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익 900점'도 서류 탈락…'취업 깡패'라더니 이제는 '한숨' [이슈+]

유지희 2025. 3. 21.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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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깡패' 옛말…간호학과 취업률 올해 34%
간호학과 '불 취업' 넘어 '용암 취업' 신조어 나와
'의사파업' 여파 신규 간호사 채용 줄줄이 연기·축소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학점 4점대 토익 800~900점 사이의 친구들도 대학병원 서류 탈락이었어요. 작년만 해도 이 정도면 붙었는데 장벽이 높아진 듯 합니다."

올해 수도권 4년제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국가고시에 합격한 최모 씨(25)는 이력서를 제출할 병원 자체가 줄어든 데다, 상향된 경쟁 기준 앞에서 속수무책이 됐다고 토로했다.

최 씨는 "취업이 어려우니 간호학과 국시 합격생들 사이에서도 피해는 고스란히 간호사 몫이 됐다는 생각에 의정 갈등에 대한 여론이 안 좋다. 일단 알바하면서 버티는 중"이라며 "원래는 4학년 2학기부터 병원 면접을 보고 국가고시 전에 취업이 확정되는 게 일반적인데 이번에는 국가고시 이후에도 취업이 안 됐다"고 전했다.

그는 "의사들이 파업하면서 병원 내부 인력 구조가 바뀌었고, 병원 입장에선 간호사를 새로 뽑을 필요가 없어졌다고 느끼는 것 같다"며 "기존 인력에 적응된 상태라, 의사들이 돌아와도 자리가 예전만큼 나지 않을 것"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올해 졸업 간호학과 취업률은 34%…전년比 절반 이상 줄어

올해 국시에 합격한 최 씨의 시험결과 사진/출처=최 모씨


전공의 집단 사직 사태로 상급종합병원의 신규 간호사 채용이 줄줄이 연기·축소되면서 최근 간호학과 졸업생들 사이에서 이런 푸념이 이어지고 있다.

한때 '취업 깡패'로 불리던 간호학과가 이제는 취업난의 중심에 섰다. 특히 올해 졸업생들은 높은 성적에도 불구하고 서류 전형에서 탈락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보건복지부와 한국간호대학장협의회가 19개 간호대학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올해 졸업 간호학과생의 취업률은 34%에 불과했다. 이는 지난해 79.1%, 2023년 81.9%와 비교해 절반 이상이 줄어든 수치다.

졸업생 1707명 중 578명만이 취업에 성공했으며, 국가고시 합격률도 최근 5년 중 최저치로 떨어졌다. 그야말로 사상 최악의 '간호 취업 한파'다.

경기권 4년제 간호학과 졸업생 김 모씨(24)는 "이번엔 공고조차 뜨지 않은 종합병원이 수두룩하고, 대부분 병원이 상반기 공고 하나 내고 끝났다"며 "원래 자대 병원으로 가는 비율이 20~30%였는데, 올해는 55% 가까이가 자대에서 끝났다. 다른 병원 갈 자리는 거의 없었다"고 토로했다.

그는 이어 "작년까진 학점 3.7, 토익 850 정도면 웬만한 종합병원은 서류 합격했는데, 올해는 취업 스펙이 전년 대비 확 올라 4점대에 900점 가까이 돼야 겨우 통과할까 말까"라며 "재학 중에 생긴 의정 갈등은 금세 사그라들겠지 싶어 반발이 크진 않았으나 취업 시기가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끝나지 않아 반발이 심했던 것으로 기억된다"고 덧붙였다.

졸업 후 거주지 인근 대학병원에 지원했지만, 서류에서 탈락한 안 모씨(26)는 "학점이 낮은 편도 아닌데, 이전 학번의 더 낮은 학점 선배들은 붙었던 병원에서 이번엔 서류조차 떨어졌다"며 "간호사만 되면 취업은 쉽다는 건 이제 옛말"이라고 토로했다.

