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윤석열의 내란, 검찰의 내란
법원이 내란 우두머리 혐의자 윤석열에 대한 구속취소를 결정하고, 검찰이 ‘즉시항고’를 포기한 사건의 여파가 커지고 있다. 지난 12일, 천대엽 법원행정처장은 국회에 나와 “(검찰이) 즉시항고로 상급심의 판단을 받아볼 필요가 있다”, “법원의 결정은 상급심에서 번복될 때까지 존중되는 것이 법치주의의 근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해석하면, ‘검찰이 법치주의의 근본도 안 지켰다’는 말이었다. 그래서일까. 많은 사람들은 이번 사건을 ‘검찰발 내란’, 줄여 ‘검란’이라 부른다.
검찰의 ‘윤석열 내란 수사’를 믿지 못하는 네 가지 이유
12·3 내란이 벌어진 뒤 검찰의 움직임을 쭉 지켜봤다. 나는 내란 초기엔 “검찰은 윤석열 내란 수사에서 손을 떼라”고 주장했다. 4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 검사 출신 대통령에 대한 수사, 그것도 내란죄 수사를 대통령의 친정인 검찰이 맡아선 안 된다고 봤다. 이해충돌, 비상식에 대한 우려였다. 검찰의 고질병인 ‘내 식구 감싸기’를 걱정했다.
둘째, ‘윤석열 검찰’ ‘윤석열 사단’을 믿을 수 없었다. 윤석열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검찰 수뇌부에 대한 불신이었다. 증거가 차고 넘치는 김건희 의혹에 눈감은 검찰을 도무지 신뢰할 수 없었다. 윤석열의 심기 경호를 위해 언론탄압도 불사했던 ‘윤석열 검찰’이 ‘윤석열 내란’을 제대로 수사할 것 같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든 사달이 날 거라고 봤다.
셋째, 검찰개혁 좌초가 걱정됐다. 윤석열에 대한 처벌이 끝난 뒤, 필연적으로 따라올 검찰개혁이 미궁에 빠질 지 모른다는 우려였다. 노무현 정부의 검찰개혁 열망을 ‘대선자금 수사’로 돌파하고 결국 노무현을 사지(死地)로 몰았던 16년 전 검찰, 문재인 정부의 검찰개혁 열망을 ‘적폐 수사’로 돌파하고 오히려 몸집을 키웠던 8년 전 검찰을 떠올렸다. 검찰이 윤석열을 전리품 삼아 또다시 개혁의 주체로 나설까 조마조마했다.
넷째, 수사권에 대한 걱정도 있었다. 자칫 수사권도 없는 검찰이 수사에 나섰다 공소기각이라도 되면 어쩌나 싶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설명한다.
살아 남기 위한…검찰의 다단계 내란
우려는 현실이 됐다. 우려했던 상황은 12·3 내란 이후 세 달간 최소 3번 반복됐다. 세 번에 걸친 ‘다단계 검란’, 다단계 ‘검찰 내란’이었다. 난 그렇게 봤다.
첫번째 검란은 12·3 내란 직후 있었다. 내란이 벌어지고 2일 만에 검찰이 수사에 뛰어든 일이다. 검찰은 과감하고 신속했다. 검찰의 수사 착수 결정이 알려진 건 지난해 12월 5일 오후 5시 25분 한국일보 보도를 통해서였다. 전날인 4일 오후, 심우정 검찰총장이 서울중앙지검 공공수사 1부에 사건을 배당하고 수사 착수 검토를 지시하면서 이미 수사에 뛰어들기로 마음먹었다는 내용이었다.
검찰은 이튿날인 6일 특별수사본부(특수본)를 차리고 본격 수사에 나섰다. 박세현 서울고검장이 본부장을 맡고, 김종우 서울남부지검 2차장, 이찬규 서울중앙지검 공공수사1부장, 최순호 서울중앙지검 형사3부장 등이 투입됐다. 이후 검찰 특수본에는 군검찰이 합류했다.
내란 초기 검찰이 수사 착수 여부를 두고 하루가 넘게 미적거린 건, 다름 아닌 수사 권한 문제 때문이었다. 내란죄 수사권이 명시적으로는 경찰에만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서였다. 검찰은 내란 수사에 뛰어들면서 검찰청법 시행령을 근거로 들고 나왔다. 시행령에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에 대한 수사권이 있는데, 관련 범죄로 내란죄를 수사할 권한이 있다는 논리였다. 참고로, 윤석열 정부 출범 직후 야당인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개정된 검찰청법은 검찰의 수사개시 권한을 부패범죄와 경제범죄로 한정한다. 내란죄에 대한 수사권은 기본적으로 경찰에만 있다. 검찰이 내란죄 수사에 뛰어든 실오라기같은 단서인 검찰청법 시행령은 한동훈 법무부장관 시절 개정된 것이었다.
