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가 아니라 ‘삶의 끈’... 비판하지 말고 들어주세요
[김경화 기자의 달콤쌉싸름]
저출산보다 자살이 더 큰 문제
‘생명의전화' 50년 하상훈 원장
3월. 만물이 깨어나는 봄이다. 희망으로 가슴이 부풀고 당장 박차고 튀어 나갈 것 같은 에너지가 꿈틀대는 것 같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 봄을 ‘가장 잔인한 계절’이라고 하는 역설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봄에는 자살이 늘어난다. 겨울보다 20~30% 정도 증가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세상에 꽃이 피고 활기가 돌 때 도리어 우울감이 커지는 사람들이 있는 것. 작년부터 꿈틀거린 자살 지표도 심상치 않다. 지난해 자살 사망자는 1만4439명. 2011년 이후 최고치다. 날마다 약 40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자살률 만년 1위. 오명(汚名)을 벗으려고 십 수년 노력했지만 사태는 더 악화됐다.
‘생명의전화’는 1976년부터 자살 위기에 놓인 사람들의 전화를 받아왔다. ‘잘 들어주면 살릴 수 있다’는 믿음은 곧 50년을 바라본다. 전국 어디서든 1588-9191번. 생명의전화 하상훈(65) 원장은 “우리 모두가 누군가의 상담자가 돼야 한다”고 말한다. “타인의 어려움과 고통을 충분히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것은 원래 우리가 항상 해오던 일이에요. 단절과 고립, 무관심에서 벗어나는 것, 다시 연결하고 살피고 관심을 두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봄꽃을 보며 세상을 등지는 사람들
자살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말하는 하 원장의 키워드는 분명했다. 연결, 연결, 연결. 전화선 끝에 있는 그 사람과 닿아야 한다.
-자살 공화국이라고 불러도 둔감해지는 것 같습니다.
“2011년쯤이 피크였어요. 자살자가 1만5000명에 달했습니다. 2012년 자살예방법을 만들어 정책을 실행하고 저희 같은 기관도 활동을 계속하니 그래도 자살자가 연간 2000명 정도 줄었어요. 그런데 코로나 때 정체돼 있던 수치가 지난해 다시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조짐이 너무 안 좋아요.”
-코로나 때 오히려 온 국민이 힘들지 않았나요.
“국가적 위기 상황에는 오히려 자살률이 높아지지 않아요. 모두가 위축되니 자살하려는 의지도 위축되는 거죠. 상황이 나아지면서 누적된 게 터져 나오는지 지난해 1만4000명을 넘어섰는데, 저는 아주 심각한 신호로 봅니다.”
-봄에 자살이 느는 것과 비슷하군요.
“그렇습니다. 겨울에 줄고 봄에 늘어나요. 이 계절에는 새 학기, 새 직장, 새로이 시작되는 게 많잖아요. 잘나가는 사람들은 더 잘나갑니다. 마음이 아픈 사람들은 비교하면서 더 우울해지고 힘들어지죠. 봄을 탄다는 말도 일리가 있어요.”
이런 현상을 ‘스프링 피크(spring peak)’라고 한다. 생물학적으로도 봄에는 일조량이 늘면서 ‘행복 물질’인 세로토닌 호르몬이 증가해 사람을 들뜨게 만든다고. “보통 사람들은 이런 변화에 잘 적응하지만, 우울감이 있는 사람들은 쉽게 적응이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생기는 불안감에 우울증이 심화하기도 하고요.”
-생명의전화도 바빠지겠네요.
“아무래도 그렇습니다. 1년에 1만건 정도 상담 전화가 걸려오는데 봄철에는 상담 내용 면에서 자살 비율이 더 높은 것 같아요. 서울에만 상담 봉사원 215명(2023년 기준)이 1년 365일 24시간 전화를 받습니다.”
호주에서 시작된 ‘생명의전화’는 1976년 9월 국내 최초의 전화 상담 기관으로 서울에서 개소했다. 첫날 217통이 걸려왔고, 누적 상담 전화는 백만 건이 넘는다. 현재 전국에 17개 센터가 운영 중이고, 전화 상담사들은 자체 교육을 받은 자원봉사자들이다. 하 원장도 1988년 자원봉사 상담자로 처음 ‘생명의전화’에 참여했다. 부천지부를 거쳐 2001년부터 원장을 맡고 있다.
