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라면 이재용처럼 했을까

이종태 기자 2025. 3. 14.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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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의 삼성’이 기술력에서 뒤처지고 있다. 2010~2023년 삼성전자 재무제표를 통해 기술력 퇴보의 주요 원인을 진단해보았다.
SK하이닉스가 업계 최초로 개발한 4세대 D램 모델 ‘HBM3’. ⓒSK하이닉스 제공

“삼성이 하면 다릅니다.” 1990년대 중반을 풍미한 삼성의 광고 카피다. 한국 내에서나 통할 이야기였다. 글로벌 시장에서 당시의 삼성은 2~3류 가전제품 메이커에 불과했다. 그러나 삼성에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첨단기술에 그룹 전체가 휘청거릴 정도의 대규모 자금을 쏟아붓고 있었던 것이다. 그 기술들이 2000년대 후반부터 엄청난 수익으로 연결되며 삼성전자를 글로벌 초일류 기업으로 부상시켰다. ‘삼성이 하면 다르다’는 투자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입증된 슬로건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기술의 삼성’이 최근 기술에서 뒤처지고 있다. 지난해 고대역폭 메모리(HBM) 부문에서 삼성 기술력의 퇴보가 여실히 드러났다.

‘생성형 인공지능(AI)’ 시대의 출범 이후, 이 산업 생태계 피라미드의 최정점에는 미국 엔비디아(NVIDIA)가 자리를 굳혔다. 생성형 AI가 작동하려면 적게는 수천억, 많게는 해(垓·1조의 1억 배)나 자(秭·1조의 1조 배) 개에 이르는 연산(계산)들을 신속하게 처리 가능한 장치(GPU)가 필수적이다. 엔비디아는 세계에서 GPU를 가장 잘 만드는 회사다. HBM은 연산에 필요한 자료들을 ‘기억’했다가 GPU로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전송하는 장치다. 메모리 반도체 부문의 최첨단 제품이다. 삼성전자는 지난 30여 년 동안 글로벌 메모리 시장의 일인자 자리를 지켜왔다. 이런 삼성이 엔비디아가 요구하는 수준의 HBM을 만들지 못해 납품에 실패해버린 것이다. 그 자리를 SK하이닉스가 채웠다.

지난해 10월8일, 전영현 삼성전자 DS 부문장이 사과했다. “근원적인 기술 경쟁력과 회사의 앞날에 대해서까지 걱정을 끼쳤다. 기술의 근원적 경쟁력을 복원하겠다.” 기술 경쟁력의 퇴보를 고백한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이제 기술의 삼성이 아니야.’

국내외 여러 언론과 전문가들이 ‘삼성 위기’의 원인을 찾고 있다. 다양한 의견이 나온다. 가장 많은 지적 중 하나는 삼성전자의 경영 기조가 ‘재무 중시’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재무 중시’ 경영의 폐해

‘재무 최우선’ 경영의 폐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서영민 KBS 기자의 저서 〈삼성전자 시그널〉에는 2023년 하반기 무렵 삼성 관계자로부터 들은 발언이 담겨 있다. 이에 따르면, HBM은 삼성이 “10년 전부터 연구하던 기술”이다. 그러나 HBM에 대한 본격적 투자와 개발은 이뤄지지 않았다. 당시 시점에선 ‘누가 살지’, 즉 수요가 불확실했다. HBM을 양산하려면 복잡한 공정 라인을 구축해야 한다. 큰 비용이 든다. 수요가 없는 데다 비용도 만만치 않은 투자를 강행하면 단기적 ‘수익률(이윤율)’이 떨어지게 된다. ‘금방 거대 수익을 올려 주주들에게 큰돈을 돌려줄 것’이라는 쪽으로 ‘재무’제표를 작성할 수 없다. 즉, 수익성 높은 재무 지표를 세상에 보여주려면 HBM 투자라는 카드를 버려야 했다.

