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희순의 충청女지도]시골에서 나온 진솔한 한시… 여성문학 위상 높이다
자연 동화된 삶 담은 주옥같은 시
中 시선집 '명원시귀'에 작품 수록
격조 높은 K-여성문학 한류 서막
작은 마을 그윽이 깊고 특별한 이 곳, / 자연 몹시 사랑하니 근심 잊을 만하네. // 인간사 옳고 그름 얽매이지 아니하고, / 꽃 피면 봄, 잎 지면 가을인 줄 안다오. (임벽당에 제하여(題林碧堂) 1)
숲 속에 의지한 집 세속의 티끌 없고 / 다만 그윽이 참 성품을 기른다네. // 한가로운 베갯머리 봄날의 졸음, / 함 없는 모습 태초의 백성 같구나. (임벽당에 제하여 2)
이 두 수의 한시는 김임벽당(金林碧堂, 1492-1549)이 지은 것이다. 임벽당은 조선전기 여성 시인으로, 시(詩)·서(書)·수(繡) 삼절의 예술인이다. 부여 중정리에서 태어나, 혼인 후 서천 비인면 남당리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별좌 벼슬을 지낸 의성 김씨 김수천(金壽千), 어머니는 한양 조씨다. 할아버지는 대사간 김축(金軸), 증조는 군수 김숭로(金崇老)다. 김숭로는 목은 이색(李穡, 1328-1396)의 손녀사위이다.
임벽당의 5대조 김거익(金居益)은 고려 말 정당문학 벼슬을 지낸 문신이다. 고려가 망하자 부여 중정리로 낙향해 살았다. 중정리에는 김거익의 후손들이 터를 이뤄 대대로 살았는데, 김거익의 묘소와 재실 부양재(扶陽齋)가 중정리에 있다.
임벽당의 남편은 기계 유씨 유여주(兪汝舟, 1477-1545)이다. 임벽당의 시아버지는 유기창(兪起昌, 1437-1514), 시어머니는 능성 구씨다. 임벽당은 유여주의 2번째 부인으로, 1남 유위(兪緯, 1516-1536)를 낳았다.
◇자연에 귀의한 무욕(無慾)의 삶 추구 = 유여주는 1518년(중종 13, 무인년) 특별 과거시험인 현량과에 추천됐다. 그러나 1519년 기묘사화에 연루돼 예조판서였던 형 유여림(兪汝霖) 부부와 함께, 조상의 묘소가 있는 서천 비인현 남당리로 낙향하여 은거했다.
임벽당 부부는 마을에 배꽃·복숭아꽃을 심어 놓고 완상하며 살았다. 그로 인해 마을 이름이 이화동(梨花洞)·도화동(桃花洞)으로도 불렸다. 또 집 근처에 연못을 파고 못 가운데에는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어 '선취정(仙醉亭)·'임벽당(林碧堂)'을 조성했다. '선취(仙醉)'와 '임벽(林碧)'은 각각 남편과 아내의 호(號)가 됐다. 오늘날 남당리에는 임벽당 부부가 살았던 집터와 묘소, 부부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500여 년 된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어 그녀의 삶을 증거하고 있다.
임벽당은 자신의 호를 시로 읊어, 유유자적 궁벽한 시골 생활의 정취를 표현했다. 위의 '제임벽당' 시 두 수는 진솔하면서도 은근하며, 결코 화려하거나 눈부시지가 않다. 자연에 동화된 물아일체의 삶은 세속의 근심이 단절돼 있다. 인간사의 옳고 그름에 얽매이지 않고, 꽃이 피면 봄, 잎이 지면 가을인 줄 알 뿐이다.
◇세상에서 가장 얇은 시집 '임벽당칠수고(林碧堂七首稿)' = 임벽당의 한시 일곱 수를 수습해 '임벽당칠수고'를 편찬한 사람은 7세손 유세기(兪世基, 1653-1711)이다.
