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D 투자할수록 '상폐 위기'…"비용 줄이려 신약 임상시험 중단"

이우상/안대규 2025. 3. 12.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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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 늪 빠진 K바이오
(1) 바이오 상장사, 최근 3년간 40여곳 '법차손 발목'
한국만 있는 '바이오 규제'
사상 최악 상장폐지 위기
R&D 지출로 적자나면 퇴출
업종특성 무시…장기성장 발목
인천의 한 바이오기업 연구실에서 직원이 신약 개발 실험을 하고 있다. 국내 바이오 상장기업들이 법인세차감전계속사업손실 기준을 맞추기 위해 직원을 줄이고 임상을 중단하는 등의 사례가 늘고 있다. /이우상 기자


“이런 규제 아래에서는 해외 바이오기업이 한국에 상장할 이유가 없습니다.”

크레이그 고든 고든엠디글로벌인베스트먼트 대표는 12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한국 증시의 규제 허들이 개선되지 않으면 바이오기업의 지속적 성장이 어려울 것”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미국 벤처캐피털(VC)인 고든엠디를 2021년 설립해 2조원 규모 자산을 운용 중인 고든 대표는 아시아 바이오산업 이해도가 높은 월가의 대표적 투자자로 손꼽힌다. 세계 1위 항체약물접합체(ADC) 기업인 다이이찌산쿄 등에 투자했으며, 최근 한국 바이오기업에 투자하는 1억5000만달러 규모 한·미 공동 운용 펀드 신설을 추진하고 있다. 

고든 대표는 한국 바이오기업의 성장을 막는 대표적인 규제로 법인세차감전계속사업손실(법차손) 규정을 지적했다. 그는 “연구개발(R&D) 지출로 적자를 내면 관리종목이 되는 규정은 장기간 자금을 조달해야 하는 바이오기업의 (업종) 특성과 맞지 않는다”며 “한국 외 다른 국가에서는 본 적이 없는 기준”이라고 했다. 한국거래소 규정에 따르면 3년간 2회 이상 법차손이 자기자본의 50%를 초과하면 관리종목이 되고, 다음해에도 해소되지 않으면 상장폐지 대상이 된다.

한국경제신문이 더올회계법인에 의뢰해 바이오 특례상장기업 중 2022년과 2023년 법차손 규정을 위반한 40곳의 2024년 1~3분기 재무제표를 분석한 결과 12곳이 최근 3년간 두 개 연도 이상 법차손 규정을 위반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기업이 모두 관리종목으로 지정되면 사상 최대 규모다. 2023년 이 규정으로 관리종목이 된 바이오기업은 한 곳, 2024년에는 두 곳에 불과했다.

법차손 위반땐 자금조달 막혀…신약 개발에 평균 10년 1조 필요
인건비 아끼려 연구원 내보내고 신약후보물질 매각하면서 버텨


코스닥시장에 상장한 신약개발기업 A사는 최근 신약후보물질 임상시험을 중단했다. 지난해에는 수십 명의 연구직원을 내보냈다. 지속적인 연구개발(R&D)비 지출로 상장 유지 조건 중 법인세차감전계속사업손실(법차손) 기준을 맞추지 못해 관리종목으로 지정될 위기에 놓였기 때문이다. 역시 법차손 규정에 걸린 바이오기업 B사는 중동 브로커에게 수수료 20%를 내는 조건으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자금 조달을 추진 중이다.

신약 개발에 평균 10년 동안 1조원 이상을 투입하는 바이오 상장기업들이 법차손 규정으로 시름하고 있다. 올 들어 바이오기업이 이 규정에 따라 대거 관리종목에 지정될 판이어서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R&D 할수록 상폐 위기

12일 한국거래소가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백종헌 국민의힘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바이오 특례상장기업 중 2022년과 2023년 법차손이 10억원 이상이면서 자기자본의 50%를 초과해 거래소 기준을 어긴 기업이 40곳으로 조사됐다. 신약 개발 성공 기대로 시가총액이 수조원인 기업, 의료 인공지능(AI) 기업 등 ‘코스닥 스타기업’도 대거 포함됐다. 거래소 상장 규정에 따르면 최근 3년간 2회 이상 법차손 기준을 어기거나 매출 부진, 자본잠식 요건에 해당하면 관리종목으로 지정된다.

이달 말 사업보고서 제출 기한이 끝나면 관리종목 바이오기업이 쏟아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김석관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2025년 바이오헬스산업 생태계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는 ‘법차손 문제’”라며 “기술성장기업 특례나 이익미실현기업 특례(일명 테슬라 상장)로 3~5년 전 코스닥에 상장한 바이오기업들이 유예기간이 끝나는 올봄에 이 기준에 대거 걸릴 수 있다”고 전망했다.

백 의원의 거래소 자료를 토대로 바이오기업 전문인 더올회계법인이 추산한 결과 올해 관리종목으로 지정될 가능성이 높은 기업이 12곳인 것으로 나타났다. 바이오기업 관리종목은 2022년 1곳, 2023년 2곳에 불과했다. 역대 최악의 투자 혹한기를 겪고 있는 바이오업계 입장에선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조완석 더올회계법인 대표는 “바이오업계는 전환사채(CB) 발행도 막힌 상태”라며 “이런 상황에선 법차손 기준을 한 번만 어겨도 자금 조달이 완전히 막힌다”고 했다.

◇대표적 갈라파고스 규제

전문가와 업계는 제도 개선을 촉구하고 있다. 법차손은 세계에서 한국만 시행하는 상장 유지 기준으로 대표적인 ‘갈라파고스 규제’(특정 국가에만 있는 비현실적 규제)라는 점에서다. 이정규 브릿지바이오테라퓨틱스 대표는 “길리어드, 버텍스, 모더나 등 세계적인 바이오기업도 한국에선 법차손 기준 때문에 관리종목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브릿지바이오는 지난 10일 법차손 기준에 따라 관리종목으로 지정될 가능성이 있다고 공시했다. 이 회사는 폐섬유증 신약 개발 기대로 공시 이후 주가가 오히려 약 20% 뛰었다.

한국경제신문이 더올회계법인에 의뢰해 지난해 나스닥 상장 200대 바이오기업에 법차손, 매출 등 코스닥 상장 요건을 적용했더니 32.5%가 상장폐지 직전인 관리종목 대상으로 분류됐다. 나스닥 상장 유지 조건엔 한국과 같은 법차손, 매출, 자본잠식 등의 요건이 없다. 백 의원은 “법차손은 제조업 평가에나 맞는 지표”라며 “금융당국이 반도체 바이오 등 막대한 R&D 투자가 필요한 첨단 업종에는 다른 잣대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법인세차감전계속사업손실

일회성 비용인 법인세를 차감하기 전 사업손실. 코스닥 상장기업이 최근 3개 사업연도 중 2회 이상 자기자본의 50%를 초과하는 법차손이 발생하면 관리종목 지정 사유에 해당한다.

이우상/안대규 기자 ido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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