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한 출입국관리법 개정인가 [세상에 이런 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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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 불행을 안고 있다.' 톨스토이 소설 〈안나 까레니나〉의 첫 구절이다.
세상에 법이 존재하는 이유는 불행을 안고 있는 시민들이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지난 2월27일 출입국관리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시민단체들은 구금 기간을 최대 100일로 하고 법원이 구금 개시와 연장을 통제하도록 하는 출입국관리법 개정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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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 불행을 안고 있다.’ 톨스토이 소설 〈안나 까레니나〉의 첫 구절이다. 세상에 법이 존재하는 이유는 불행을 안고 있는 시민들이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그렇기에 법은 정교하게 만들어져야 한다. 안타까운 건 그 정교함이 ‘행복한 가정’을 위한 법에 더 집중되고 있다는 것이다.
여야 정치인 모두 상속세법 개정을 소리치고 있다. ‘상속세를 내기 위해 집을 팔고 떠나지 않아야 한다’ ‘30년간 상속세 대상자를 정하는 과표가 단 한 차례도 바뀌지 않았다’. 유산을 남겨주는 행복한 가정을 위한 법은 더 정교하게 다듬어질 것이다. 반면 체류할 권리조차 인정받지 못한 미등록 이주민을 위한 법은 정교하게 개정되지 못했다.
지난 2월27일 출입국관리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이주민이 기한을 넘겨 한국에 체류하는 이유는 제각각이다. 애초에 기한을 초과하겠다고 마음먹는 경우도 있지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기한을 넘기는 이주민도 있다. 임금 체불 피해 이주노동자가 그렇다. 고용허가제도를 통해 입국하는 이주노동자는 고용노동부가 독점하여 알선해주는 사업장에서 임금을 못 받아도, 떼인 임금을 받는 절차는 내국인과 별반 다르지 않다.
노동청 진정, 민사소송 등 지난한 과정을 거쳤음에도 사용자의 재산을 찾아내지 못해 빛바랜 판결문 종이 쪼가리를 들고 발을 동동 구르는 이주노동자들이 많다. 더 이상 연장해줄 근거가 없으니 출국하라는 출입국 공무원의 무심한 말에도 포기하지 않고 임금을 받기 위한 집행 절차를 밟으려면 결국 미등록 체류를 감수해야 한다.
2023년 7월께 경기도 포천에서 한 이주민이 도로 위에 질질 끌려다니며 폭행을 당하는 영상이 뉴스를 통해 공개되었다. 가해자는 10대 청소년 4명, 경찰 신고로 간신히 멈춰진 폭력 이후 가해 청소년 4명은 귀가했지만 피해 이주민만 구금되었다. 체류 기한을 위반한 미등록 이주민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헌법이 보장하는 피해자의 권리 따위는 이주민에게 장식품일 뿐, 이주민에게 최고법은 사실상 헌법이 아닌 출입국관리법이다.
진보 성향 의원마저 거수기 노릇
다행스럽게도 2023년 3월 헌법재판소는 출입국관리사무소가 기간의 제한도 없이 마구잡이로 구금하는 근거로 활용되는 출입국관리법에 대해 아무런 통제 절차 없이 미등록 이주민의 신체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2025년 5월31일까지 개정을 해야 하는 과제가 국회에 주어졌다. 시민단체들은 구금 기간을 최대 100일로 하고 법원이 구금 개시와 연장을 통제하도록 하는 출입국관리법 개정을 주장했다.
2월27일 통과된 출입국관리법은 구금 기간의 상한을 20개월로 정했지만, 재구금이 가능하도록 열어두었고, 통제 절차도 법원이 아닌 법무부 내부 ‘외국인보호위원회’에 맡겼다. 법무부가 지난해 10월 시민단체의 주장을 묵살하고 내놓은 개정안과 크게 다르지 않은 내용이다. 법무부 발의 4개월 만에 통과한 이 입법 과정은 정교하기는커녕 너무나 투박했지만, 진보라고 자처하는 의원들조차 거수기 노릇을 했다.
12·3 내란 사태로 일시적인 헌법 정지 상태를 경험한 우리는 법원의 영장 없는 구금의 공포에 휩싸였다. 법원의 영장 없는 무기한 구금에 놓여 있는 미등록 이주민에게 헌법 정지 상태는 일상적이다. 일시적인 헌법 정지 상태에 분노한 우리가 직시해야 할 건 미등록 이주민들의 일상적인 헌법 정지 상태가 아닐까? 뒤늦었지만 헌법불합치 결정에 부합하는 정교한 입법을 국회에 요구한다.
최정규 (변호사·<얼굴 없는 검사들> 저자)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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