시집을 편찬하게 된 사연은 이렇다. 유세기의 벗 김두명(金斗明)이 1683년(숙종 9) 서장관으로 중국사행을 다녀오면서, 중국인 전겸익(1582-1664)이 편찬한 '열조시집'을 구입해 유세기에게 보여줬다. 그런데 유세기는 이 시집 속에 자신의 7대 할머니 임벽당의 시가 수록돼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열조시집'에 실린 임벽당의 시는 '별증(別贈)'·'빈녀음(貧女吟)'·'고객사(賈客詞)'이다. 유세기는 중국인이 편찬한 책에 자신의 할머니 한시가 수록돼 있었다는 사실에 무척 고무됐다. 이에 임벽당 사후, 150여 년 동안이나 집안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던 베갯모에 수놓아져 있는 '제임벽당'시 2수, 허균이 편한 '국조시산'에 수록된 '증질자(贈姪子)'·'증별종손(贈別從孫)' 시를 수습, 총 7편의 한시를 확보했다.
유세기는 당대의 유명한 문인이자 벗들인 남구만·조지겸·윤증·조인수·한태동·남용익 등에게 이런 사연을 알리고, 임벽당 시집의 서문과 발문을 부탁했다. 서문과 발문이 지어진 연도는 각각 1686년(숙종 12), 1691년(숙종 17), 1693년(숙종 19) 등이다. 시집이 발간되기까지 꽤나 긴 시간이 소요됐음을 알 수 있다.
유세기는 시집의 서문에서 "거듭된 전쟁과 화재로 집안의 옛 유물들이 거의 없어져 남은 것이 없다. 그런데 전겸익이 편찬한 시집에서 세상에 전해지지 않던 세 편의 작품을 얻게 되었으니, 그 또한 많다고 하겠다"라고 시집 발간의 기쁨을 표현했다. 임벽당의 시는 적지 않은 양이었는데, 집안의 화재로 인해 수많은 문헌이 소실됐다고 한다. 화마만 아니었더라면, 임벽당의 문학작품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웃 나라 중국까지 전파된 주옥같은 시 = 임벽당의 시 일곱 수의 내용은 위의 '제임벽당' 시 두 수 이외에, 친정 혈육의 방문과 가난한 살림 속 소박한 대접과 이별의 아쉬움을 읊은 '증질자(贈姪子)·'증별종손(贈別從孫)'·'별증(別贈)', 베를 짜는 가난한 여인의 노래 '빈녀음(貧女吟)', 배를 타고 먼 곳으로 다니며 무역하는 장사꾼의 생활상을 노래한 '고객사(賈客詞)' 등으로 이뤄져 있다.
조선 전기 문학평론가 어숙권(魚叔權)은 '패관잡기'라는 책에서 우리나라 여성문인들의 창작 환경이 매우 열악함을 한탄했다. 그러면서 임벽당을 조선 전기 3대 여성시인으로 꼽고 존중했다. 어숙권이 중종·명종 대에 활동한 문인이었음을 고려할 때, 임벽당의 시는 임벽당 생존 시에 이미 세상에 회자됐던 것으로 파악되는 지점이다.
특별히 조선의 대 문장가이자 영의정을 역임한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은 '임벽당칠수고후기(題林碧堂七首稿後)'를 썼다. 후기에서, 자신이 청나라 사신으로 갔을 때 중국의 유명한 문학평론가 종성(鐘惺)이 편찬한 시선집 '명원시귀(名媛詩歸)' 안에 임벽당의 시가 수록된 것을 확인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임벽당의 명성이 우리나라에서 넘쳐 중국에까지 알려졌음을 알 수 있다. 해외의 작은 나라, 초야에 사는 한미한 선비의 아내로서, 마침내 대국(大國)의 문단에 수록되어 천하와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으니, 이는 참으로 거룩한 일이다"라고 극찬했다.
여성의 문자행위를 극도로 꺼려했던 조선시대. 그러한 시대의 분위기 속에서, 깊고 구석진 시골의 작은 마을(小洞幽深)에 살았던 한 여성의 시가 세상 속으로 퍼져나가, 조선의 격조 높은 여성문학의 위상을 중원에까지 알리게 된 사실! 참으로 꿈같고 기적처럼 느껴진다. 김임벽당은 그렇게 K-여성문학한류의 서막을 연 중심에 우뚝 서게 됐다. 문희순 문학박사·충청문화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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