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영의 자작나무 숲] 죄와 벌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다시 읽는다. 널리 알려진 소설의 내용을 소개하자면, 가난 때문에 학업을 중단한 법학도 라스콜니코프가 전당포 노파를 살해한다. 사회에 아무 이득도 못 되면서 가난한 사람 피만 빠는 이[蝨] 같은 존재를 없애 그 돈으로 다수를 구한다는 ‘정의로운’ 목적에서다. 그러나 그는 전당포 주인을 죽이고도 정작 돈은 취하지 않는다. 돈은 목표가 아니었고, 대신 그에게는 언젠가부터 품어온 사상이 있다. 인간은 ‘평범한 사람’과 ‘비범한 사람’ 두 부류로 나뉘는데, 비범한 사람은 죄를 범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주인공이 도끼로 노파를 내려친 것은 자신에게도 그 권리가 있는지 없는지 시험하기 위해서였다.
히브리어 ‘죄’는 ‘하나님 뜻’을 절대 기준 삼은 개념어고, 죄(罪)라는 한자는 ‘그릇된 일을 하여 법망에 걸리다’의 의미를 지녔다 한다. 러시아어 ‘죄(prestuplenie)’에는 ‘넘어서다’라는 뜻이 담겨 있다. 히브리어나 한자에 비해 관념적이고 표상적이다. 죄는 근본적으로 선(線)을 ‘넘는’ 행위다. 그 ‘선’을 사회제도로 획정하면 사법이 되고, 인간의 도리로 규정하면 윤리가 된다. 마음속에 그어놓은 준엄한 선이 양심이다. 모든 죄 중에서도 가장 용서받지 못할 죄가 양심을 벗어나는 일이라고 평범한 사람들은 생각한다. 넘지 말아야 할 선에 대한 보편적 인식이 있기에, 일상생활에서도 어느 지점에서는 멈추고 삼갈 줄 아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라스콜니코프의 범죄론은 일반인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비범한 인간 즉 초인은 평범한 인간의 한계를 이미 ‘넘어선’ 존재이므로, 죄인의 본성을 지니고 있다. 오직 자기 자신이 선악의 잣대가 된 사람에게 넘지 못할 선이란 없다. 솔로몬, 마호메트, 나폴레옹 같은 역사 속 영웅이 무고한 피를 흘리면서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더 큰 목표를 향해 앞으로 나갔던 것은 그들이 그럴 권리를 가진 초인이었기 때문이다.
초인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 위험천만한 이 생각은 도스토옙스키의 마지막 소설 ‘카라마조프 형제들’에 이르러 “영혼의 불멸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사상으로 진화한다.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로 풀어 말할 수 있겠다. 하늘 무서운 줄 모른다고 하지 않는가. 하늘이 무섭지 않은데 하지 못할 일이 어디 있는가. 도스토옙스키는 이런 초(超)도덕의 오만함에서 악의 본질을 보았다. 선악의 경계를 자의적으로 넘나드는 일이야말로 신에 대한 가장 큰 반항이었다.
‘죄와 벌’은 살인을 저지른 주인공이 오래도록 고통받다가 자수하여 광명 찾는 이야기다. 아주 단순히 읽으면 탐정추리소설 같기도 하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의 모든 작품은 관념 문학이다. 도스토옙스키를 평생 추앙했던 소설가 이병주는 자신이 탐정소설 정도로 치부했던 작품을 두고 일본 법학도들이 치열한 논쟁을 벌이는 걸 본 후 본격적으로 다시 읽었다 했다. ‘죄와 벌’을 최초로 완역한 번역(공역)자는 다름 아닌 소설가 황순원이다. 번역 서문에서 인간이 신 앞에 나갈 때 문제 되는 것은 조그만 선이나 악이 아니라, 인간이기에 “지상에서 겪은 고통”이라고 썼다. ‘죄와 벌’은 범죄 사건으로 포장된 인간 고통의 이야기며, 결국은 그 캄캄한 터널 끝에 나타나는 구원의 서사다.
소설 내용과 분량 면에서 죄는 극도로 짧은 시간 안에 벌어지지만, 벌은 길게 이어진다. 그리고 구원은 번개처럼 온다. 흔히들 ‘순결한 매춘부’ 소냐가 라스콜니코프를 구원하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실제로 구원은 죄인 안에서 솟아오른다. 어느 날 불현듯 생각의 오류를 깨닫고, 그동안 부정해왔던 선악의 경계선을 되찾게 되면서다. 깨달음 직전에 그가 꾸는 악몽이 있다. 인간 사회에 악령의 전염병이 창궐하고, 감염된 인간들이 서로를 죽이며 세상을 파멸시키는 묵시록이다. 라스콜니코프가 품었던 잘못된 생각(초인론)이 끔찍한 섬모충으로 현현해 분열과 대립의 도가니로 몰아가는 대목은 마치 ‘지금 여기’의 현실을 눈앞에서 보여주는 것 같아 소름 끼친다. 소설에서처럼, 오늘 우리 사회의 이 참담한 혼돈도 깨침을 주는 악몽으로만 스쳐 지나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150년도 더 전에, 위대한 예술가는 이렇게 예언했었다.
“모두들 공황 상태였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으며, 저마다 오로지 자신에게만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 누구를 어떻게 재판해야 할지 알지 못했고, 무엇을 악으로, 무엇을 선으로 여겨야 할지 의견의 일치를 볼 수가 없었다. 누구를 유죄로 하고, 누구를 무죄로 할지 알지 못했다. 사람들은 어떤 무의미한 증오에 사로잡혀 서로를 죽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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