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의 낯선 사이]내전과 공존

기자 2025. 3. 18.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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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말 윤동주 시인 80주기를 맞아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의 일행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새벽에 공항 가는 택시를 탔는데, 기사분이 느닷없이 된소리로 “쭝국 가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했더니,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내내 “우리나라 선관위 직원 대부분이 중국 사람”이라는 주장부터 특정 정치인들은 사라져야 한다며 열변을 토했다.

이럴 때 그와 생각이 다른 승객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조용히 해달라고 부탁해야 할까. 무시하며 자는 척해야 할까. 이견을 제시하고 설득해야 할까… 나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의 ‘고문’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말이 통하지 않는 상태, 그런 상황을 우리는 폭력이라고 부른다. 나는 폭력 상황에 노출되었고 동시에 공모했다.

12·3 이후 윤석열 대통령의 내란 기획이 불과 두세 달 만에 내전(內戰) 상태로 변화했다고 본다.

물론 다른 의견도 있다. 김종대 전 정의당 의원은 “한국 사회에 내전은 없다”고 진단한다(경향신문 3월14일자). 아직 30% 이상의 두꺼운 중도층이 있고, 인종적 갈등에 기댄 종족주의형 정체성의 정치가 출현하지 않았으며, 여전히 물리적 폭력을 국가가 독점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정부의 공공 서비스와 행정의 질이 우수하다는 것이 그의 근거다.

나도 동의하는 바이지만 ‘상부구조’의 측면, 이를테면 반북, 반중, 반여성 이데올로기에다 종교의 감정화 등 정치적 정동(情動·affection)의 면에서, 대한민국은 현재 내전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헌재가 어떤 판단을 내리든 간에 어느 쪽도 승복하지 않으리라는 예상과 염려도 이러한 ‘정서적 내전’ 상태 때문이리라. 모두 헌재의 판단 이후가 더 문제라는 데 이견이 없는 것 같다.

전 세계적인 우익의 출현은 후기 식민(냉전) 체제와 신자유주의 통치의 산물이다. 독립을 해도 제국주의 지배의 후과(後果)로 자국민들끼리 이념적으로 혹은 인종적으로 분열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아프리카의 르완다이다. 르완다 내전의 배경은 식민 지배자였던 벨기에의 분할 통치다. 1959년에서 1996년까지 르완다와 부룬디에서 일어난, 다수지만 피지배 계급인 후투족과 소수인 지배 계급 투치족의 부족 간 갈등으로 인한 르완다 내전은 학살, 질병, 기아로 수백만명의 사망자를 낳았다. 특히 1994년 4월부터 7월까지 단 100일 만에 50만~80만명이 학살되는 참사가 벌어진 ‘르완다 사태’는 국제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이 역사는 테리 조지 감독의 2006년 영화 <호텔 르완다>에 잘 묘사되어 있다).

그런 면에서 간헐적 충돌과 희생은 많았지만, 한반도는 지난 70여년간 ‘평화로웠다.’ 지금 한반도의 상태도 미·소 냉전 체제의 유산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일명 ‘태극기 부대’인데, 실제로는 태극기만이 아니라 성조기와 영국기와 이스라엘기까지 등장하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극우에 대한 단호한 대처?

시민운동가인 지인과 현재 한국의 극우 상황에 대해 의견을 나누다가 그의 말에 놀랐다. 그는 “극우에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말했다. ‘단호한 대처의 구체적 방도’가 있는지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대화가 불가능한 상대에 대해 “단호한 대처”라는 발상에 당황했다. 이것은 ‘정말 싸우자’는 이야기다. 그러지 않아도 지금 양쪽은 맨손으로 백병전이라도 할 기세다. 아니, 이미 법원 습격이라는 폭력 사태가 발생했고, 폭력의 연쇄는 앞으로도 예상되는 일이다. ‘그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그들’의 생각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존재에 대한 ‘우리’의 바람직한 태도는 어떤 것이어야 할까. 이런 경우 “단호한 대처”는 진짜 내전을 불러올지도 모른다. 폭력의 반대말은, 상황마다 다르겠지만, 지금 한국 상황에서 최선은 공존에의 의지라고 생각한다. 공존은 타인에 대한 배려나 공감이 아니다. 스스로 극도의 인내와 긴장을 동반하는 신경증적 상황의 지속이다. ‘나’를 없애겠다는 이들, ‘나’의 죽음을 기도하겠다는 이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그들과 같이 살아가겠다는 각오는 평화가 얼마나 지옥 같은 전쟁 상태와 같은 것인가를 일깨워준다.

