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프레소] 수난 3대… 우리 편 아니면 다 적인가
우리 편 아니면 무조건 ‘청산’?
극단적 진영 정치 갈수록 심각
중도 배제한 정치, 미래 있겠나
아직도 텔레비전 뉴스에서 대규모 집회 소식을 전하는 날이면 부모님으로부터 전화가 오곤 한다. 괜히 집회에 나가진 않았는지, 무슨 탈이라도 나지 않았는지 걱정해서다. 민주화가 된 지 수십 년이 지나서도 집회·시위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건 과거 겪었던 극단적인 정치 폭력 때문이다. 1951년 가을 화순 백아산 일대에 똬리를 틀고 인근을 습격하던 빨치산에게 잡혀간 조부는 시신을 찾긴커녕 정확한 기일조차 모른다. 부모가 십수 일간 공포에 떨어야 했던 1980년 5월 광주는 말할 것도 없다.
지난해 말부터 안부 전화 어조가 심상치 않아졌다. 비상계엄 사태가 한국 사회에서 정치적 폭력이 용인되는 수준을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단순히 윤석열 대통령 탄핵에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 문제가 아니다. 정치적 견해가 다른 상대방을 멸절시킬 대상으로 간주하고 그들에게 극단적인 폭력을 가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거리낌 없이 나오게 됐다.
정치 폭력이 용인되는 사회에서는 ‘우리 편’ 밖에 있는 사람은 언제든지 표적이 될 수 있다. 같은 진영이라도 비주류는 언제나 청산 대상이다. 등 뒤에서 칼을 꽂을 수 있는 위험 요소로 간주하는 데다, 이교도에게는 관대할 수 있지만 이단은 용납할 수 없는 것이 정치 종교의 생리이기 때문이다. 요즘은 차라리 민주당 이재명 대표 같은 유력 정치인과 사진을 찍어야겠다는 생각까지 하곤 한다. 문재인 정부 당시 횡행했던 좌표 찍기와 각종 집단 린치가 더 강도 높게 이뤄질 걸 대비해서다.
허위 사실로 폭력을 정당화하는 경우도 잦다. 이름에 ‘귀’가 들어간다고 중국인이라며 조리돌림당하는 이들을 보면 공포심이 든다. 호남 출신에다 발음도 좋지 않으니 어느 우파 유튜버가 작정하고 달려든다면 피할 방도가 없다. 여권 정치인 한 명이 고향이 담양이라는 가짜 뉴스와 함께 그래서 ‘수박처럼 겉은 파랗지만 속은 빨갱이’라고 공격받았던 걸 보면서 남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치인의 고향으로 지목된 마을은 내 조부가 잡혀갔던 곳이다. 산골에 약간의 논밭이 있는 집안의 차남으로 중졸 학력인 그도 목숨을 잃었을 정도로 당시 전남에서는 좌우익 간에 살육전이 강도 높게 벌어졌다. 신분, 토지 소유, 종교의 차이는 물론 씨족과 마을 간 갈등이 차곡차곡 쌓여 있던 상황에서, 좌우 양쪽 모두 정치적 이익을 위해 갈등을 조장하고 극단적 폭력으로 유도했기 때문이다.
극단적 진영 정치에서 가장 취약한 집단은 정치색이 옅고 특정 진영에 충성하지 않는 이들이다. 언제든 비(非)국민으로 낙인찍힐 수 있는 이들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 정치적 의사 표현의 자유가 억눌리는 것뿐만 아니라 신변과 생업까지 위협받을 수 있어서다. 이재명 대표의 지지율이 계속 박스권에 갇혀 있는 것은 기본소득 같은 정책을 고집해서가 아니다. 정치적 폭력을 억제하긴커녕 오히려 조장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중도층에서 국민의힘이 고전하는 이유도 계엄령을 ‘계몽령’이라 부르는 강경파에 편승하는 행태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폭력이 일상화된 정치는 폐허만 남긴다. 누구든 한쪽 편을 들지 않으면 위해를 입는다. 오늘은 승자가 된 것 같아 보이는 세력도 내일이나 모레쯤엔 패잔병이 되어 쫓기는 신세가 된다. 배제와 폭력의 악순환 속에서 공동체가 망가지는 건 순식간이다. 6·25 전쟁 이후 전남의 지식인과 엘리트는 위축됐고 서양화 등 서울과 맞설 만한 성과를 보였던 지역 문화는 흔적도 남지 않았다. 어쩌다 정치 폭력에 그대로 노출된 ‘수난 삼대’가 되고 싶지 않은 건 단순히 개인적인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다. 중도를 배제하는 정치의 결과가 뻔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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