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힙합은 왜 사회에 침묵할까? [콘텐츠의 순간들]
정치적 이슈가 터질 때면 종종 한국 래퍼들에게 화살이 쏟아진다. ‘왜 침묵하는가?’ 좀 더 적나라하게 써볼까. ‘평소엔 센 척 다하면서 왜 저항하고 비판해야 할 땐 가만히 있는가?’ 이 같은 대중의 비난 혹은 강요는 〈쇼미더머니〉를 계기로 힙합이 한국에서도 주류 장르가 되며 더욱 심해졌다. 방송을 통해 힙합 문화와 특성이 왜곡 전파되고 일부 유명 래퍼들이 사회적 약자를 혐오하는 내용의 가사로 논란을 불러일으킨 점도 빌미가 됐다. 대중은 ‘원래 힙합은 저항 음악’이라며 아티스트의 방관을 꼬집고, 아티스트는 ‘원래 힙합은 파티 음악’이었다며 항변한다. 이렇듯 대중과 아티스트 사이엔 도저히 허물 수 없는 두껍고 높은 벽이 세워졌다.
양쪽 모두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우선 힙합은 파티장에서 탄생했다. 1980년대 초중반에 나온 초기 힙합 음악도 대부분 파티를 위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동시에 힙합은 저항 정신에 기반을 두고 성장했다. 198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흑인에 대한 차별과 억압에 맞선 곡이 쏟아지며 주류 음악계는 물론 미국 사회에서 큰 파급력을 갖게 되었다. 힙합은 그 어떤 장르보다 사회정치적 주제를 과감하게 다루고 변화를 촉구하는 음악이었다. 그러니까 파티에서 시작하긴 했으나 파티 음악으로서만 존재한 기간은 별로 길지 않았다. 오히려 근본은 저항 음악으로서 차지하는 비중이 더 컸으니 그저 탄생만으로 이 사안을 논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일부 래퍼와 힙합 팬은 서브 장르의 차이, 혹은 트렌드의 변화를 논한다. 사회비판적 주제를 다루는 랩이 유행하던 1990년대와 달리 오늘날엔 트랩이나 드릴 뮤직이 주류라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의 미국 래퍼들 역시 사회정치적 가사와는 거리가 멀다고 역설한다. 하지만 이는 오해다. 물론 1990년대보다 해당 주제를 다루는 빈도가 낮아진 건 사실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현대 힙합의 서브 장르 대부분은 가사보다 프로덕션을 기준으로 분류하는 경향이 짙다. 즉 트랩이나 드릴 래퍼라고 해서 사회정치적 가사와 거리가 멀어야 하는 건 아니란 소리다.
실제로 이 계열의 아티스트들은 상황에 따라 사회정치적 랩을 적극적으로 해왔다. 대표적으로 트랩 뮤직의 선구자라 불리는 티아이(T.I.)가 있다. 그는 2016년 경찰의 과잉 대응 총격에 의해 흑인이 사망하는 일이 반복되자 앨범을 만들어 인종차별과 공권력의 만행을 비판했다. 래칫 뮤직(트랩에서 파생된 주류 힙합 장르 중 하나)의 유행을 선도한 와이지(YG)는 2016년 대선 캠페인 당시 ‘FDT(Fuck Donald Trump)’라는 곡으로 도널드 트럼프의 인종차별 정책을 디스했다.
2010년대 이후 주류 힙합의 아이콘이라 일컬어지는 그룹 미고스(Migos)의 퀘이보(Quavo)는 과거 트럼프를 디스하고 버니 샌더스를 지지하는 구절을 녹음한 바 있다. 내용은 이랬다. “뛰어 뛰어, 난 도널드 트럼프와 함께하지 않을 거야, 난 버니를 느껴, 버니를 느낀다고, 버니 샌더스!”. 또 다른 힙합 아이콘 트래비스 스콧은 2020년 조지 플로이드 경찰 살해 사건 이후 다시 불붙은 흑인 생명 존중 운동(BLM)에 적극 동참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며, 가사로 인종차별적 폭력을 꼬집었다. 예나 지금이나 미국 힙합 아티스트 상당수가 사회·정치와 밀접한 행보를 보이는 중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한국 래퍼 대부분은 사회정치적 주제를 담는 데 소극적일까? 무엇보다 힙합을 탄생시킨 환경과 문화에서 차이가 크다. 가장 근본적 원인이지만, 많은 이가 간과하는 지점이다. 미국의 노예제도 시대나 1960년대 민권운동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다. 1970년대 아메리칸드림을 위해 몰려든 유색인종들의 집결지 사우스브롱크스가 힙합 문화의 발상지란 사실부터 힙합은 철저하게 인종적 토대 위에서 생겨나고 발전해왔다.
빈민가에서 살아본 적도 없으면서?