흔히 기업은 투자로 유용한 재화 및 고용을 창출하고 나아가 경제성장 및 기술 경쟁력 향상에 기여하는 경제주체로 정의된다. 그러나 ‘재무 중시’ 경영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주주(투자자)에게 많은 수익을 돌려주는 것이다. 기업은 금융투자의 대상이다. ‘주주에게 어느 정도의 수익을 보장할 수 있는가’와 관련된 ROE(회사 자본금 대비 수익률), ROI(투자 대비 수익률), EPS(주당순이익률), PBR(주가순자산비율) 등의 재무 지표들이 기업 평가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부상한다. 지표들을 개선해야 주가가 오르고, 경영진은 자리를 지킬 수 있다.

이 같은 목표 달성을 위해 경영진이 동원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수단은 비용(설비투자, 연구개발, 고용 등) 감축이다. 특히 수익을 낼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거나 성공 여부마저 불확실한 연구개발(R&D) 투자가 희생양이 되기 쉽다. 심지어 기술력이 떨어지고 상품을 팔지 못해도 재무 지표와 주가는 높일 수 있다. 자사주(해당 기업 발행 총주식 가운데 회사가 보유한 물량)를 매입·소각하는 방법이다. ROE, ROI, EPS, PBR 등을 계산하는 공식들의 ‘분모’는 대체로 자본금(발행 주식의 총가치와 누적 이익)이나 주식 수와 관련된다. 자사주 매입·소각은 자본금 및 총주식 수를 줄인다는 의미다. 이렇게 분모가 작아지면 지표의 비율과 주가는 오른다.

삼성전자는 돈도 있고, 기술도 있으며, 엔지니어도 많다. 그러나 당장 재무제표를 개선할 수 없다면 HBM 개발이 무슨 소용인가. 기술력 발전보다 단기적 수익성이 훨씬 중요하다.

2023년 12월, 부산 깡통시장에서 윤석열과 빈대떡을 나누며 담소하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왼쪽).ⓒ연합뉴스

이건희 전 회장(이하 직위 생략)이라면 어떤 선택을 내렸을까. 이건희는 모험적인 투자의 대가였다. 그가 1990년대 초중반 LCD 패널과 플래시메모리, 2000년대 초반엔 낸드 플래시메모리와 이차전지에 ‘영끌’했을 당시, 이 제품들의 수요는 결코 확실하지 않았다. 이건희는 미래의 가능성을 봤다. 이건희가 개발을 주도한 기술들은 2010년대 들어 스마트폰 등 세상을 바꾼 제품들의 핵심 요소로 떠오르면서 삼성전자를 글로벌 초일류 기업으로 끌어올렸다. 〈이코노미스트〉는 이건희의 삼성을 ‘인내하는(patient) 자본’이라고 부른다. “삼성은 인내심이 강하다. 삼성의 경영자들은 단기 이윤보다 장기 성장에 더 관심이 많다. 피고용인들에 대한 동기부여(고임금)도 잘한다. 삼성그룹은 전략적으로 사고한다.”

삼성전자의 경영이 ‘재무 중시’로 돌아선 것은 2015년 전후로 보인다. 삼성그룹은 중대한 전환기를 맞고 있었다. 이른바 ‘재벌’에 대한 비판 강도가 절정을 향해 치솟고 그룹 지배구조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었다. 이전처럼 계열사끼리의 지분 보유로 ‘이건희 가족’의 경영권을 지키기가 갈수록 힘들어졌다. 2014년 5월, 이건희가 심근경색으로 입원했다. 경영권 승계 절차가 진행되었다. 삼성 측은 같은 해 12월 제일모직(이건희 가족의 지분이 많은 업체)을 상장한 데 이어 다음 해(2015년) 5월엔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을 발표했다. 이런 와중에 미국계 사모펀드 엘리엇이 돌연 등장한다.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일부 지분을 확보한 뒤 물산 주주 자격으로 합병 반대를 주도했다. 승계 시나리오를 완수하려면 이건희 가족 측은 기관투자자들을 비롯한 삼성물산 주주들의 지지를 얻어내야 했다. 합병 여부를 결정하는 삼성물산 주주총회가 2015년 7월17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이로부터 열흘 전인 같은 해 7월7일 이재용 당시 삼성전자 부회장(이하 직위 생략)은 국민연금(삼성물산 지분 9.5%를 소유한 대주주) 고위 관계자를 만난다. 대주주인 국민연금에 합병 찬성을 권유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재용은 합병 이후 삼성그룹을 국민연금 같은 주주들에게 이로운 기조로 경영하겠다며 이렇게 말했다. “장기적으로 애플처럼, 설비투자는 많이 하지 않고 돈을 잘 버는 사업구조로 삼성을 변화시키겠다. 이제는 경영을 잘해야 경영권을 보장받을 수 있다(2017년 6월 이재용 공판 기록).”

