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중순 눈 내리고 철쭉 사라져”…지리산, 어지러운 혼돈

박기용 기자 2025. 3. 14.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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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 기후변화 시점
지리산 지키는 기후변화 감시자들(6)
지난해 가을 지리산 촛대봉 인근 바위틈에 난 잣나무 새순을 살피고 있는 정수지 연구원.

기후변화는 길게 보면 지구 기온이 오르는 일이지만, 짧게는 다르다. 당장은 기후의 불안정이고, 날씨의 들쭉날쭉함이다. 지난해 지리산도 그랬다. 본디 5월 초 개화하는 진달래가 4월 말 절정을 지났고, 5월 중순에 때아닌 눈이 내렸다. 이 과정을 지켜본 채현진(56)씨는 “혼돈의 시기”라고 했다. “5월 중순에 갑자기 눈이 오니 그 시기 꽃 피워야 하는 나무들이 제대로 생장 활동을 못 했어요. 결국 열매도 맺지 못하고… 5~6월엔 초가을 풍경이 펼쳐지지 않나. 이런 변화, 풍경을 대면해야 하는 시기랄까요.”

채씨는 지리산 촛대봉과 영신봉 사이 해발 1600m 세석평전에서 지난해 5월부터 연말까지 8개월간 ‘산 생활’을 했다. 국립공원공단의 기후변화 연구 거점시설(‘기후변화 대응 스테이션’)이 2022년 5월 세석에 들어서면서, 그동안 장비만 두고 이따금 찾아 살폈던 아고산대 백두대간의 변화를 사람이 상주하며 확인하게 된 것이다. 채씨는 이곳에서 국립공원연구원의 연구복원직으로 일했다. 4명의 근무자가 둘씩 짝지어 ‘6일 은거, 5일 속거’ 하며 교대로 일한다.

지리산 촛대봉 인근에 위치한 무인 기상 관측 장비.

채씨가 머문 거점시설은 세석산장(대피소) 바로 옆 60㎡ 면적의 작은 산장이다. 출근 때마다 6일치 식량을 지고 서너시간 등산하면 등산객들이 ‘뭘 조사하냐’, ‘어떻게 지내냐’며 흥미로워했다. 2006년부터 지리산국립공원 전북사무소에서 자연환경해설사를 했지만, 채씨도 아예 산에서 산 건 처음이다.

그렇게 막 세석살이를 시작한 지난해 5월16일 지리산 일대에 2~3㎝의 눈이 내렸다. 새벽 기온이 영하 2.4도까지 떨어지며 15일 오후부터 내리던 비가 눈으로 바뀌었다. 지리산 아고산대에 5월 강설이 아주 없는 일은 아니지만, 이처럼 시기가 늦은 건 이례적이다. 덕분에 세석에 뒤늦은 상고대가 피었다. 이른 아침 넋을 잃을 만큼 아름다운 설원을 보며 채씨는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아 이러다… 진달래를 가을에나 보게 되려나.’

2022년 5월 지리산 세석평전에 설치된 국립공원연구원의 기후변화 연구 거점시설. 시설 앞에서 선 정수지 연구원(오른쪽)과 또 다른 청년인턴의 모습을 채현진 연구원이 찍었다.

정수지(27)씨는 채씨보다 3개월 늦은 지난해 8월 세석에 올랐다. 대학생인 그는 4학년 마지막 학기를 포함한 다섯달을 ‘청년인턴’으로 산에서 보냈다. 졸업하면 국립공원공단 입사가 목표다. 입사에 필수인 생물분류기사, 자연생태복원기사 자격증도 땄다. 지인인 공단 직원으로부터 ‘자연에서 일하고, 사람 스트레스가 덜해 만족도가 높다’고 들었다.

정씨는 구상나무 묘포장이 인상적이었다. 지리산 ‘대표 수종’인 구상나무의 묘목을 묘포장 세곳에서 나눠 기르는데, 세석 근무자들이 돌며 살핀다. 세석 말곤 벽소령과 삼각고지에 있는데 10㎞ 거리다. 2박3일 일정을 잡고 찾아가 나무의 수고(높이)나 장단폭(굵기), 근원직경(밑단 굵기) 등을 확인했다.

“세석 묘목들은 정강이 높이였는데, 벽소령엔 3m 넘는 것도 있더라고요. 산딸기 덤불이랑 다른 나무들이 크게 자라서… 톱이랑 낫 빌려서, 가시에 찔려가며 갔어요.”

정씨는 종자 수집에도 많은 시간을 썼다. 지리산 식물 종자를 수집해 경북 봉화에 있는 백두대간수목원에 보내는 일이다. 백두대간수목원은 전세계에 딱 두곳뿐인 씨앗 영구 저장고(시드볼트)인데, ‘최후의 날 저장고’로 불리는 노르웨이 스발바르제도의 국제종자저장고는 곡식 등의 작물, 백두대간수목원은 야생식물의 종자를 보관한다. 세석에선 산오이풀, 네귀쓴풀, 둥근이질풀, 물레나물 등 세석평전에서 흔히 보는 54종의 식물 종자를 수집해 보냈다. “산에서 지내면 답답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시간이 금방 가더라고요. 특히 종자 선별하는 게 쉽지 않았어요. 미립자 수준으로 작은 종자도 있어서 숨만 쉬어도 날아가요.”