오랜 세월에 걸쳐 행해진 극심한 인종차별과 억압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으며, 흑인 사회의 일원인 래퍼 대부분은 이 같은 세상을 몸소 겪으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는 중이다. 당장 대통령인 트럼프부터 거리낌 없이 인종차별을 조장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렇다 보니 본인이 몸담은 사회상과 직간접 경험을 가사로 옮기는 래퍼들의 음악에 사회비판적 혹은 사회저항적 메시지가 투영되는 건 필연적 현상이었다.
다만 여기엔 환경 요건이 몇 개 수반된다. 인종차별, 슬럼가, 갱 문화 등이 그것이다. 이는 영국·독일·프랑스·남아공처럼 미국을 제외하고 유독 사회정치적 메시지가 강한 랩 음악이 존재했던 나라의 힙합 신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그러니까 랩·힙합이 사회정치적 음악의 대명사가 된 건 ‘힙합은 그래야만 해’ 같은 강력한 의지에 따른 결과가 아니다. 자신과 주변의 이야기, 그리고 실상을 담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결과다. 그래서 말하자면 힙합은 ‘사회정치적 음악’이라기보다 ‘삶을 이야기하는 음악’에 가깝다. 결국 사회·정치에 관한 담론과 저항적 메시지도 각자의 삶으로부터 비롯되는 것 아닌가.
하지만 한국 힙합은 사회적·계급적으로 전혀 다른 환경에서 이식되어 발전했다. 예컨대 부패한 정치와 빈부격차 같은 문제는 우리도 안고 있지만, 이를 ‘국민’이나 ‘서민’이란 범주 안에서 마주하는 것과, 한 번 더 들어가 인종차별 갈등 아래 겪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즉 애초에 문화나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기보다 단지 장르음악으로 시작한 한국 힙합은 태생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간혹 나왔던 사회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곡들은 대개 피상적인 내용에 그치거나 랩 가사로서의 미학이 거세된, 마치 공익 캠페인을 위한 음악처럼 다가왔다. 아무래도 당사자의 관점이라기보다 관찰자 관점에서 창작된 까닭일 것이다.
민감한 정치 이슈를 논하는 데에 매우 거북한 반응을 보이는 한국 사회의 특성도 무시할 수 없다. 힙합이 음악을 넘어 사회적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매개체로 사용되었을 때, 완성도와 주제에 관한 진중한 담론은 배제된 채 아티스트의 정치 성향을 물고 늘어지거나 단순한 찬반 논란만 가중되곤 한다.
게다가 꽤 많은 대중은 음악 하는 사람이 정치적 견해를 피력하는 모습 자체에 반감을 표한다. 이는 힙합을 좋아한다는 이들이 모인 커뮤니티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특히 2010년대를 기점으로 힙합의 상업성이 급부상하고 방송·공연·온라인 스트리밍 플랫폼 등을 통해 힙합이 대중화하면서 래퍼들의 눈치 보기는 더욱 심화되었다. 정치적 메시지나 사회비판적 요소를 담은 음악은 대중의 불호를 부르고 논란을 일으킬 수 있는 위험 요소로 작용한다. 방송이나 광고 등에서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은 가사가 노출되기 어려운 현실이기에 유명해진 래퍼일수록 그런 주제를 피하는 경향이 있다.
한편으론 래퍼들의 관심 주제가 변화한 현실도 고려해야 한다. 오늘날 세계의 많은 랩 스타들은 더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주제에 집중하고 있다. 세대가 바뀌면서 정치 문제에 대한 관심이 점차 개인사·사랑·갈등·성공·자아 표현 등으로 이동한 것이다. 미국 힙합 트렌드에 직접 영향을 받는 한국 래퍼들도 이러한 흐름을 적극 반영한다.
여러 복합 요인에도 불구하고 결코 짧지 않은 한국 힙합 역사에서 사회정치적 주제의 음악을 접하기 어렵다는 건 언제나 아쉽다. 그러한 곡 자체가 너무 없다 보니 메시지나 음악적으로 유의미한 성과를 남긴 사례를 논하기에도 애매하다. 이를 한국 힙합의 한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잘못이라 말할 순 없다.
그렇기에 ‘빈민가에서 살아본 적도 없고, 인종차별도 겪어보지 않았으면서 무슨 투쟁과 힙합을 논하는가?’라는 항간의 비난도 옳지 않다. 이건 세계 대중음악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현대의 힙합을 너무 편협한 시각으로 정의하는 행위다. 다만 아티스트와 장르 팬, 그리고 대중 모두가 한국 힙합의 태생적 한계와 환경의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우리나라 래퍼들은 사회정치적 힙합을 하지 않는가?’라는 논의는 바로 이 지점부터 출발해야 한다.
강일권 (음악평론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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