-자살 상담에 뛰어든 계기가 있나요.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했는데 써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상담사를 모집한다는 신문 기사를 보고 참여했지요. 밤 당번을 주로 했는데, 내담자들이 마음을 고쳐 먹게 하고 변화되는 모습을 보면서 이 일을 계속하게 됐어요. 잠시 공무원 생활도 했지만 이 일로 돌아왔습니다. 자원봉사를 하다가 평생의 업이 된 거죠(웃음).”
-많은 사연을 마주하셨겠네요.
“하루에 평균 5~6통 받아요. 심각한 전화는 밤에 많이 옵니다. 몇 시간씩 붙들고 있는 경우도 많고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의 대화다. 상담자와 내담자는 관계를 지속하지 않는다. 일회성 상담이 원칙. 상담자가 상대방의 사연에 너무 깊이 빠져들지 않도록 한 것. 한 자살 고위험자가 이번 위기는 넘기고 나중에 다시 전화를 걸더라도 알기 어렵다. 2023년 기준 내담자의 37.1%는 연령 미상, 65.3%는 직업 불명이었다. 인적 사항을 캐묻지 않는 것이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상담이라면.
“30대 후반의 실직 남성이었어요. 은행 대출 만료가 다가오니 죽자 생각하고 전화를 했는데 1시간 넘게 통화를 하고 저에게 두 가지 약속을 했어요. 또 죽고 싶은 생각이 들면 다시 전화해라, 지금 나와 나눈 얘기를 아내와 해라. 약속을 하는 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오전 10시쯤이었다. 그런데 저녁 나절 다시 전화가 왔다. 공원에서 맥주 한 캔씩 사서 마시며 아내에게 고민을 털어놨고, 아내는 깜짝 놀라며 “당신 죽으면 나도 같이 죽는다” 했다고 한다. 부부가 부둥켜안고 울며 생각을 고쳐먹었다. “이런 상황을 상담사에게 알려주자며 다시 우리한테 전화를 했는데, 공교롭게 제가 또 받은 거예요. 일회성 상담이 원칙이고 전화는 랜덤으로 돌아가니 그럴 일이 거의 없거든요. 퇴근길에 발걸음이 날아갈 것만 같던 날이었습니다.”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
2011년 서울 마포대교를 시작으로 한강 교량 19곳과 강원도 춘천의 소양1교까지 총 20개 다리에 ‘SOS생명의전화’가 설치돼 있다. 2023년엔 368명이 모진 마음을 먹고 다리에 올랐다가 전화기를 들었고, 119 출동이 105번 이뤄졌다. 이 위기 상담 전화가 가장 많은 곳은 마포대교(93건), 양화대교(49건), 원효·한강대교(각 20건) 순.
-한강 다리에 오른 사람은 정말 죽기 일보 직전인 거잖아요.
“저도 처음에는 과연 여기에서 전화가 올까, 어느 정도 올까 싶었어요. 그런데 지금까지 1만건 정도 전화 상담이 이뤄졌고, 투신 직전인 사람 2100여 명을 119가 구조해 냈습니다.”
-최후의 순간에도 대화가 필요한 거군요.
“사람들이 절망하는 건 단 한 통의 전화를 할 수 없는 순간이에요. 인천에서부터 걸어와서 전화기를 든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절박한 이야기를 누군가는 들어줘야 해요. 콘크리트에 갇힌 채 숨도 못 쉬는 사람이 많아요. 구멍을 뚫어주고, 숨 쉴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해 줘야 합니다.”
인천의 학생처럼, 다리에서 전화를 건 내담자들의 연령대에서는 10~20대가 31.3%로 가장 많았다. 하 원장은 “처음 상담을 시작한 1988년과 비교해 10~20대 자살 고위험자가 늘어난 것이 가장 가슴 아프다”고 했다. 한국인 10~30대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이다.
-어떤 현상들이 보입니까.
