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나이다, 강릉에 불나지 않게…간절한 난장 벌인 예술가들

노형석 기자 2025. 3. 19.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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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천여년 전 강원도 강릉의 고려 사람들이 세운 빛바랜 나무 문이 눈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지난 14일 낮 강릉 옛 도심인 임영로변의 국보 임영관 삼문 앞으로 취재진이 모였다.

강릉 객사문이란 옛 이름으로 더 유명한 이 문은 현지를 순행한 왕과 부임한 관리가 머물던 거처 구실을 하던 곳이자 숱한 위인들의 눈길을 받았던 랜드마크였다.

이날부터 4월20일까지 강릉 옛 도심 임영로와 명주동 일대에서 열리는 제3회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 개막 전시 현장은 아련하면서도 절절한 감흥을 전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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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 현장
홍이현숙 작가의 신작 설치 영상물 ‘천년의 타타타(打打打)’. 강릉 대도호부의 임영관 중대청 건물 안에서 관객을 맞고 있다.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 제공

1천여년 전 강원도 강릉의 고려 사람들이 세운 빛바랜 나무 문이 눈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지난 14일 낮 강릉 옛 도심인 임영로변의 국보 임영관 삼문 앞으로 취재진이 모였다. 고려 태조 때인 936년 처음 건립한, 이 땅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 관문이다. 강릉 객사문이란 옛 이름으로 더 유명한 이 문은 현지를 순행한 왕과 부임한 관리가 머물던 거처 구실을 하던 곳이자 숱한 위인들의 눈길을 받았던 랜드마크였다. 고려 말인 14세기 원나라 세력을 몰아낸 공민왕과 15세기 생육신 김시습, 16세기 조선의 석학 이이와 어머니 신사임당, 17세기 천재 문인 허균과 누이 허난설헌이 문을 지켜보며 드나들었다.

이날 문 앞에서 홍이현숙 작가가 기자들에게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다 같이 이 문으로 들어가는 퍼포먼스를 할 건데요, 원래 안 열어주는데 오늘 딱 한번만 열어주기로 했어요. 들어가서 땅을 밟아줄 거예요. 지금 당신이 만지는 것이 퍼포먼스 제목입니다. 성주풀이 지신밟기 하듯이 발바닥으로 어루만져주세요. 갈지자로 땅을 쉬엄쉬엄 밟으면서 가주세요.”

지난 14일 오후 홍이현숙 작가가 강릉대도호부에서 가장 오래된 고려시대 건축물인 임영관 삼문(옛 강릉 객사문)을 열고 입장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기 위해 문 앞으로 다가가고 있다. 노형석 기자

작가와 함께 문의 배흘림 기둥을 보며 꼭꼭 땅을 밟았다. 문을 지나자 부임한 관리들이 임금에게 보름마다 한번씩 인사드렸던 중대청 건물이 보였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영정이 있는 그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 벽에는 홍이 작가의 신작 설치 영상물 ‘천년의 타타타(打打打)’가 상영되고 있었다. 퍼포먼서가 안부를 묻거나 인사를 나누는 듯한 품으로 탁탁탁 건물 안 나무 표면과 창을 치는 영상이, 산불 난 뒤 강릉 주변 산들의 헐벗은 풍경과 함께 되풀이돼 나왔다.

작가는 담담하게 말했다. “작업에 앞서 강릉 주위 사방을 둘러싼 산을 답사했어요. 동쪽 시루봉이 산불로 탄 모습을 봤어요. 마음이 아팠고 더는 이런 사고가 없기를, 산불에서 무사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여기 강릉대도호부의 오래된 문, 건물들과 대화하듯이 빌듯이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이날부터 4월20일까지 강릉 옛 도심 임영로와 명주동 일대에서 열리는 제3회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 개막 전시 현장은 아련하면서도 절절한 감흥을 전해줬다. 홍이 작가의 영상 작업처럼 강풍과 산불 같은 자연 재앙에 대한 현지 사람들의 근심과 이를 덜어내고 올곧게 생존하고 싶다는 갈망을 웅숭 깊은 상상력으로 담은 작품들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하늘과 땅의 모든 존재들을 불러들인다는 의미를 담은 ‘에시자, 오시자’란 강릉단오굿 악사들의 구음을 전체 제목으로 삼은 데서도 짐작되듯 지역 대표 무형유산인 강릉단오제가 주요 모티브가 되어 지역 역사와 삶 이야기를 은유적·상징적으로 담아냈다. 옥천동 재래시장 한구석 창고에서 상영한 정연두 작가의 3채널 비디오는 피아노 연주 모습과 불 탄 강릉 산야의 모습, 단오제에 들어갈 신주를 빚는 누룩의 발효 과정, 봄이면 태풍 같은 강풍이 부는 하늘을 묘사했다.

주말마다 선보이는 춤꾼 이양희 작가의 무대도 놓치기 아깝다. 옛 교회를 개조한 특설 공연장에서 전통산조의 조였다 풀었다는 하는 리듬 가락을 미세한 몸과 사지의 떨림으로 소화한 현대춤과 영상을 선보였다. 지역의 민담과 전설, 고사에 등장하는 여러 명소의 땅속에서 울리는 진동음을 수집해 이를 증폭시키는 울림 장치를 강릉대도호부 유적 곳곳에 놓고 땅의 정기를 느껴보라고 권하는 안민옥 작가의 설치 작품 프로젝트도 진한 여운을 남겼다.

강릉 특유의 역사와 의식에 담긴 공동체 문화, 개개인의 삶이 공명하는 지점을 현대예술의 언어로 색다르게 조명한 난장이다. 모든 작품들이 반경 1~2㎞ 안에 있어 걸어다니며 구경할 수 있다. 파마리서치문화재단(이사장 박필현)이 주최하는 격년제 시각예술 행사로 박소희 기획자가 1회 때부터 총감독을 맡고 있다.

강릉/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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