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VIBE] 신종근의 'K-리큐르' 이야기…한국판 포트와인, 과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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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하주(過夏酒)를 글자 그대로 뜻풀이하면 '여름을 지낼 수 있는 술'이다. 재미있는 것은 여름을 지내는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술이다.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술(막걸리, 약주, 청주)은 발효주로 여름에 변질이 쉬운 술이다. 그래서 우리 조상은 고민과 연구 끝에 과하주를 만들어 내게 된다.
과하주는 약주(청주)를 베이스로 알코올도수가 높은 소주(증류주)를 첨가해 여름을 지낼 수 있도록 했다. '주정 강화'를 한 술이라 할 수 있다.
알코올도수가 높아지면 술맛을 변질시키는 효모의 활동을 중단시킬 수 있고 그러면 더 이상 발효가 되지 않아 변질이 안 되는 것이다.
서양에도 마찬가지의 목적으로 주정 강화를 한 술이 있다. 중세 시대 영국인은 와인을 많이 사랑했지만, 백년전쟁에서 프랑스에 패하고 보르도 지역을 빼앗겨 교역이 중단돼 프랑스에서 와인을 제대로 수입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영국의 와인 수입상은 대체지역으로 그나마 영국에서 가까운 포르투갈 북부지역 도루(Douro)강 주변의 와인 산지를 발견했다.
하지만 험한 뱃길과 무더운 날씨로 영국으로 운송하는 도중 와인이 변질되곤 했다. 그래서 그 해결 방법을 연구한 결과 와인에 브랜디를 첨가하여 와인의 발효를 중단시키면 변질되지 않음을 알게 됐다. 이것이 포트와인이다.
과정이 달랐지만, 여름 더위로부터 술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라는 점은 포트와인과 과하주는 같은 맥락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조선 초기에 과하주가 시작된 것으로 보이지만 고려시대에도 과하주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시대부터 과하주는 신분과 손님에 대한 예우 정도 등을 보여주는 일종의 보여주기 위한 과시용의 술이었다. 사실상 사치와 향락의 술이라 궁중이나 상류층의 연회장에서 널리 쓰였다. 특별한 손님에 대한 접대 용도였고 문인의 풍류를 돋우며 그 유대를 강화하는 용도로도 쓰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 당시는 청주도, 소주도 귀한 술이었다.
조선 태종실록에 보면 1418년 태종이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를 여름 전에 할지, 여름이 지나고 할지에 대해 신하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대목이 나온다. 여러 신하가 과하주를 빚을 시기에 천도하면 과하주를 못 먹을까 봐 천도를 여름 후에 하자고 했다고 한다.
실록에는 태종이 한양에서도 과하주를 빚을 수 있으니 못 먹을 걱정 하지 말라 해서 여름 전에 천도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우리 조상은 이처럼 과하주를 아주 좋아했다.
과하주는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도 등장한다. 일기에 과하주, 추로주(秋露酒), 소주(燒酒) 등 3가지의 술이 나오는데 그중 과하주 이야기가 90여차례 언급되면서 장군과 병사들이 즐겼다는 기록도 있다.
1544년 '계미서'라는 문헌에도 과하주가 나오지만 주방문(레시피)에 소주 첨가 관련 이야기는 없었고 1600년도 초반의 '주찬방'에 약주에 소주를 첨가한다는 내용이 최초로 나왔다.
이후 1670년에 쓰인 한글 요리책인 '음식디미방'에 자세한 과하주 만드는 법이 기록돼있다.
과하주가 서양의 주정강화 와인인 포트와인보다 '문헌상'으로 100년 정도 빠르다고 하지만 실제로 포트와인은 문헌에 기록된 시기보다 일찍 개발됐다는 주장도 있다.
누가 빠르고를 떠나서 우리 조상도 일찌감치 그쪽 방면으로 관심이 많았다는 결론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김천의 과하주가 유명하다. 김천시 남산동 지게마을 서쪽에 '과하천'이라는 샘물로 술을 빚으면 여름에 잘 상하지 않는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이 물을 먹고 자기 고향인 금릉(金陵)의 과하주천의 물맛과 같다고 칭송한대서 이 샘을 과하천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당시에는 술을 다 빚은 후 바로 걸러낸 술을 '약주 과하주'라 부르고, 남은 지게미에 소주를 부어 재차 걸러낸 술을 과하주라 했다. 이 방식은 현대의 일반적인 과하주와는 그 빚는 법이 다르다.
약주 과하주는 알코올 16%, 소주가 들어간 과하주는 알코올 23%이다.
일제강점기 때 수많은 전통주가 사라졌지만, 김천 과하주만은 전통 양조방식을 보존했고 일본도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1935년에 만든 '조선주조사' 책에도 1928년 세워진 김천 주조주식회사와 거기서 만든 과하주에 대해 자세한 기록이 나와 있다. 1938년의 '주조독본'(酒造讀本)에서도 과하주의 제조 방법을 상세히 기술했다.
하지만 1940년대 일제의 쌀 수탈로 결국은 생산이 중단됐다. 이후 잊혔던 김천 과하주는 제2대 김천문화원장을 지낸 치과의사 출신 송재성 원장이 김천주조에서 근무했던 조무성 씨와 함께 숱한 시행착오 끝에 1986년 완벽하게 복원됐다.
그리하여 1987년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됐고 1991년 과하주 생산면허를 받아 아들 송강호 씨와 함께 생산을 시작했다. 송재성 원장이 작고한 이후 아들인 송강호 기능보유자가 대를 이어 과하주를 생산해 1988년 전통 식품 명인(제17호)으로 지정받았다.
그 외에도 현대적인 기법으로 과하주를 만드는 곳이 많아져 과하주의 맥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과하주는 이렇게 역사도 오래되고 조상의 지혜가 담긴 술이지만 현대에 와서 널리 알려지지 않은 안타까움에 지난해 5월에는 ㈔한국가양주연구소에서 '한국 과하주 진흥위원회'가 발족했다.
위원회(위원장 강진희 술아원 대표)는 과하주의 홍보, 시음회 등을 통한 소비자 대상 교육 기회 제공, 발전 방향 연구 등의 사업을 기획했다.
전통을 이어가며 새롭게 발전시키는 것이야말로 예부터 이어져 온 '온고지신'의 정신이다. 한국판 포트와인 과하주야말로 우리가 지켜가야 할 자랑스러운 가치 중 하나일 것이다.
신종근 전통주 칼럼니스트
▲ 전시기획자 ▲ 저서 '우리술! 어디까지 마셔봤니?' ▲ '미술과 술' 칼럼니스트
<정리 : 이세영 기자>
sev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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