수사에 뛰어든 검찰은 앞뒤 가리지 않고 경찰과 주도권 싸움을 하기에 바빴다. 사사건건 경찰 수사를 방해했다. 방첩사와 특전사에 대한 압수수색이 대표적인 사례다. 경찰이 청구한 압수수색 영장을 기각한 검찰이 다음 날 자기들 영장으로 압수수색에 나선 것이다. 누가 봐도 경찰 수사를 방해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참고로, 영장청구권은 검사에게만 있다. 헌법에 그렇게 되어 있다.
뒷북에 불과한 소리지만, 검찰은 윤석열 내란 수사에 나서지 말아야 했다. 그래야 지금같은 소동, ‘검사 출신 대통령 봐주기’ 같은 오해도 없었을 것이다. 검찰의 ‘윤석열 내란 수사’는 그 자체로 검란이 아닐 수 없었다.
검찰 수사에 판 깔아준 진보단체들
이 대목에서 꼭 짚고 넘어갈 게 있다. 검찰 수사에 판을 깔아준 게 누구였는가 하는 점이다.
내란 발생 초기 경찰 검찰 공수처는 모두, 늘상 그래왔듯이, 수사 착수 배경으로 ‘고발장’을 들고 나왔다. 수사를 요구하는 고발장이 들어와 수사를 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였다. 그럼 당시 검찰에 ‘윤석열 내란’을 수사해 달라고 요구한 사람들과 단체는 어디였을까.
내란 다음날인 4일, 조국혁신당과 개혁신당이 제일 먼저 ‘윤석열 내란’을 수사해 달라는 고발장을 경찰과 검찰에 동시에 낸다는 입장을 밝혔다. 개혁신당은 약속대로 했고, 조국혁신당은 다음날 경찰에만 내는 걸로 입장을 바꿨다. 이후 조국혁신당은 “검찰은 윤석열 내란 사건에서 손떼라”고 주장했다.
원외 진보정당인 노동당·녹색당·정의당도 내란 다음날(12월 4일) 검찰에 윤 대통령, 김용현 국방부장관 등에 대한 내란 혐의 고소장을 냈다. 시민단체인 민생경제연구소와 검사를 검사하는 변호사모임, 온라인 매체 서울의소리도 같은 날 윤 대통령과 김용현 국방부 장관 등에 대한 고발장을 검찰, 경찰, 공수처에 무더기로 냈다. 시민단체인 서민민생대책위원회도 같은 내용의 고발장을 검찰에 냈다.
문제는 이렇게 내란 직후 검찰에 수사를 촉구하는 고발(고소)장을 냈던 단체, 특히 진보단체들이 지금은 내란죄에 대한 검찰 수사권을 문제삼고 있다는 점이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검찰의 경찰 압수수색…두 번째 검란
두 번째 검란은 지난해 12월 19일 벌어졌다. 검찰이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수사권을 공수처로 이관한 다음날, 느닷없이 검찰 특수본이 내란죄 수사 주체인 경찰 국가수사본부(국수본)에 대한 강제수사에 착수했다. 우종수 국수본부장 등 경찰 간부 여러 명을 압수수색했다. ‘정치인 체포조’ 관련 의혹을 수사한다는 명목이었다. 윤석열 대통령 지시로 방첩사와 경찰청 등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 등 유력 정치인 체포를 시도했는데, 그 과정에서 우종수 본부장 등 국수본 관계자들과 군 조사본부가 조직적으로 관여한 정황이 있다는 이유였다. 검찰은 압수수색에 나서며 무슨 대단한 혐의가 확인된 양 떠들었다. 하지만 눈 밝은 사람들은 대부분 ‘수사의 주도권을 쥐기 위한 검찰의 도발’로 인식했다.
검찰의 경찰 수사 단서는 경찰 관계자의 진술이었다고 전해진다. 방첩사에서 내려온 체포 대상 정치인 명단과 강력계 경찰 동원 사실을 우종수 본부장에게 알렸다는 진술이었다고 한다. 증언 외 다른 증거는 없었다고 한다.
아주 시끄럽게 진행됐지만, 우종수 본부장이 연루됐다는 ‘정치인 체포조’ 관련 의혹 수사는 세 달이 다 되도록 감감무소식이다. 검찰은 수사결과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수사가 어떻게 진행됐는지 아는 사람도, 궁금해 하는 사람도 없다.
검찰의 경찰 수사는 형평성 차원에서도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검찰 특수본이 검찰의 내란 관련 의혹에 대해서는 아예 수사를 하지 않아서다.