“생명을 너무 가벼이 여기는 것 같아요. 청소년 상담 내용을 보면 ‘아니 이런 문제로 죽으려고 하나’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동생과 비교당해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 같으니 죽겠다는 거예요. 관계에서 비롯되는 문제가 많은데 곧장 자해·자살로 너무 극단적으로 갑니다.”
-청소년 자살은 왜 늘어나나요.
“20대는 고립·은둔 청년이 많습니다. 너무 안타까워요. 왜 그 아이들이 고립·은둔해야 합니까. 미래가 암담하다는 거예요. 취직도 어렵고, 좋은 직장이 아니면 명함도 못 내밀고. 우리 사회가 평가를 너무 많이 해요. 80% 이상은 대기업이나 선호 직업이 아닌 일을 하며 사는데 박탈감이 너무 큰 거죠. 이렇게 살아봐야 무엇 하나, 마음의 문을 아예 닫아 놓는 경우도 적지 않아요. 주식·도박에 잘못 손대서 궁지에 몰린 경우도 있고요.”
-최근의 특징이라면.
“청소년을 위한 사이버 상담 채널을 개설했는데 상담이 폭주합니다. 초등학생 내담자가 많아지면서 열한 살, 열 살도 입장하고 있어요.”
-자살률은 1위이고, 출산율은 최하위죠.
“스스로 목숨을 끊는 10~20대가 연간 1700~1800명에 달해요. 절대 적은 숫자가 아닙니다. 자살률과 출산율은 직결된 문제예요. 저출생을 막는 데 정책과 예산을 쏟아붓는 만큼 자살을 줄이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이미 태어난 아이들에게 살아갈 의지·동기를 주지 못한다는 게 더 심각한 일 아닌가요? 아이들이 잘 살 수 있게 도와주고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 원장은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자살하려는 사람은 정말 죽고 싶어 한다’ ‘자살하려는 마음은 바꿀 수 없다’는 게 대표적 오해와 편견이라고 했다. “누구나 양가감정이 있어요. 죽고 싶은 마음과 살고 싶은 마음이 시소게임을 하듯이 왔다 갔다 하는 겁니다. 죽고 싶은 마음을 아무 비판 없이 있는 그대로 수용하면서 들어주는 게 중요합니다. 부정적인 정서들이 빠져나가고 나면 살고 싶은 마음이 저 뒤에 있다가 등장합니다.”
-살면서 자살을 고민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을까요.
“지금은 죽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지만 갑작스럽게 큰 역경을 마주하면 그게 생길 수도 있어요. 말하자면 살고 싶은 마음이 전경이고, 죽고 싶은 마음은 저 아래 깊숙이 있는 배경이죠. 누구에게나 죽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다 있어요. 상담하다가 그 ‘삶의 끈’이 등장하면 꼭 붙잡아야 합니다. 해결 방법을 같이 고민하고 끝까지 돕겠다고 약속하고. 그 방법뿐이에요.”
◇자살도 전염된다
공동체를 복원하는 것, 서로 들여다보고 안부를 묻는 것, 마음에 가둔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관심을 좀 갖는 것만으로도 자살을 막을 수 있을까. 하 원장은 “나는 ‘연결’이 해결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며 “실제로 작은 성공들을 이뤄낸 경험을 갖고 있다”고 했다.
-어떤 경험인가요.
“우리가 성북구 자살예방센터를 위탁 운영하는데, ‘마음 돌보미’라는 걸 만들었습니다. 성북구 20개 동(洞)마다 마음 돌보미를 뽑아 자원봉사 교육을 시키고, 독거노인 300~400명을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가 들여다보며 이야기를 들어줬어요. 서로 소통하고 이야기하는 통로를 만들어주니 노인 자살률이 현저히 줄었습니다.”
-한 동네에서 실험을 한 거군요.
“2022년 기준 성북구 자살률(10만명당 자살 수)은 18.3명으로 전년(24.5명) 대비 25.3% 감소했어요. 서울시 25구 중 다섯째로 높던 자살률이 2023년 16위로 떨어졌습니다. 변동은 있지만 확실한 감소 추세예요.”
-관심만 가지면 전국으로 확대될 수 있겠네요.
