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verseas Trip]산유국 브루나이, 석유는 무엇을 변화시켰는가
2개로 나뉜 영토...수도 가려면 여권 도장 여러 번 찍어야
석유 발견과 동시에 쇠퇴한 수상마을, 캄퐁 아예르
애당초 보르네오섬 서부 여행의 주요 목적지는 브루나이였다. 정식 국명은 ‘브루나이 다루살람’. 면적이 경기도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매우 작은 나라지만 1929년 석유의 발견과 함께 오늘날 산유국으로서 동남아시아 최고 부국으로 손꼽힌다. 오일의 역사가 곧 국가의 역사를 좌지우지하는 핵심 키워드로 우뚝 선 브루나이, 이곳 수도인 반다르세리베가완의 도심 한가운데에서 그 역사를 살폈다.
“Passport! Passport!”를 재차 반복해 말하는 버스기사의 외침에 단잠에서 후다닥 눈을 떴다. 여권 검사를 위해 잠시 정차한다는 뉘앙스 같았다. 그렇다면 벌써 국경에 도착했다는 건가 싶은 생각과 동시에 시계를 확인해보니 이제 막 10시를 넘겼다. 코타키나발루 시내 버스터미널에서 브루나이행 버스가 출발한 시간은 아침 7시 30분. 국경까지는 두 시간 더 이동해야 한다. 뭔가 계산이 맞지 않다. 지도를 보니 내 위치를 표시하는 파란 점이 여전히 말레이시아 영토에 있다. 버스가 아직 국경에 도착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일단 운전기사의 안내에 따라 검문소 창구에서 여권 심사를 받았다. 외국인은 물론 말레이시아 현지인까지 승객 전원이 차례로 이를 수행했다. 수속을 마치고 건네 받은 여권에는 ‘사라왁(Sarawak)’이라고 적힌 도장이 찍혀 있었다. 동말레이시아를 구성하는 사바주와 사라왁주는 같은 영토를 공유하는 한 나라지만 1963년 말레이시아 협정에 따라 자체적으로 관할하는 별도의 토지법을 운영하고 있다. 이로 인해 외국인을 포함해 말레이시아 시민 모두 사바주와 사라왁주 통행 시 반드시 여권이나 신분증을 제시하고 확인을 반드시 받아야 한다. 대한민국 영토로 비유하자면 전라도와 경상도를 오갈 때마다 전 국민이 허가증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2개로 나뉜 이러한 브루나이의 지리적 특징은 결과적으로 여행자에겐 꽤 독특한 경험으로 나타났다. 이를 직접 경험하겠다고 코타키나발루에서 비행기가 아닌 브루나이행 버스를 선택한 이유기도 했다. 브루나이행 버스의 종착지인 반다르세리베가완까지 가려면 사바주와 사라왁주 그리고 브루나이 이민국 검문소를 총 8번 거쳐야 한다. 그러니까 하루 동안 여권에 8개의 도장이 찍힌다는 얘기다. 브루나이 영토가 둘로 나눠져 있어 사라왁주에서 브루나이로 국경을 넘은 뒤 다시 또 사라왁주로 국경을 넘고, 그 다음 다시 브루나이로 이동하는 식이다. 두어 번 검문소를 거치고 나서부터 운전기사의 “Passport”라는 외침은 자연스레 사라졌고, 버스가 멈춰서면 모든 승객이 스스로 여권을 챙겨 하나둘 이민국 사무소 창구 앞에 줄을 섰다.
동남아 유일의 전제군주제… 국민을 위한 국왕의 나라
브루나이의 정식 국명은 ‘브루나이 다루살람’이다. 면적은 5,765㎢로 경기도의 절반 정도의 작은 나라다. 동남아시아 유일의 전제군주제 국가로서 아직까지 술탄인 하사날 볼키아(Hassanal Bolkiah)가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 브루나이의 현실이다. 그의 재위기간은 1967년부터 시작돼 58년째 이어지고 있다. 국왕인 데다 국법에 따라 총리, 국방장관, 외교장관, 재무장관까지 겸임하고 있는 그는 브루나이 다루살람대학교의 총장도 맡고 있다. 이 국립대학은 브루나이 최초의 대학이자 하나뿐인 교육시설이다. 오랜 기간 술탄의 힘이 강력한 데에는 그의 정치적 행보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브루나이의 탄탄한 사회보장제도와는 달리 외국인 관광객을 끌어들일 만한 관광자원이나 인프라는 사실 많이 부족한 상황이다. 반다르세리베가완에 도착한 첫날, 저녁을 먹기 위해 들른 식당에서 메뉴를 보곤 먼저 가격에 놀랐다. 말레이시아에서 먹던 음식 종류와 별반 다를 바 없었지만 가격은 2~3배가 넘었기 때문. 호텔을 예약했을 때도 이와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 코타키나발루와 비교하면 호텔의 수나 퀄리티, 비용 면에서 확실한 차이를 보였는데, 막상 실제 체크인을 한 호텔 룸은 예약 앱 사진에서 보던 것보다 시설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3배 이상 비쌌다. 수요가 많을수록 경쟁이 넘쳐나니 공급 비용은 감소하기 마련이다.