설비투자(비용)를 줄이면 수익을 늘려서 주주들에게 더 많은 돈을 환원할 수 있을 터였다. 이재용이 ‘잘하겠다’는 경영의 기조는 ‘재무 중시’일 수밖에 없었다.

또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있다. 주주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지 이재용에게 섬뜩하게 보여줬던 엘리엇이 2016년 10월, 삼성 경영진에게 보낸 서한(‘기업가치 증대를 위한 제안 사항’)이다. 엘리엇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이후 철수하면서 한국을 상대로 하는 투자자·국가 분쟁해결절차(ISDS)를 제기한 상태였다. 서한에서 엘리엇은 이재용 가족의 그룹 지배력을 더욱 공고화할 수 있는 구조 개편 방안을 제시하는 한편 주주 가치의 대폭 증대를 요구했다.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매년 잉여현금흐름(FCF, 기업이 벌어들인 현금 가운데 세금·영업비용·설비투자액 등을 제외한 부분) 중 75%를 주주들에게 환원하라. 둘째, 30조원 상당의 특별 현금배당을 실시하라.

삼성 측은 이 터무니없는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2016년 실적을 결산한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해당 연도 FCF는 약 22조원에 불과하다. ‘현금 및 현금성자산’은 32조원. 엘리엇의 요구를 따랐다면, 삼성전자의 재무 지표와 주가는 치솟았겠지만 장기 투자 및 성장 여력엔 치명적 타격이 불가피했다. 그러나 이후 엘리엇의 요구는 축소·변형된 형태로 관철된다.

삼성전자 재무제표 봤더니

삼성전자는 2014~2015년을 변곡점으로 주주환원 규모를 획기적으로 늘린다.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삼성전자가 2010~2013년 주주들에게 배당한 금액(현금배당금총액)은 순이익(매출에서 각종 비용과 세금을 빼고 남은 금액)의 5~9%에 불과하다. 자사주 매입은 없었다. 연구개발비와 ‘유형자산 취득(설비투자)’ 규모는 현금배당금 총액(총배당금)의 각각 최고 12배와 26배에 달했다. 조달 가능한 자금의 대부분을 설비투자와 연구개발에 쏟아붓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부터 수년 뒤인 2017년 2분기, 삼성전자는 영업이익에서 애플을 제치며 글로벌 제조업체 부문 1위를 달성한다. 〈월스트리트저널〉은 관련 기사에 “세계에서 가장 수익성 높은 기술 업체는? 애플이 아니다”라는 제목을 달았다. 이 질문의 정답은 삼성전자다.

그러나 삼성전자의 경영 기조는, 이건희 회장이 쓰러지면서 승계 작전이 본격화된 2014년부터 이미 급변 중이었다. 삼성전자는 2014년의 총배당금을 전년도(2013년)의 약 2조원에서 3조원으로 올렸다. 이와 함께 2조4000억원 규모의 자사주를 매입·소각했다. 지금부터 ‘배당금+자사주 매입 규모’를 ‘주주환원금’이라고 부르자. 2014년의 주주환원금은 전년도(2조원)의 두 배가 넘는 5조4000억원에 달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일부 주주와 시민사회의 거센 반발 가운데 성사(2015년 7월)된 이후, 삼성전자는 자사의 주주친화성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 같다. 2015년부터 2017년까지 3년 연속으로 각각 4조3000억원, 7조1000억원, 9조2000억원 규모의 자사주를 매입·소각했다. 그뿐만 아니라 배당금도 매년 큰 폭으로 인상했다.

