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건汶楗 풍수유람] 54. 호남의 명필, 강암 송성용
전주에 들어서면 마주하게 되는 커다란 관문인 호남제일문.
전국에서 가장 큰 일주문이라고 한다. 호남제일문만큼 널리 알려진 것이 현판 글씨다. 현판 글씨가 도시의 품격을 말해주고 있다.
강암이 여든이 넘은 나이에 쓴 호남제일문.
단아하며 웅장하고 따뜻한 필치가 우아함을 드러낸다. 이 글씨를 쓴이가 한국 서예의 새로운 장(章)을 열은 강암 송성용이다. 강암은 부친 유재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고, 유재는 간재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간재 전우 묘소. 익산시 삼기면.
■간재(干齋) 전우(田愚, 1841~1922년)
그는 20세에 퇴계집(退溪集)을 보고 크게 깨우쳤다. 스승의 영향을 받아 이이, 송시열을 숭상하였다. 42세에 영의정 홍순목의 천거로 여러 직책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한다. 이후 경상과 충청의 여러 곳을 다니며 학문을 닦고 후학을 양성했다. 개화파였던 박영효는 개화에 반대되는 인물이라 처형을 주청했었다. 1895년 단발령이 내려지자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간재는 을사오적을 처형하고 조약을 파기할 것을 상소한다. 이후 나라가 어지러움을 보고 부안 앞 바다의 황등도로 들어갔다. 이후 계화도로 거처를 옮겨 후학을 양성하니 제자가 3천명을 넘었다고 한다. 1919년 고종이 사망하자 상복을 입고 3년상을 치룬다. 1922년 간재가 별세하자 그의 영구를 따르는 사람이 2천여 명이었다고 한다
당대에 간재의 명성은 상당하였으나, 변화하는 시대에 대응하는 방법은 각기 달랐다. 유인석은 강경 무장투쟁을 주도했으며, 최익현은 개화파와 정면으로 정치투쟁을 벌였고, 간재는 오직 후학을 양성하고 학문을 닦았을 뿐이다.
맥로도. 봉분 뒷 부분이 핵심 정혈이나 간재 묘소는 18회절 대명당에 모셨다.
■유재(裕齋) 송기면(宋基冕, 1882-1956)
그는 초년에는 옆 마을 석정 이정직의 문하에서 문장·서화·역산(曆算) 등을 두루 배웠고, 만년에는 간재의 문하에서 성리와 의리에 관한 학문을 받아들였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도 항일의식이 강해서 창씨개명을 거부하여 일본경찰의 갖은 협박을 당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시대상황을 인식하고 옛 것을 몸체삼아 새롭게 활용해야 한다는 구체신용설(舊體新用說)을 주장하기도 했다. 유재는 서예와 사군자에 뛰어났는데, 학문적 이론과 실기를 겸비하였다. 도처에 그의 신도비와 편액을 남겼다고 한다. 아들인 강암이 부친의 솜씨를 물려받은 듯하다.
유재 송기면 묘소. 김제 백산면.
맥로도. 전면에서 진입하는 맥로가 유재 묘소에서 18회절 명당을 맺었다.
아들인 강암이 서예로 명성을 날리고 손자들이 모두 현달한 것은 유재 묘소의 묫바람이 크게 작동했다는 판단이다.
요교정사(蓼橋精舍). 묘소 전면 백호방.
유재가 후학을 가르치던 학당이다. 그는 노소와 귀천을 따지지 않고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편액은 강암이 썼다고 한다. 대문이 잠기어 편액과 글씨를 감상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저녁 무렵 손님이 들어오자 잠시 후에 밥상이 들어왔다. “왜 식사를 했느냐고 묻지도 않고 상을 내오냐”, “물어보면 선비체면에 먹었다고 할 것 아닌가 그러니 물어볼 필요 필요가 없지요.”라며 유재는 답했다고 한다.
■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 1913∼1999년)
한국서예의 독자적 경지를 이룬 호남을 대표하는 서예가이자 유학자이다. 그는 김제 백산면의 요교마을에서 송기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에 몸이 약하여 호(號)를 강암(剛菴)이라 하였다. 일찍이 전, 예, 해, 행, 초 5체는 물론이고 대나무, 난초, 매화, 국화, 소나무, 파초, 괴석 등 다양한 소재의 문인화에 일가를 이루었다. 1956년 주변의 권고에 못이겨 서예대전에 출품·입선하자 이름이 알려졌다.
그는 유학자로서 일제 강점기에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고, 평생을 한복을 입었다. 서예 뿐만 아니라 민족의식이 강한 유학자로 일제 강점기에 창씨개명도 하지 않았다.
“나를 평생 지켜준 게 갓과 상투”라며 선비로서의 강직함을 지켰다.
강암의 작품은 호남은 물론 전국 각지에 비문, 현판을 비롯해 수 많은 작품을 남겼는 말년에는 평생을 모았던 작품과 6억원을 기부하여 강암서예관을 설립했다.
강암 송성용 부부 묘소. 완주군 이서면.
맥로도. 뒤에서 내려오는 맥로가 강암 묘소에 13회절, 배위 묘소에 12회절 명당을 맺었다. 하단에는 2020년에 별세한 장남 송하철 (전주시장 역임)묘소도 자리한다.
강암은 선비로서 서예가로서 세상에 이름을 떨치고 자제분들은 모두 현달하였으니 세상이 부러워하는 삶이었다는 생각이다.
호남은 조선조에는 추사와의 일화를 남긴 창암 이삼만이 있었고, 지난 세기에는 악필(握筆)의 석전 황전과 강암 송성용이 있었다. 이제 다시 호남은 물론 대한민국을 대표할 21세기의 명필을 고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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