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라이프이스트-손주에게 물려줄 아버지 고사성어] 내 손잡아 주는 이가 친구다

2025. 3. 20.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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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더 라이프이스트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한동네 살던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지 며칠 지났다. 같이 들었던 아버지가 불렀다. 직장에 다닐 때다. 친구 묘지에 다녀왔느냐고 물었다. 일 핑계 대며 안 가봤다고 하자 불같이 화를 냈다. 화를 낼 만한 일이 10여 년 전에 있었다.

재수해서 본 대학 입시에 낙방했다. 뵐 낯이 없어 술 취해 이튿날 늦게 귀가하자 아버지가 시험 결과를 물었다. 자리를 피하려고 “합격했습니다”라고 둘러댔다. 아버지에게 머리를 얻어맞고 집에서 쫓겨났다. 나중에 들은 얘기다. 지인이 아버지에게 내 불합격을 먼저 알리며 앞에 두 명이 있긴 해도 그 학생들이 등록하지 않으면 합격할 수 있다고 상세하게 알려줬다고 한다.

닥치는 대로 가다 보니 도착한 곳이 전남 순천에 있는 선암사(仙巖寺)다. 세상을 하직하려고 하루 종일 헤맸다. 사찰 경내에, 땅에 붙다시피 옆으로 뻗어나간 와송(臥松)의 질긴 생명력을 보고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집으로 가지 못하고 이틀을 굶은 채 구로동 공장에 다니는 친구 자취방을 찾아갔다. 골목을 몇 번이나 헤집어 집을 찾고는 이내 쓰러졌었다고 했다. 그 친구 보살핌 때문에 목숨을 건지고 몇 달 같이 지냈다.

그날 이후 만나지 못했던 그 친구의 부음을 들었을 때 크게 놀랐다. 아버지는 네가 나서 살펴야 했을 진정한 친구라며 책망하고, “‘벗 우(友)’가 왼손과 오른손을 맞잡아 교차하는 것처럼, 내 손을 잡아주는 사람이 친구다”라고 정의했다. 친구는 벗을 뜻하는 붕우(朋友)다. 중국 전한(前漢) 말기 학자 양웅(楊雄)은 ‘벗으로서 마음을 나누지 않으면 얼굴만 아는 벗이고, 친구로서 마음을 나누지 못하면 얼굴만 아는 친구이다’라고 아버지는 설명했다. 이어 “붕(朋)은 나이와 상관없이 뜻(志)을 함께하는 사이다. 우(友)는 비슷한 나이로써 정(情)을 공유하는 사이다”로 구분했다.

빗대 인용한 고사성어가 ‘포의지교(布衣之交)’다. 베옷을 입을 때의 사귐이라는 뜻이다. 벼슬하기 전 선비 시절에 사귐 또는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사귄 벗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사기(史記) 인상여열전(藺相如列傳)에 나온다. 포의(布衣)는 삼 껍질에서 뽑아낸 실로 짠 삼베다. 목화솜을 자아 만든 무명과 함께 가난한 서민들의 옷을 만든 주재료였다. 벼슬이 없는 선비를 일컫는 말이었다.

중국 전국시대 조(趙)나라를 굳건히 지킨 명신으로 화씨지벽(和氏之璧)을 보존한 완벽(完璧)의 공신인 인상여(藺相如)가 강조한 말에서 나왔다. 고사는 이렇다. 조나라 왕이 화씨벽을 얻게 되자 강국 진나라에서 열다섯 개의 성을 떼어줄 테니 구슬과 바꾸자고 했다. 보물을 빼앗을 욕심을 알아챈 조왕은 출신은 미천해도 지혜가 뛰어난 인상여를 사신으로 진나라에 보냈다. 진왕이 화씨벽을 보고 돌려줄 생각을 하지 않자, 흠이 있다며 받은 뒤 화를 내며 인상여가 말한다. “일반 백성의 거래에서도 서로 속이지 않는데 하물며 큰 나라 사이에 어찌 그리하겠습니까(布衣之交 尚不相欺 況大國乎).” 그러면서 억지로 뺏으려 하면 머리와 함께 구슬을 기둥에 부딪쳐 깨뜨리겠다고 했다. 체면을 구긴 진왕은 고이 보낼 수밖에 없었고 인상여는 돌아와 상경 지위에 올랐다.

아버지는 출처를 밝히지 않고 친구를 네 가지 유형으로 알려줬다. 첫째가 화우(花友)다. 꽃이 피어 예쁠 때는 다가오지만 꽃이 지면 돌아보지도 않는, 즉 자기가 좋을 때만 찾는 친구다. 둘째는 칭우(秤友). 저울이 무게에 따라 이쪽저쪽으로 기울 듯 내게 이익이 되는지를 따져 움직이는 저울 같은 친구다. 셋째는 산우(山友)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반기는 생각만 해도 편안하고 든든한 산과 같은 친구다. 넷째는 지우(地友)다. 땅은 생명의 싹을 트여주고 곡식을 길러내며 조건 없이 베풀듯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서로 지지해 주는 땅과 같은 친구다.

아버지는 죽은 친구를 ‘지우’라면서 애도했었다. 이 글을 쓰며 그의 묘소를 찾았으나, 이미 오래전에 묵묘(默墓)가 돼 찾을 길이 없다. 그가 묻혔을 먼 산을 바라다보고 내 무심(無心)했음을 빌었다. 돌아오는 길에 친구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내 손을 잡아주는 친구를 사귀자면 어떤 인성이 있어야 할까를. 당연히 정(情)이 있어야 한다. 그 정은 친구와 마음을 같이하는 공감력에서 나온다. 손주가 일어서 넘어지기 시작할 때부터 서둘러 가르쳐줘야 할 소중한 성품이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조성권 국민대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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