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이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몰랐던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삶과 죽음']
"조국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잘 가게, 친구"
50년 지기의 애절한 절규에 눈시울 붉어져
1965년 7월19일 향년 90세로 국부 잠들다
탄신 150주년 2025년, 우리 삶을 성찰할 때
귀국 좌절로 인한 충격이 중풍을 불러 이승만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됐다. 막막해진 순간에 마우나라니(천국의 산이라는 뜻) 요양원 원장 존슨 여사의 편지가 천상으로부터 내려진 동아줄처럼 프란체스카에게 전해졌다.
"우리 모두 존경하는 이 박사님을 저희 양로원에서 모시고 싶습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62년 3월 29일부터 1965년 7월 19일 임종할 때까지 마지막 3년4개월을 마우나라니 요양원 202호실에서 바다가 보이는 창밖으로 고국을 그리며 보냈다. 요즘이라면 3년간 약 100만달러의 비용이 있어야 가능한 일을 부끄럽지만 한국민이 아닌 하와이 현지인들이 제공했다.
이 박사의 기력은 나날이 쇠약해져 갔다. 그럴수록 프란체스카의 간병이 도움이 되었다. 병원은 그녀의 숙식을 위해 고용인 숙소에 방 하나를 마련해 주고 간호보조원으로도 인정해줘 이 박사 곁에 항상 머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오중정씨는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런 열녀가 없었지요. 쇼핑이나 외출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요. 이 박사 옆에서 항상 성경을 읽어드리거나 찬송가를 불러 드리고…. 그렇게 훌륭한 분이 없었습니다. 사람이 정신적으로 시들 것 같은데 워낙 신앙이 강해서 그런지 두 분 다 강한 분이셨어요. 국부와 국모의 자격을 갖춘 분이었지요."
이승만의 정신이 아직 온전했을 때 했던 마지막 기도문이 전해진다.
"이제 저의 천명이 다하여감에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셨던 사명을 더 이상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몸과 마음이 너무 늙어 버겁습니다. 바라옵건대 우리 민족의 앞날에 주님의 은총과 축복이 함께하시옵소서. 우리 민족을 오직 주님께 맡기고 가겠습니다.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려 있게 한 것은 대못이 아니라 '인류를 위한 사랑'이었듯, 이승만을 마지막까지 견디게 한 것도 권력욕이 아니라 '민족을 위한 사랑'이었다. 우리 민족에게 씌워진 종의 멍에를 벗기고 자유케 하려던 그 위대한 사랑이었다.
1965년 6월 20일. 이 박사가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노화된 장기에서 내출혈이 발생한 것이다. 의식은 거의 없는 상태로 야윈 팔에는 검푸른 주삿바늘 자국만이 무수했다. 7월 4일. 한국에서 양아들 이인수씨가 급히 들어왔다. 병원에서는 다시 한번 내출혈이 심해지더라도 응급실로 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더 이상 방법이 없다는 얘기였다.
7월 18일. 심한 내출혈로 혈압이 급격히 떨어졌다. 이인수씨가 이 박사 옆에 누워 수혈을 했다. 그날 밤 10시가 넘어가자 주치의 토마스 문 박사가 "오늘을 넘기기 힘들다"고 했다. 자정을 넘어 7월 19일 0시35분. 갑자기 호스를 입에 문 이 박사의 호흡이 거칠어지더니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향년 90세였다.
윌버트 최씨가 관계했던 누와누 장의사가 장례식을 거행했다. 고인이 건립했던 한인기독교회에 고인이 안치됐다. 고인의 상반신이 보일 수 있게 관을 열어두었다. 7월 21일 오후 8시30분, 프란체스카 여사가 입장할 무렵엔 조화가 교회 전체를 메웠고 수많은 현지인과 교민들이 애도를 표하러 모여들었다. 이 박사의 50년 지기인 하와이 사업가 보스윅이 뒤늦게 연락을 받고 섭섭한 표정을 감추지 않은 채 달려왔다. 그는 교회 입구부터 사람들을 헤치며 성큼성큼 걸어들어와 이 박사의 관 앞에 섰다. 그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이 되어 고인의 얼굴을 덮은 베일을 걷어내더니 이 박사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며 울부짖었다.
"내가 자네를 안다네! 내가 자네를 알아!(I know you! I know you!) 자네가 얼마나 조국을 사랑하고 있는지, 자네가 얼마나 억울한지를 내가 잘 안다네! 친구여! 그것 때문에 자네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바로 그 애국심 때문에 자네가 그토록 비난받고 살아온 것을 내가 잘 안다네! 잘 가게! 내 소중한 친구여…."
이인수씨가 기억하고 있는 한 편의 시 같은 보스윅의 애절한 절규는 고인이 된 이승만의 영혼을 진정 위로해 주었을 것이다. 참석했던 모든 사람들의 눈시울이 젖어 들었다. 이날 밤 10시30분, 6명의 육해공군 의장대가 조포를 발사하는 가운데 히컴 공군기지에서 이륙 대기 중인 군 수송기 C-118에 유해가 실렸다. 태극기조차 구할 수 없었다. 오로지 이승만을 존경하던 교민과 미 장군들의 배려뿐이었다. 밴플리트 장군을 포함해 한국까지 함께 가기를 희망하는 사람들 16명을 태운 채 비행기가 날아올랐다. 1965년 7월 21일 밤 11시 정각. 이승만 박사가 하와이 섬으로 온 지 5년2개월 만이었다.
이승만의 유해를 실은 군 수송기가 밤하늘의 별들 속으로 사라진 날로부터 60년이 지난 2025년은 그의 탄신 15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그가 해양 문명권으로 진입시켜 건국한 대한민국은 오늘날 10대 선진국으로 성장했지만, 북녘 동포를 위한 자유통일을 염원하는 지도층과 국민은 거의 없다. 개인의 근본적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가짜뉴스와 가짜역사에 맞서 싸우려는 언론인과 정치인도 찾기 어려워졌다. 이승만의 가난한 기독교는 대한민국을 세웠지만 오늘날의 부유한 기독교는 대한민국을 지키기도 버거워한다. 단군 이래 물질은 최고의 풍요를 구가하지만, 정신은 탐욕과 빈곤을 헤매는 중이다.
우리가 다시 종의 멍에를 메려는 것은 아닌지. 우리 모두 나라를 다시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잊은 것은 아닌지. 우리가 창조적 지성을 겸비한 지도자를 만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모르고 사는 것은 아닌지. 우리를 자유케 한 '이승만의 삶과 죽음'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성찰해야 하지 않을까.
이동욱 전 KBS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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