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드라마 보며 펑펑, 무엇이 눈물 버튼을 눌렀나('폭싹 속았수다')
[엔터미디어=정덕현의 네모난 세상] "다른 사람을 대할 땐 연애편지 쓰듯 했다. 한 자 한 자 배려하고 공들였다. 남은 한 번만 잘해 줘도 세상에 없는 은인이 된다. 그런데 백만 번 고마운 은인에겐 낙서장 대하듯 했다. 말도 마음도 고르지 않고 튀어 나왔다."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대학생이 된 금명(아이유)이 엄마 애순(문소리)에게 전화 통화하며 유학 문제로 괜스레 화를 내는 대목에는 이 같은 내레이션이 흐른다.
유학 장학생으로 뽑혔지만 형편이 되지 않아 못가게 되자 담당 교수가 사비를 털어서 보내주겠다 한다. 거절했지만 그 마음이 너무 고마운 금명은 교수에게 마음만도 너무 감사하다며 "일본 갔다 온 거 같다"고 예쁘게 말한다. 금명의 내레이션이 말하듯, 그 표현은 마치 '연애편지'처럼 배려하고 공들인 티가 난다. 그것도 진심으로.
하지만 그 교수의 마음이 너무 고마워 엄마한테 전화해 귤이라도 한 상자 보내달라 하던 금명은, 뭐가 그렇게 고마우냐는 엄마의 궁금증에 저도 모르게 "돈까지 빌려주려 한다"는 말을 꺼내놓는다. 그것이 엄마에게는 가시가 되는 건 줄도 모르고. 그래서 말다툼을 벌이고 "엄마랑 통화하면 짜증만 난다"는 말까지 꺼내놓는다. 낙서장에 아무렇게나 찌끄리듯이.
이 짧은 장면에는 금명과 애순의 전화 말다툼을 회고하는 금명의 목소리가 들어있다. 그 내레이션은 아마도 시간이 흘러 어쩌면 금명 또한 애순처럼 딸을 낳고 엄마가 됐던 시점에 돌아본 소회처럼 들린다. 이것은 엄마나 아빠 혹은 가족 같은 너무나 가까워 늘 하는 일들이 고마운 일이 되지 않고 당연한 일이 되곤 하는 관계에서 늘상 벌어지는 일이다. 그건 드라마 속 이야기지만, 인물을 통해 작가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그렇게 들려온 말들은 시청자들 각자의 기억을 헤집는다. '연애편지'와 '낙서장'이라는 비교가 가슴을 울컥하게 만든다. '남'과 '은인'이라는 말 역시.
<폭싹 속았수다>는 간만에 눈물 버튼을 눌렀다. 시청자들의 후기를 보면 대부분 드라마보다 펑펑 울었다는 간증이 쏟아진다. 내 경험을 먼저 이야기하자면 첫 회에 물질하고 나온 애순의 엄마 광례(염혜란)의 얼굴을 보는 순간부터 그 버튼이 눌렸다. 쫄딱 젖은 채 지옥을 갔다 온 사람마냥 절절해 보이지만 두 눈만은 생존의 의지로 활활 타오르는 눈빛이 그 버튼이었다. 그건 6,70년대 어떻게든 살아내려 애쓰던 우리 모두의 엄마들이 가졌던 그 눈빛이 아니던가.
광례가 죽는 순간도 그랬지만, 그 어린 딸 애순(김태연)이 유일하게 엄마를 챙기려 애쓰는 모습도 그랬다. 그렇게 그 애순(아이유)은 또 자라나 광례 같은 엄마(문소리)가 되고, 자신 같은 딸 금명(아이유)을 낳는다. 아이유가 애순의 젊은 시절과 그 딸인 금명을 1인2역으로 소화하고 있는 건 우연이 아니다. 이들의 삶은 그렇게 마치 분신의 삶처럼 연결되어 있고 이어진다. 엄마가 살아남기 위해 포기했던 학업의 꿈을 딸이 이어받아 대신 이뤄내고, 그 딸의 꿈을 위해 엄마는 오래도록 추억과 상처가 가득한 집까지 팔고서도 기꺼워한다.
애순의 옆을 무쇠처럼 지켜온 관식(박보검, 박해준) 또한 그 시대의 아빠들의 자화상이 어른거린다. 어떻게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밖에서는 모질게 일하면서도 집에서는 아프다 소리 한 번 안하고 살아온 아빠들. 딸 얼굴 한 번 보기 위해 천안에서 서울까지 일부러 찾아오고는 지나다 들렀다고 둘러대고, 떠나는 버스 안에서 쑥스럽게 손을 흔들다 딸이 손을 흔들어주자 너무 기뻐 양손을 흔드는 바보 아빠들이 그들이다. 무쇠가 닳도록 일하고도 "아빠 아직 살아있어"라고 자식 앞에서는 허세 부리는 그런 아빠들.
<폭싹 속았수다>는 이 윗세대와 그 아랫세대들의 이야기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순차적으로 그려나가면서도, 중간중간 시간을 넘나들며 엄마의 이야기와 딸의 이야기가 겹쳐지고, 그 딸이 엄마가 되어 자신의 딸과 엮어내는 이야기가 또 겹쳐진다. 젊어서 무쇠 같던 관식이 어느덧 중년의 나이가 되어 절뚝거리며 아내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이 교차된다. 바로 이 시간을 넘나들며 보여주는 교차점에서 우리는 저마다 깨닫게 된다. 왜 그때는 몰랐었을까. 그때의 엄마, 아빠의 나이가 되니 알겠는 그 마음들이, 시간을 넘나드는 이야기 속에서 펼쳐진다.
그 장면들의 교차 속에서 백만 번 고마운 은인에게 낙서장 쓰듯 했던 우리 각자의 후회와 미안함이 피어오른다. 순간순간을 살다보니 놓치고 있던 것들이 인생 전체를 통해 내려다보니 드디어 가슴 저미게 보이는 것들이 생겨난다. 드라마 속 엄마, 아빠의 이야기가 저절로 시청자들의 가슴으로 스며든다. 드라마를 보며 불쑥불쑥 무심했던 마음들이 새삼 떠오른다. "수고하셨습니다"라고 진심으로 말하고픈 마음이 <폭싹 속았수다>의 눈물 버튼을 누르고 우리는 여지없이 울 수밖에 없다.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gmail.com
[사진=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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