윤석열 내란에 검찰이 어떤 식으로든 관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은 크게 2가지가 나와 있다. 첫째는 선관위를 쳐 들어간 방첩사 계엄군의 진술이다. 복수의 방첩사 요원들은 계엄 당일 정성우 방첩사 1처장으로부터 “선관위에 검찰과 국정원이 갈테니 지원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진술했다. 여인형 방첩사령관→정성우 방첩사 1처장→방첩사 요원으로 이어진 지시라는 것이다.
하지만 검찰은 수사에 나서지 않았다. 검찰은 내란 혐의자들의 공소장에 이 대목을 기재하며 ‘검찰’을 ‘민간수사기관’으로 바꿔 기재하는 꼼수도 부렸다.
대통령 안가 회동…서로 다른 진술
둘째, 검찰은 검찰청을 책임지는 박성재 법무장관을 둘러싼 의혹에도 눈감았다. 내란 이튿날인 12월 4일, 박성재 법무장관이 역시 내란 세력으로 의심받는 이상민 전 행정안전부장관, 김주현 민정수석, 이완규 법제처장과 대통령 안가에서 회동하고, 다음 날 멤버 대부분이 입을 맞춘 듯 휴대폰을 교체한 사실이 드러났다. 증거인멸이 의심되는 일이었지만, 검찰은 수사하지 않았다. 덮기에 급급했다.
더 이상한 건 내란 이튿날 안가 회동이 어떻게 만들어진 자리였느냐 하는 문제다. 참석자들의 주장이 서로 다르다. 박성재 법무장관은 이 사실이 처음 알려진 뒤 국회에 나와 “오래 전 약속된 망년회 성격의 모임”이라고 했다. “미리 약속된 모임이라 누가 연락해 장소를 알려줬는지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는 취지로 답했다. 하지만 한참 뒤인 1월 22일 김주현 민정수석은 국회에서 다른 말을 했다. “당일 오후 이상민 장관이 예정에 없이 연락해 와 모임이 급조됐다”는 취지였다. 대통령 안가를 모임 장소로 정하고 예약한 사람은 김주현 본인이라고 했다.
“오래 전 약속된 모임”과 “당일 오후에 급조된 모임”. 절대 병립할 수 없는 두 주장이 부딪힌다. 하지만 검찰은 뭐가 진실인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다른 이슈에 빠진 국회도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참고로, 안가 회동에 참석한 4명은 모두 윤석열의 최측근(김주현 민정수석, 박성재 법무장관)이거나 최측근이면서 고등학교 후배(이상민 행안장관)거나 대학 때부터 가까운 친구(이완규 법제처장)였다. 또 모두 윤석열 대통령이 임명했고 법을 다루는 사람들이었다.
심우정의 ‘윤석열 풀어주기’...검찰의 세번째 내란
세 번째 검란, ‘검찰 내란’의 백미는 지난 9일 벌어졌다. 법원이 몇 가지 절차상 문제를 이유로 내란 우두머리 혐의자인 윤석열에 대한 구속취소를 결정하자, 기다렸다는 듯 심우정 검찰총장은 법으로 허용된, 관행적으로 검찰이 해 온 ‘즉시항고’를 하지 않고 윤석열을 풀어줬다. 윤석열은 개선장군처럼 구속 수감되어 있던 서울구치소를 빠져 나갔다. 자신을 지지하는 일부 극렬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고개를 숙이는 기행을 선보여 공분을 샀다. 상식이 무너지고, 민심이 쪼개지는 비현실적 상황이었다.
윤석열을 내란 혐의로 재판에 넘긴 검찰 특수본은 길길이 뛰며 ‘윤석열 석방’에 반대했다고 한다. ‘즉시항고’ 해야 한다는 수사팀의 의견을 심우정 검찰총장과 몇몇 대검찰청 간부들이 막아섰다는 말도 들린다. 모두 윤석열 정부 들어 영전해 그 자리에 간 사람들이다. ‘검란’이란 말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지난 11일 국회에서 열린 법사위 상임위에서 천대엽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은 “검찰이 즉시항고를 해서 판단을 다시 받았어야 했다”고 발언했다. 검찰의 즉시항고 포기, 그로 인한 윤석열 석방이 잘못이라는 취지다. 사람을 잡아들이는 일을 업으로 하는 검찰이 포기한 일을 대법관이 나서 다시 하라고 하는 기이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검찰은 판단을 바꾸지 않았다.
‘윤석열 내란’과 관련, 앞으로 검찰이 또 얼마나 많은 ‘검란’을 일으킬 지 알 수 없다. 걱정이 늘어난다. 나는 사건 초기부터 “검찰은 윤석열 내란 사건에서 손을 떼라”고 외쳤던지라 자괴감과 분노가 더 크다. 맥없이 ‘검란’을 지켜봐야 하는 현실이 괴롭다.
‘윤석열 내란’, ‘검찰 내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뉴스타파 한상진 greenfish@newstap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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