극우와의 공존은 그들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나와 생각이 다른 상대방의 ‘존재’를 존중한다는 의미다. 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으며 그들의 생각이 어떻든 간에 존재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1992~2018)라는 시민단체에서 오랫동안 일한 지인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많은 이가 우리 단체 이름을 ‘미군근절운동본부’라고 불러요. 어떻게 살아 있는 사람을 근절합니까. 미군은 철수해야 할 대상이고, 우리가 근절하려는 것은 미군이 저지르는 범죄지요.” 그는 “미군 근절”이라는 말에 두려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여성주의도 마찬가지다. 여성과 남성 모두 가부장제 사회 밖에서 살 수 없다. 삶은 가부장제와 협상과 저항을 반복하며 종속적인 주체(subject)로 살아가는, 구조와 개인이 모두 조금씩 변형되는 일이다. “가부장제 타파, 근절” 구호는, 구호일 뿐 실현할 수 없는 관념이다. 우리는 평소 ‘근절’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지만, 근절되는 세상사는 없다. 나쁜 통치는 형식을 달리할 뿐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매번 달라지는 그 통치 형식(항시적 비상사태)을 이해하는 것이다.

언젠가 류승완 영화감독은 유명한 만화 <톰과 제리>가 주는 공포와 긴장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이 애니메이션은 우둔한 고양이 ‘톰’과 영리한 쥐 ‘제리’의 공존에 관한 이야기다. 이러한 상황이 실제라면, 제리의 삶은 공포와 견딤 그 자체다. 대개 생태계를 ‘먹고 먹히는 관계’로만 이해하지만, 공존의 관계도 있고 천적과의 균형도 중요한 요소다. 문제는 그리고 우리의 고민은, 공존과 균형이 약자의 몫이라는 사실일 것이다.

극우의 반대말은 공존

내가 생각하는 사회운동은 공존을 위한 지혜를 모으는 일이다. 생각하는 사람인 호모 사피엔스가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상대를 해치고(극우), “단호히 대처”(진보)하고자 한다면 대립은 영원할 것이다.

현재 한국 사회의 극우 현상을 분석한 2025년 3월3~9일 ‘주간경향’ 1618호의 표제는 “극우가 됐다. 저쪽이 싫어서”이다. 이 커버 스토리는 우리 사회의 극우가 ‘진보의 다른 모습’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극우가 된 이유가 그만큼 민주당, 진보 진영 등 범야권에 대한 기대의 반증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극우가 진보의 안티테제로 등장했다면, 결국 누가 ‘잘해야 할까.’ 나는 다른 나라 극우의 인종주의적 성향과 달리, 이러한 상황이 다소 희망적이라고 생각한다. 범야권의 발상의 전환과 각성에 따라 변화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극우에 “단호히 대처”해서는 안 된다. 상호 인정, 공존만이 모두가 살 길이다. 당연히 극우는 공존을 수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극우다. 극우가 공존을 수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모두가 극우처럼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나(진보)는 양보했는데, 상대(극우)는 그렇지 않다는 ‘피해의식’을 가질 필요도 없다.

역설적이지만, 공존은 한쪽의 의지만으로도 가능하다. 어차피 극우의 사고는 누군가의 설득으로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상대가 한 대 때리면 나는 두 대 때린다. 혹은 상대가 먼저 때릴 것 ‘같으므로’ 내가 먼저 공격한다”는 선제타격론을 논리적으로 반박한다고 설복되겠는가? 극우는 설득 대상도 투쟁의 대상도, 더구나 사라져야 할 이들도 아니다. 사람의 생각은 비판해도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다.

글의 서두에 등장한 택시 기사와의 동승은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다. 그는 택시 기사로서는 친절했고, 그의 주장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떠도는 얘기들일 뿐이었다. 그가 극우가 된 경로, 즉 ‘과학기술의 발달’은 발전주의적 진보가 염원했던 일이기도 하다. 근대 이후 인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발전주의를 추구해왔다. 한국 사회의 진보 세력 역시 서구의 후발 주자로서 발전(progress)주의적 진보와 도구적 합리화를 최우선의 가치로 삼아왔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민주주의가 배제 없는 사회라면, 공존이야말로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평화는 갈등 없는 상태가 아니라 극심한 갈등 상황을 견디는 힘이다. 새로운 말의 가능성을 믿으면서, 새로운 인간성의 출현을 희망하면서 말이다.

정희진 월간 오디오매거진 ‘정희진의 공부’ 편집장

정희진 월간 오디오매거진 ‘정희진의 공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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