빠가 여는 게 아니란다. 그렇다고 네가 여는 것도 아니지. 정확히 너의 다섯 번째 남자 친구가 이 타임캡슐을 열게 하거라. 그래야 마법이 펼쳐진단다. 어마어마한 마법이.”

다섯 번째 남자 친구? 이해할 수 없는 희한한 말이었지만, 아버지는 절대 허튼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혹시 내가 다섯 번째 남자 친구를 만나게 되는 날이 오면 그때 아버지와 함께 와서 열어보겠다고. 하지만 아버지는 함께할 수 없게 됐다. 내가 스무 살이 채 되기도 전에 돌아가셨으니까.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살던 집도 넘어가고 도시 외곽의 월세방을 전전하는 처지로. 이사를 하며 많은 걸 버렸지만, 아버지와의 추억이 깃든 물건만은 절대 그럴 수 없었다. 마트료시카, 다루마 인형, 베네치아 마스크…. 아버지와 함께 묻은 ‘나무 알’도 당연히 잊지 않았다. 너무 그리워 당장 파내 오고 싶기도 했지만, 아버지와의 약속을 꼭 지켜야겠다는 사명감까지 들었다. 게다가 아버지는 이 알이 열리면 어마어마한 마법이 펼쳐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분명 뭔가가 있을 터였다.

내 첫 연애는 대학 입학 직후였다. 무의식중에 아버지 같은 사람을 좇다가 만난 그 선배는 나와 무척 잘 맞았다. 주변에서 잘 어울린다는 말을 자주 들었고, 한 친구는 졸업하자마자 우리가 결혼할 줄 알았다고도 했다. 남자 친구는 졸업하자마자 안정적인 공기업에 취업했고, 1년 뒤 졸업할 나를 기다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1년이 내게는 인생의 갈림길이었다. 직장 때문에 부산으로 내려가게 된 남자 친구는 은근히 함께 부산으로 가주기를 바랐다. 그랬다면 높은 확률로 그와 결혼했을 것이다. 오래 만나기도 했고, 서로 큰 불만이 없었으니까. 부산으로 내려갈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 끝에 나는 서울에 취직했고, 몇 달 안 가 자연스럽게 그와 헤어지게 됐다.

왜 그랬을까? 당연히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겠지만, ‘나무 알’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첫 번째 남자 친구와 결혼해 버리면 알을 열어볼 수 없게 되지 않는가. 이후 두 번째, 세 번째 남자 친구와도 헤어지면서 확신하게 됐다. 나는 아버지와 약속한 알 때문에라도 다섯 사람은 만나겠구나. 그리하여 얼마 전, 서른셋의 나이에 드디어 다섯 번째 남자 친구를 만들었다.

뜨겁게 불타기에도 모자랄 시기였지만, 나는 뜬금없는 부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함께 산에 올라가 타임캡슐을 좀 파줄 수 있겠느냐고. 그는 선선히 수락했다. 군대에서 삽질을 많이 해 자신 있다는 말이 고마웠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 장소를 찾았고, 그는 열심히 땅을 파주었으며, 금세 나무 알을 찾아 꺼냈다. 손바닥에 올린 알을 본 순간 심장이 울렁거렸다. 그리움에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하고, 설렘에 흥분되기도 했다. 아버지가 아프리카에서 가져온 신비한 나무 알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약속대로 다섯 번째 남자 친구가 직접 나무 알을 개봉했다. 안에서 나온 것은 비닐에 싸인 봉투였다. 그것까지도 그가 풀어냈는데,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한 그는 곧 내게 종이를 건넸다. 아버지의 손 편지였다. “드디어 이 알을 열었구나. 그건 네가 적어도 다섯 명의 남자를 만나 봤다는 소리겠지? 김빠지는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아빠는 네가 최대한 많은 남자를 만나보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일을 꾸몄단다. 살면서 여러 사람을 만나 봐야 해. 그래야 제대로 된 남자 보는 눈이 길러진단다. 아무것도 모를 때 덜컥 붙잡혀서 불행하게 사는 여자들을 아빠는 너무나 많이 보았어. 우리 딸이 너무 순둥이라 아빠는 불안하네.”

놀라웠다. 실제로 아버지의 의도대로 되지 않았던가? 첫 번째 남자 친구와 어린 나이에 결혼할 뻔했지만, 이 알을 열어보고 싶어서 헤어졌으니 말이다. 내 친구 중에도 남자 잘못 만나서 고생하는 애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난 아버지의 현명함 덕에 남자를 잘 만나게 된 거다. 물론, 현명한 아버지도 생각하지 못했을 부작용이 있었지만. “다 확인했으니까 이제 갈까? 자기 남편 퇴근하기 전에 얼른 가야지.”

네 번째 남자와의 결혼 생활 도중 이 남자를 만나게 됐다. 유부녀로서 당연히 거절해야 했지만, 자꾸만 아버지 생각이 났다. 꼭 다섯 번째 애인이 필요한데….

※픽션입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