지리산 세석평전 인근에서 수집한 식물 종자들.

그러나 이들은 지난해 철쭉 종자를 하나도 못 보냈다. 5월 중순 예기치 않은 눈 때문이었다. 세석은 원래 철쭉으로 유명하다. ‘지리산 10경’의 하나이고, 철쭉제가 열렸고, 조선시대에 쓰인 지리산유람기에 등장한다. 한데 이 철쭉들이 지난해 개엽도 못 하고 꽃도 피지 않아 열매를 맺지 못했다. 철쭉만이 아니었다. 구상나무도 결실률이 줄었고, 산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고 산란하는 시기도 빨라졌다. 단풍은 늦고 세석교의 얼음이 유지된 기간도 턱없이 짧았다. 가을에 핀 진달래를 봤을 땐 아연해졌다 . “진달래가 원래 (계절과 상관없이 꽃 피는) ‘불시개화’ 특성이 있는데, 작년에 유난히 많았어요. 정말 이러다 생물계절(계절에 따른 동식물의 변화)이 뒤죽박죽될지 모른다 , 싶더라고요.”(채현진)

지난해 9월 지리산 세석평전에서 장터목으로 가는 능선 길에서 산바람을 맞고 있는 채현진 연구원(왼쪽)과 정수지 연구원.

채씨는 원래 산을 좋아했다. 아름다운 지리산의 능선과 바람에 날리는 꽃들, 운무와 석양, 반야봉의 일몰이 아직 생생하다. 조사 때마다 따라오던 잣까마귀와, 안아보곤 했던 구상나무와 가문비나무, 떠밀릴 듯 불어오던 바람의 소리가 몸에 각인돼 있다. 산 생활의 수고로움을 감수할 만큼. 시리게 아름다운 지리산의 모습이 조금씩 변한다고 생각하면, 안타깝다.

“산에 10살 아들을 데리고 온 아버지를 만난 적 있어요. 자기 아버지가 본인이 10살 때 함께 지리산 종주를 했는데, 그 기억이 좋아서 자기도 아들이 10살이 되기를 기다렸대요. 아버지를 떠올리면서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더라고요. 아이들이 산에서 좋은 추억을 갖는 게 정말 중요하구나, 생각했어요. 산이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박기용 기자 xeno@hani.co.kr

철모르는 동·식물 ‘우리 죄가 아니야’

지리산 생물계절 추이 보니

국립공원연구원의 조사를 보면, 동식물의 개화, 개엽, 첫 출현, 산란 등의 시기는 지난 10년 동안 1~4일 빨라졌다. 연구원은 세석에 거점시설을 설치한 2022년 이후 지리산의 식물 8종과 큰산개구리 등을 육안 관찰하고 적설량과 결빙·해빙 시기를 조사했다. 그 결과 2022년 4월18일에 개화한 진달래는 이듬해 4월15일에, 지난해엔 4월16일에 개화했다. 2년 사이 이틀이 빨라졌다. 얼레지는 2022년 4월20일에서 지난해 4월18일로 역시 이틀 개화가 빨라졌고, 철쭉은 2022년 5월12일에서 지난해 5월6일로 엿새 당겨졌다. 연구원 쪽은 “봄·가을철 대상 종은 대부분 개화 시기가 빨라졌지만 여름철 대상 종은 개화 시기의 변화폭이 거의 없었다”고 설명했다.

큰산개구리의 산란 시기도 변화해 2022년 5월4일에서 지난해 4월5일로, 거의 한달이 당겨졌다. 지리산 노고단의 개엽, 단풍 시기는 2015년부터 기록이 있는데 2015년 5월14일이었던 개엽 시기는 지난해 5월8일로 당겨졌고, 단풍 절정 시기는 같은 기간 10월5일에서 11월10일로 한달 이상 늦춰졌다. 첫 결빙과 최종 해빙 시기의 변화도 크다. 지리산 세석교에 설치한 타임랩스(저속촬영) 카메라 관찰 결과 2022~2023년 겨울엔 결빙과 해빙이 각각 2022년 12월14일, 2023년 3월7일로 결빙 기간이 84일이었던 반면, 2023~2024년 겨울엔 2024년 1월26일에야 결빙돼 21일 만인 2024년 2월15일 해빙됐다. 세석교의 얼음이 유지된 기간이 4분의 1로 줄어든 것이다.

명현호 국립공원연구원 기후변화연구센터장은 “서기 812년부터 기록이 있는 일본 교토의 벚꽃 개화 시기는 1800년대까지 무려 1천년 동안 일정하게 유지됐지만 1900년대 들어 급속히 빨라졌다. 기후변화 영향을 파악하고 과학적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해선 보다 광범위한 지역을 대상으로 한 장기 연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기용 기자 xe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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