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이후, 미치지 않기 위해 소설을 썼다 [.txt]

한겨레 2025. 3. 1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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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책] 아버지의 땅
임철우 소설가. ⓒ성태현

학살 겪고 소설에 인생 걸자 결심
문학상 받고 교과서에도 실려
스무 살 나 자신과의 순정한 약속

작가에게 첫 책은 하나의 ‘출생증명’ 같은 것인지 모른다. 자신의 이름을 단 최초의 결실이자, 장차 펼쳐질 저만의 글쓰기 씨앗들이 오롯이 담겨 있을 터이므로. 그런 점에선 나의 첫번째 책 역시 예외가 아닐 듯싶다.

첫 소설집 ‘아버지의 땅’이 세상에 나온 것이 1984년 6월이니, 지금으로부터 41년 전이다. 그 긴 세월에도 오늘까지 용케 절판되지 않고 여전히 서점의 서가 한쪽에 꽂혀 있는 모습이 나로선 그저 대견스러울 뿐이다.

사실 ‘80년 5월’이 아니었다면 이 책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대학 4학년이던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모든 게 막연한 상태였다. 남몰래 혼자 소설 습작을 해보면서도 정작 나 자신의 재능에 대한 확신도, 작가의 길을 가겠다는 확신도 턱없이 부족했다.

한때는 스님이 될까 진지한 고민도 했었고, 대학에서 문학 공부를 하면서는 졸업 후 어느 시골 학교의 문예반 교사가 되어도 좋겠다 싶었다. 무슨 직업을 갖게 되든 그저 혼자서 좋아하는 책들을 마음껏 읽고, 가끔은 소설과 시를 써서 조심스레 신춘문예 응모도 해보는 그런 삶이라면 그런대로 만족할 것 같았다. 그랬는데, 광주에서 저 운명과도 같은 80년 5월과 맞닥뜨렸던 것이다.

그 열흘의 시간이 끝났을 때, 나는 더는 이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알았다. 내 안에서는 모든 게 무너졌고 모든 게 새로 태어났다. 학살의 주범은 절대 권력자로 군림하고, 피투성이가 된 그 도시 사람들에겐 폭도의 누명이 씌워졌으며, 눈과 귀를 빼앗긴 대다수 국민들마저 눈앞에서 차갑게 등을 돌렸다. 그 기막힌 현실 앞에서, 나는 소설을 쓰는 일에 생을 걸겠노라 결심했다. 당장 무엇이든 하지 않으면 심장이 터지거나 미쳐버리고 말 것 같았으니까. 어차피 내가 가진 재주라곤 그것뿐이라고 믿었으니까.

5·18로부터 6개월 후, 중앙지 신춘문예에 처음으로 딱 한 편 응모해본 소설이 당선되면서 얼결에 작가라는 이름을 얻었다. 예기치 못한 그 행운은 내겐 어떤 운명처럼 여겨졌다. 나 자신과의 약속을 신께서 들어주신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분노와 슬픔, 절망과 죄의식이 뒤엉킨 채, 몇 년 동안 중·단편들을 열정적으로 써내기 시작했다. 첫 창작집을 시작으로 ‘그리운 남쪽’(1985), ‘달빛밟기’(1987)에 이르기까지, 짧은 기간에 3권의 소설집을 잇달아 출간했다. 돌이켜보면 대체 그런 지독한 열정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싶을 정도로, 나는 절박하게 글쓰기에 매달렸던 것이다.

이 시기에 썼던 작품들을 지금 다시 펼쳐보노라면, ‘5·18’은커녕 ‘5월’이라는 말조차 아예 쓸 수 없었던 전두환 정권하의 끔찍하고도 엄혹한 시절, 목 안까지 들어찬 뜨거운 울음과 분노를 채 어쩌지 못해 항상 열에 들떠 위태롭던 내 젊은 모습들이 거기 고스란히 들어 있다.

