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영의 정상에서 쓴 편지] 23 홍천 남산: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길

장보영 2025. 3. 21.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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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개만 넘으면…’ 당신을 살게 한 길은 어디입니까
홍천 남쪽 우뚝 솟은 ‘남산’ 주민 사랑
내달 27일 홍천 트레일런 대회 개최
정상 터미널·병원·은행 등 한눈에
동쪽 길 따라 하산 여우고개 눈길
고개 넘어 어머니 어린시절 보낸 마을
고단한 삶 속 그리운 길 누구나 있어
남산 정상에서 한눈에 바라보이는 홍천 전경. 

저는 요즘 세계가 하나의 게임판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를테면 시소 타기나 줄다리기, 체스나 바둑 경기 같달까요? 어느 한쪽이 유리하게 패를 몰아가는 것 같고 그쪽으로 승수가 완전하게 쏠려서 더는 이변이 없을 것 같은데 그럴 때마다 드라마 같은 반전이 잇따라 나머지 한쪽이 회생하는 상황의 반복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일이 좀 잘 돌아가는 듯싶어 마음을 놓으면 불과 다음 날도 채 안 돼서 상황이 반전되는 식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천국과 지옥을 오고 갑니다.

이는 자연스럽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짐짓 상투적인 교훈으로 이어집니다. 원하는 것을 다 가진 것 같고 이제야 인생의 대운이 터지는 것인가 흡족해도 어디선가 고통이라는 검은 그림자가 지켜보고 있다가 서서히 그늘을 드리웁니다. 파도처럼 부유하는 세상 속에서 붙잡고 버틸 수 있는 부표는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스스로 묵묵히 걸어온 길. 오직 그 길만이 혼란의 시대 가운데 붙들고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끈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걸어온 길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홍천 남산 정상. 마치 헬기장을 연상케 하듯 넓고 정상석 또한 사람 키만큼 크다.

이번 생에 증거로 남아 말없이 나를 지지해 주는 길에는 고향의 산도 있습니다. 3월 중순의 평화로운 주말 오후, 오랜만에 홍천으로 향합니다. 유년 시절 대부분을 인제에서 보냈기에 인제가 마음의 고향이라면 홍천은 제가 태어난 곳, 육신의 고향입니다. 홍천의 작은 산부인과에서 태어났고 줄곧 인제의 읍면을 전전하며 살다가 다시 홍천으로 돌아온 것은 고등학생이 되던 해였습니다. 홍천으로 일종의 유학을 왔는데 정신이 자라던 시절이었기에 홍천에서 보낸 3년은 폭풍의 한철로 기억합니다.

시간을 거꾸로 되돌릴 수 있다고 해도 어쩐지 돌아가지 않을 것만 같은 시절. 홍천버스터미널에서 홍천교를 지나 남산 아래로 내려가면서 저는 새삼 저 자신에게 질문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나온 시간 중 가장 힘들었던 때를 돌이켜보면 그때가 아니었을까. 미래는 너무 막연하고 목표는 늘 닿을 수 없는 먼 곳에 있음에도 할 수 있다고 희망 고문하며 쳇바퀴 돌 듯 하루하루를 견디고 버텼던 그때. 이렇게 산에 가듯 지도라도 손에 있었다면 좀 나았을까, 덜 헤맸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걸으니 어느덧 홍천생명건강과학관 앞입니다.

남산은 홍천 사람들이 사랑하는 산입니다. 홍천강을 중심으로 홍천 남쪽에 솟아 있어서 남산(南山)입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홍천읍 연봉리와 영귀미면에 걸쳐 솟아 있고요. 그러고 보니 어느 고장이든 대체로 남산 하나는 다 있는 듯합니다. 서울에도 남산이 있지요. 예전부터 홍천은 시로 승격될 거라는 소문이 무성했습니다. 선거철이면 군수나 국회의원 후보들은 양평을 거쳐 홍천까지 전철을 들여올 거라는 공략을 빠짐없이 내세웠습니다. 하지만 십수 년이 지나도 홍천의 풍경은 여전히 단란하기만 합니다.

지형이 마치 웅크리고 있는 한 마리 여우를 연상케 한다.

오후 1시, 홍천생명건강과학관 뒤편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를 통해 남산에 오릅니다. 이곳에서 정상까지는 2.2㎞. 남산산림욕장을 지나 너르고 평탄한 임도를 타고 산속 깊이 들어갑니다.

오는 4월 27일 남산에서 홍천 최초로 산길을 달리는 트레일러닝 대회인 ‘홍천트레일런’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홍천생명건강과학관을 기점으로 5㎞, 10㎞, 21㎞ 부문으로 나눠 치러진다고 하니 자연 속에서 새로운 삶의 활력을 찾고 싶다면 도전해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주말인 까닭에 산은 활기가 넘칩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눈으로 인사를 나누는 것은 오직 산에서만 가능한 의사소통법이기도 하지요. 들머리에서 정상까지의 거리도 가깝고 남산 해발이 415m로 그리 높지 않아서 남녀노소 산책 삼아 자주 찾는 산이 남산입니다. 전망대를 지나 출발한 지 40분 정도 지나 남산 정상에 도착합니다. 정상은 마치 헬기장을 연상케 하듯 넓고 정상석 또한 사람 키만큼 큽니다. 정상석 옆 국기 게양대에서 휘날리는 태극기 또한 남산의 상징이지요. 정상에 도착한 사람들끼리 서로의 기념 사진을 찍어줍니다.

정상에 오르니 홍천읍 전경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홍천의 젖줄 홍천강은 물론이고 터미널, 병원, 은행, 군청, 학교, 관공서 등 아는 곳들이 보여 괜히 반갑습니다. 날씨라는 천운도 따라줘서 오늘은 시계도 무척 청명합니다. 멀리 두개비산, 석화산, 망령산, 가리산 등 홍천의 명산과 멀리 춘천의 산까지도 마루금을 그어댑니다. 그야말로 완벽하게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홍천. 이렇게 보니 이곳 사람들이 왜 홍천을 쉽게 벗어날 수 없는지 알 것 같습니다. 영귀미(詠歸美)는 ‘노래를 부르며 아름다운 곳으로 돌아온다’는 뜻입니다.

정상 남쪽 풍경. 가장 높은 산이 횡성 경계의 오음산이다. 

보통은 정상까지 올랐다가 왔던 길로 되돌아 내려가기 마련이고 저 역시도 일전에 남산에 왔을 때 그리 오고 갔건만 오늘은 아직 해가 남아 있기도 하고 가보지 않은 길이 궁금해 정상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으로 방향을 돌립니다. 여우고개 가는 길입니다. 지형이 마치 웅크리고 있는 한 마리 여우를 연상케 하는 여우고개. 남산에서 영귀미면 덕치리의 여우고개까지는 5㎞ 정도 됩니다. 여우고개가 낯이 익는 이유는 이 고개를 넘어 도착하는 속초리 속새울이라는 마을에서 나의 어머니가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어느새 조용히 눈이 녹고 겨우내 무성하게 떨어진 낙엽이 고스란히 자취를 드러낸 초봄의 산길 위에서 문득 어떤 얼굴들을 생각합니다. 이 고개를 넘나들며 자랐을 어떤 사람들. 삶이 고단하고 막막할 때마다 그들은 아마도 숱하게 이 고개를 그리워했을 것입니다. 이 고개를 넘으면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만날 수 있다는 믿음이 그들을 살게 했을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그런 길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입니다.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길. 당신에게 그 길은 어떤 길인가요? 작가·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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