이 무렵 나온 ‘삼성 기업지배구조 보고서’에 따르면, ‘주주환원의 원칙’이 정립되었다. FCF의 50%(엘리엇은 75%를 요구했지만)를 재원으로 연간 정규배당 규모를 9조6000억원으로 정했다. 1조원대 초반이었던 2010~2013년에 비하면 9배 정도의 금액이다. 돈을 평상시보다 더 벌면(잔여 재원) 주주들에게 추가 환원하기로 했다. 2018년부터 9조6000억~9조8000억원을 매년 정규 배당하고 있다. 특히 2020년에는 10조7000억원을 특별배당금으로 정규 배당에 추가해 20조원을 주주들에게 지급했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가격 급락 및 미국의 대(對)중국 견제로 영업실적이 전년도의 절반으로 추락한 2019년에도 이 원칙을 지켜 9조6000억원을 배당했다. 설비투자는 4조원가량 줄였다. 2023년, 삼성전자는 11조원을 웃도는 영업 적자로 법인세를 한 푼도 내지 않았다. 그러나 9조8000억원의 약속은 필사적으로 고수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타클래라에 위치한 인텔 본사. ⓒEPA

2010년 이후 삼성전자가 지급한 주주환원금(배당금+자사주 매입·소각)을 순이익과 비교해보면, 이 회사의 경영 기조가 얼마나 급속도로 변했는지 어림잡을 수 있다. 2010~2013년엔 매년 순이익의 5~9%를 주주에게 환원했다. 이 비율은 2014년에 20%를 넘어서더니 해마다 30%대와 40%대를 오갔다. 2020년에는 무려 77%였다.

2010~2013년 삼성전자의 연구개발비는 총배당의 6~12배에 달했으나 최근 7~8년 동안에는 1~3배로 줄었다. 설비투자 역시 총배당의 10~26배에서 최근 2~6배로 내려앉았다.

연구개발비 증가율(전년도 대비)은 2010년대 초반엔 최고 24%까지 치달았다. 그러나 2015~2016년도엔 ‘마이너스(전년보다 하락)’로 돌아섰다가 지난 몇 년 사이엔 5%에서 10%대 초반을 횡보 중이다. 삼성전자 경영의 축이 어느 쪽으로 기울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11월, 이후 1년 동안 10조원 규모의 자사주를 매입·소각하겠다고 발표했다. 지난해 초 8만원 가까이 올랐던 주가가 11월엔 5만원대 초반까지 추락했기 때문일 터이다. 그 10조원을 연구개발이나 설비투자, 인수합병 등이 아니라 자사주 매입에 사용하면 수익성 지표와 주가는 단기적으로 확실히 오를 것이다.

1990년대의 ‘삼성 위기’ 당시, 이건희는 구미공장 운동장에 애니콜 휴대전화 15만 대를 쌓았다. 직원들이 보는 가운데 애니콜을 부수고 불태우고 불도저로 깔아뭉갰다. “삼성전자는 망한 회사나 다름없다. 위기의식을 가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미친 듯이 기술력에 투자하면서 ‘삼성의 길(삼성 웨이)’을 만들어냈다. 경영 행태를 보면, 이 시기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의 삼성전자와 2015년 이후의 삼성전자는 완전히 다른 회사다. 지금의 삼성전자는 기술력이 아니라 수익성 지표의 분모를 줄여주가나 올리려고 시도하는 기업이다.

이재용 회장이 오른 길은 ‘삼성 웨이’가 아니다. 부러워했던 ‘애플 웨이’도 아니다. 그가 서 있는 그곳은 ‘인텔 웨이’다.

이종태 기자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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