그는 "또한 간호사 국가고시 합격률이 5년간 최하로 하락했는데, 이는 국가에서 간호대학 정원을 증가시켰던 것과 의정 갈등이 겹치게 되어 병원이 수용할 수 없이 많은 수의 간호사가 배출될 것을 예상해 시험문제를 어렵게 냈다는 의견도 나오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실제 일부 졸업생들은 '불 취업'을 넘어 '용암 취업'이라는 신조어를 쓸 만큼 현실을 체감 중이다. 일부 졸업생들은 아예 간호사를 포기하고 다른 길을 모색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올해 졸업한 김 모 씨는 "공고 자체가 줄어서 메이저 병원 갈 성적의 애들이 종합병원으로 몰리면서 전반적인 취업률이 떨어졌다. 친구 중 30%는 아직도 취업 못 했다"며 "병원 취업을 포기하고 간호직 공무원 준비를 하거나 워킹홀리데이를 고민하는 애들도 있고 아예 간호계를 접고 다른 진로를 찾는 경우도 늘고 있다"고 전했다.

◆의정 갈등→전공의 이탈→간호사 채용 위축…취업 절벽의 원인

사진=연합뉴스

이번 간호사 취업난의 본질은 의료계 전반을 뒤흔든 의정 갈등에서 비롯된 것으로 풀이된다

2024년 초 정부가 의대 정원을 2025학년도부터 2000명 늘리겠다고 발표하자 전공의와 의사단체는 집단 사직과 휴진으로 맞섰다. 이에 따라 상급종합병원에서는 수술과 입원 수요가 감소했고, 병원들은 경영 악화와 인력 공백을 이유로 간호사 채용을 줄이거나 연기했다.

복지부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2023년 상급종합병원 44곳에서 채용된 간호사는 총 8906명(중복 합격 포함)이었으나, 2024년에는 21곳에서 2902명만 채용했다. 실제 발령 인원은 2992명으로 33.6%에 불과했다.

서울 대형 상급종합병원 간호사 정 모 씨는 "올해 신규를 채용했지만, 작년보다 확실히 채용 인원이 줄었다"며 "3~4년 전 대거 채용한 이후 채용 인원이 약간씩 줄긴 했으나 이번에 의료 파업 여파로 신규 채용 인원도 줄고 스펙도 초 상향 됐다"고 말했다.

서울 소재 종합병원 계약직 간호사 모집 공고


최근 각 진료과 전담간호사(PA) 채용 공고가 다수 게시되고 있다. 이를 두고 의료계에서는 '전공의 빈자리를 간호사로 메우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전담간호사는 병원 임상 경력이 풍부한 간호사가 맡는 것이 일반적이다.

서울의 한 종합병원 간호사 박 모 씨는 "작년에 대형 병원들이 채용을 미루면서 여기로 지원자가 몰렸다. 의료 파업 여파로 환자가 줄어 경영난을 겪는 상황에 PA 간호사를 채용을 늘리는 건 전공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목적일 수밖에 없다"며 "이번에 PA 서류를 열어봤더니 완전 신규 간호사들이 대거 지원해서 교수들이 한숨을 쉬었다더라"고 말했다

◆'동기간 면접제' 실효성 의문…정부 "간호대 정원 조정 검토"

정부는 간호사들이 여러 병원에 중복으로 합격하면서 일부 병원에 인력 공백이 발생하는 문제를 막기 위해, 올해부터 '동기간 면접제'를 도입하기로 했다. 서울 주요 상급병원들의 채용 면접을 같은 시기에 진행하고, 결과도 동시에 발표해 중복 합격을 최소화하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업계에선 채용 규모가 줄고 발령이 미뤄지는 상황에서, 정부가 추진하는 '동기간 면접제'는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로 일부 주요 병원은 여전히 채용 일정을 '검토 중'이거나 '미정' 상태로 남겨두고 있다.

정부는 지난해 간호대 정원을 전년 대비 1000명 늘려 총 2만4883명으로 확대했다. 그러나 얼어붙은 채용 시장 속에 다시 정원 조정을 검토하고 있다.

복지부는 최근 "현 상황을 고려해 간호대 정원 조정도 검토 중"이라며 2026학년도부터는 입학 정원을 일시적으로 줄일 가능성도 시사했다.

실제로 간호대학 4학년의 휴학생 비율도 증가세다. 19개 대학 중 8곳은 "2023년 2학기 기준, 4학년 휴학생 비율이 예년보다 늘었다"고 응답했다.

유지희 한경닷컴 기자 keeph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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