오일의 역사가 곧 국가의 역사가 된 나라
브루나이에서 첫 번째 시추가 시작된 건 1899년의 일이다. 반다르세리베가완에서 남쪽으로 약 10km 떨어져 있는 카삿(Kasat) 마을이 최초 석유 누출이 보고된 장소였다. 하지만 채굴 결과는 실패로 돌아갔다. 시추공이 250m 깊이까지 내려갔지만 석유가 발견되지 않았던 것. 그럼에도 브루나이가 가진 산유국의 꿈은 쉬이 꺾이지 않았고, 1913년 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석유 탐사가 재개되었다. 부킷 푸안(Bukit Puan)에서 시작되어 1923년 투통(Tutong)으로 옮겨갔고, 마침내 1929년 세리아(Seria)에서 석유 채굴이 이뤄졌다. 16년간의 기나긴 노력이 드디어 결실을 맺은 것. 당시 영국의 지배 하에 있던 브루나이는 석유 발견으로 인해 하루 아침에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라는 타이틀을 보장받기에 이르렀다.
가난했던 술탄국의 입지를 한방에 바꿔놓은 오일의 역사, 그 기록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장소가 반다르세리베가완 도심 정중앙에 위치해 있다. 브루나이 석유 및 가스 산업 박물관이라 일컬어지는 ‘브루나이 에너지 허브 데르마가 디라자(Brunei Energy Hub Dermaga Diraja)’가 바로 그곳. 브루나이강 부두가에 자리한 이 건축물은 1950년대 브루나이에서 가장 오래된 정부기관 중 하나인 왕립 세관 및 소비세 건물로 사용되어왔다. 1998년 이곳 정부기관이 새로운 위치로 이전하면서 국립 미술관, 카페 등으로 활용되었는데, 현재의 석유 및 가스 박물관으로 바뀐 건 2021년부터다. 건물 전체에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거쳐 2022년 10월 국왕의 공식적인 발표와 함께 성대하게 문을 열었고, 현재 브루나이를 대표하는 역사박물관이 되었다.
수상마을의 삶은 여전히 흐른다
이번 브루나이 여행을 계획한 건 어느 날 우연히 본 한 다큐멘터리의 영향 때문이었다. 동남아시아 최고 부국, 동남아시아 유일의 전제군주제 국가, 산유국이라는 명성 등 브루나이를 수식하는 여러 화려한 문장과 그다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강 위에 마을 풍경에 시선을 사로잡혀 버렸던 것이다. 흡사 빈민가처럼 보이는 수상 가옥촌, 기다란 나무배를 타고 도심과 마을을 오가는 사람들의 출퇴근 모습이 꽤 인상적이었는데, 타임머신을 타고 한 세기 전으로 회귀하는 것 같은 느낌을 자아냈다. 역사적으로 ‘동양의 베니스’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던 이 마을은 독특하게도 반다르세리베가완 도심의 한가운데, 서울로 치자면 한강뷰 아파트 위치쯤 되는 노른자 땅에 조성되어 있다. 마을의 명칭은 ‘캄퐁 아예르(Kampong Ayer)’, 영어로는 ‘워터 빌리지(Water Village)’라 불린다.
캄퐁 아예르가 세계적으로 알려진 시기는 1521년 마젤란 탐험대의 일원으로 부르나이를 방문한 이탈리아 탐험가 안토니오 피가페타(Antonio Pigafetta)의 기록을 통해서다. 그가 이곳을 다녀간 뒤 남긴 기록에 따르면 높은 기둥 위에 나무로 지어진 가옥에는 약 2만 5,000가구가 거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양의 베니스’라는 별칭도 이곳 마을 풍경에 감탄한 그가 붙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과거의 명성은 사라진 지 오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브루나이인에게 캄퐁 아예르는 국가의 초석, 심장과도 같은 곳으로 인식된다.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은 허름한 나무 판자길을 돌아다니며 산책하는 것이 캄퐁 아예르에서 할 수 있는 최대 즐길 거리다. 옛날 옛적 은세공과 금세공, 고급 천 짜기, 보트 제작과 같은 전통 산업의 중심지로서의 흔적은 이제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여전히 이 마을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주민들이 자신의 터를 가꾸며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라는 것. 이 두가지만으로 깊은 인상을 받기에 충분하다.
[글과 사진 추효정(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971호(25.03.18) 기사입니다]
Copyright © 시티라이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