“한국 복지 시스템이 잘돼 있어요. 전국에 노인, 장애인, 종합 사회복지관 등 복지관이 1000곳도 넘을 겁니다. 경로당까지 포함해 협업하고, 평범한 마을 사람들을 서로 연결하면 돼요. 한 할머니를 통합 관리한 사례가 있는데, 이분을 도우려고 주민센터, 복지관, 자살 예방 센터, 정신 건강 복지 센터, 교회, 성당 등에서 모였어요. 보건소는 우울증 치료를, 성당과 복지관은 식사를, 주민센터는 주거를 각각 맡으며 종합 접근이 가능했습니다.”
한 사람이 자살하면 최소 6명 이상이 심한 정신적 충격,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게 된다. 그 고통은 거의 평생을 간다. 또 다른 자살 고위험자를 낳으며 자살이 전염되는 셈이다. 생명의전화는 자살자 유족 모임 공간인 ‘새움’을 운영하는데, 하 원장이 직접 유족 치료 프로그램을 담당한다. “유족들이야말로 가장 큰 피해자예요. 자녀를 잃은 부모는 ‘핵폭탄을 맞은 느낌’이라고 합니다. 사회적 낙인이 심하고, 자살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수치심·우울감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어요.”
-유족 관리가 자살 예방과 직결되겠네요.
“지난해에 1만4000여 명이 자살했으니 적어도 8만명의 유족이 생겼습니다. 어떤 상실은 극복하는 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하지요. 지난 10년간 발생한 최소 70만~80만명의 유족, 그들의 삶의 질은 어떨까요. 자살 고위험자들을 끝까지 추적해 도와줘야 합니다.”
-연예인 자살 이후 모방이 이어지기도 합니다.
“유명한 사람의 죽음은 많은 사람이 주목하고 기억합니다. PTSD를 겪는 사람이 훨씬 많을 수 있죠. 그런데 그 자살이 사회적으로 지지를 받거나 미화되거나 동정을 받으면 동기가 생깁니다. 사회적 분위기로 자살이 재생산되지 않도록 모두가 주의해야 합니다.”
-자살 공화국 오명, 벗을 수 있을까요.
“저도 답답합니다. 지금 자살 정책은 상류에서 투신해 떠내려온 사람들을 하류에서 건져내는 식이에요. 왜 투신했는지는 모르는 겁니다. 상류에서부터 물에 빠지지 않도록 막는 방법, 그걸 찾아야 해요.”
-그 핵심이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공동체가 단절되고 분열되면서 각자 정신적·경제적으로 여러 문제가 생겨요. 우리 사회가 이 충격들을 완화하는 에어 매트를 깔아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현재 책을 집필 중이라면서요.
“제목이 ‘당신은 누군가의 상담자입니다’예요. 서로에게 무관심한 사회가 된 게 자살의 가장 큰 배경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연대성, 친밀감, 공감이 다 뚝뚝 끊어져 있어요. 사실 상담이라는 게 특별한 게 아니에요. 반드시 전문가가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요. 친구끼리, 가족끼리, 이웃끼리, 동료끼리 서로 속 이야기를 꺼내고 들어주면 됩니다.”
-일상에서 어떻게 가족과 이웃을 도울 수 있을까요.
“분명 ‘도움을 찾는 울음(Cry for help)’이 있습니다. 부정적 얘기를 계속하고, 잠을 못 잔다거나, 유서를 쓴다거나. 그럼 관심을 가져주세요. 상담(相談)을 풀이하면 서로 대화로 화를 풀어준다는 뜻입니다. 사회적 기대와 현실의 괴리감이 클수록 사람은 화가 나요. 이 갭을 좁혀주는 게 중요해요. A가 아니라면 B, C, D, E 등 선택지가 많다는 걸 알려주세요. 혼자 단정적 생각을 하지 않도록 대화로 대안을 찾아가 보는 겁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전화선 저 끝에서는 누군가가 조난신호(SOS)를 보낼까 말까 망설이고 있을 것이다. 다행히 전화벨이 울렸다. 담담한 목소리로 상담사가 응답했다. “네, 생명의전화입니다. 어떤 일로 전화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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