나의 첫 책 ‘아버지의 땅’에 실린 작품들은 1980년~83년 사이, 대학 그리고 대학원 재학 중이던 이십 대 후반에 쓴 것들이다. 이 책은 나에게 여러모로 특별하다. 처음 책이 나왔을 때, 사방에서 과분할 정도의 기대와 찬사를 보내 주었다. 덕분에 오랜 전통의 문학상까지 받았고, 대한출판문화협회가 선정한 ‘오늘의 책’ 트로피도 받았다. 근래에는 ‘아버지의 땅’, ‘사평역’ 등이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신인작가로서 나의 이름을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준 출세작인 셈이다.

그렇지만 정작 이 책이 나에게 진정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이유는 따로 있다. 여기 실린 작품 하나하나는 나의 출생증명이자 첫 시작의 발자국 같은 것이다. 문학과 인간을 향한 지순한 애정과 믿음을 품고 고민하던 청년기의 풋풋한 내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에, 나에겐 무엇보다 소중하고 또 그만큼 두려운 책이다. 그것은 마지막까지 초심을 잃지 않겠노라는, 스무 살 나 자신과의 순정한 약속이 여전히 유효한 까닭이다.

그리고 다음 책들

그리운 남쪽

본격적으로 ‘5월 광주’를 다룬 작품들이 담긴 중·단편집. 나로서는 장편 ‘봄날’과 더불어 가장 뜨거운 가슴으로 써낸 책이다. 사람들은 사건과 일지에만 관심을 가질 뿐, 정작 그때 그곳에 ‘사람들’이 있었음을 망각한다. 이 책은 전두환 정권하에서, 광주 사람들의 계속되는 악몽과 트라우마와 내면의 피 흘림에 대한 내 나름의 고찰이자 보고서이다. 즉 ‘오늘, 여기, 이 버림받은 도시의 풍경과 그 내면’을 내 눈으로 응시하고 기록하겠다는 열망의 결과물이다.

문학과지성사(1985)

봄날(전5권)

총 다섯권, 7500매 분량의 이 대하소설은 집필 기간만 꼬박 10년이 걸렸다. 한 사람의 목격자이자 작가로서 그날의 진상을 소설로 세상에 증언하겠다는, 나 자신과 신 앞에서 한 약속을 나는 17년 만에야 지킨 셈이다. 이 책에서 나는 80년 5월16일부터 27일, 항쟁의 전 기간을 다중시점과 다큐멘터리적 형식을 동원해 그려내고자 했다. 소설의 형식과 상상력을 빌려 그 열흘간의 총제적 진실을 모국어로 복원해내겠다는, 실로 거창하고 무모한 집념으로 완성한 작품이다.

문학과지성사(1997)

백년여관

우리 현대사의 비극적 사건들,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생에 남겨진 상처와 트라우마를 응시하고자 했다. 죽은 자와 산 자가 공존하는 환상적인 공간-‘영도’를 중심으로, 한 자리에 소환된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한국전쟁, 제주4·3사건, 베트남전쟁, 5·18광주민주화운동 등이 남긴 상흔 및 치유되지 않은 고통을 재확인한다. 이 소설은 ‘기억과 망각’에 대한 질문과 함께, 국가권력에 희생된 영혼들과 비극의 역사에 바치는 산 자들의 애도라고 불러도 좋겠다.

문학동네(2017, 초판 한겨레출판 2004)

이별하는 골짜기

별어곡.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우연히 마주친 조그만 간이역. ‘이별하는 골짜기’라는 애잔한 이름을 가진 그 조그만 역사의 지붕이 이 소설을 태어나게 했다. 이야기가 공간을 불러낸 게 아니라 장소가 이야기를 불러낸 경우라고 할까. 가을, 여름, 겨울, 봄. 간이역을 무대로, 엇갈린 사계절처럼 인물 네 사람의 각기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시인을 꿈꾸는 청년, 죄의식에 사로잡힌 늙은 역장, 치매를 앓는 위안부 노인, 카페 여주인. ‘기억과 망각’이라는 주제를 통해 등장인물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건 바로 그 낡은 역이다.

문학과지성사(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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