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볼지 모른 사람인게 한 국자 더 주제”

한겨레 2025. 3. 11.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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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이광이 잡념잡상 _13 말의 맛 (중) 보살의 지혜</strong>

독기장수, 굴에 물을 치지 않고 짠 것 그대로 파는 어매, “언제 볼지 모린 사람인게 더 주제.” 언제 볼지 모르는 사람이니 덜 준다는 말을 들어봤어도, 더 준다는 말은 처음 듣는다. 이것이 지혜다. 지혜는 육바라밀이고 뭐고, ‘내 것을 덜어내는 데서 온다’는 것을, 어느덧 보살이 된 할매가 알려준다.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갯가에서 돌을 들추면 게가 움츠리고 있다가 얼른 달아난다. 엄지손가락만 한 그것이 독기(돌게)다. 갯바닥을 이리저리 돌며 한나절, 돌마다 떠들고 다녀야 한 양푼 잡는다. 독기는 국 사발에 담아 날로 팔기도 하고, 간장이나 젓국에 절여 두었다가 장날 내다 판다. 독기는 껍질째 오독오독 씹는 맛이 좋다. 짭짤하니 쉬 변하지 않아 찬 없을 때 좋다. 배받이가 넓적한 것이 암놈이고, 날촘한 것이 수컷이다. 암컷이 더 맛있다.

“오늘은 검당고실로 가고, 내일은 큰 고실로 가고, 그 담날은 납닥고실로 가고, 또 사심바우로 가고, 그물바우로도 가고, 이 독으로 가고, 저 독으로 가고, 독마다 다 댕애. 물 들오도록 독 떠들고 댕개. 후다닥 후다닥 잡아야제. 저 속으로 보르르르 들어가분 놈은 니가 운 좋다 허고 보내제. 어짠 독 밑에는 암 것도 없어. 글문 얼른 또 딴 독을 떠들문 되야. 떠들어 봐야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를 안게…. 나는 짜게는 안 폴(팔)았어. 단골 아니라도 더 주라고 허문 더 줘. 한 국자믄 반 그륵인디 한 국자를 더 줘. 덜 써운하게 보낼라고. 언제 볼지 모린 사람인게 더 주제.”

전북 고창 갯가, 하전마을에서 독기 장사를 하는 강분순(82) 어매 말이다. 남편 떠나고 30년, 갯것을 팔아 6남매를 키웠다. 가난한 집에 입은 많아 어린 자식들 손을 빌렸다. 청바지 사준다고 하면 아이들이 고무 다라이에 빙 둘러앉는다. 바지락 꼬막 까고, 굴 까는 갯일을 같이했다. 어매는 굴에 물을 치지 않고 그대로 팔았다.

“물 많이 치문 뿔어서 크게 뵈이고 당장 때깔은 좋제. 속 아는 사람은 내야 짠 놈 사가. 집에 가서 갱물 시켜불문 안 퍼지고 삼삼허니 맛나거든. 당장 못 팔아도 내 양심 지킴서 살아야제. 그래야 다음 장에 ‘저 참에 가져간 것 참 좋습디다’ 그런 말을 듣제. 한번 신용 잃으문 장사는 암 것도 아녀.”(월간 전라도닷컴 265호)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불교는 여섯 덕목으로 설명한다. 육바라밀, 첫째 보시다. 내 것을 잘 내어주는 것이다. 둘째 지계는 끝내 하지 않음을 간직하는 것이고, 셋째 인욕은 남이 욕해도 참는 힘이다. 넷째 정진은 꾸준히 나아감이다. 다섯째 선정, 고요함 속에서 생각이 멈춘다, 그러면 여섯째 반야, 지혜가 나온다. 지혜는 꼭대기에 있다. 산에 오르는 고된 여정, 다섯 단계를 지나야 반야가 있다. 지식과 지혜는 다르다. 지식은 분별이고, 지혜는 그 너머에 있다. 그래서 반야를 ‘부처의 어머니’라 한다.

“대문 없는 집에 살면서 도둑은 딱 한번 들었어. 숭년 들던 해여. 보릿고개를 못 넘고 들왔던 것이제. 곳간에서 보쌀(보리) 한 차두를 내 갖고 갔어. 어매라믄 이고 가고 아배라믄 지고 갔것제. 인자 그놈으로 다만 몇끄니라도 안 곯고 묵었겄제. 나놔묵은 폭 됐제.”(담양 창평면 장화리 김귀순 할매, 106호)

“그때는 곡식 한알이 참 귀해. 굶기를 먹듯이 해. 그래도 거지가 내 집에 들오면 개다리소반에다 상 차려서 우리 식구 먹는 것 같이 드려. 그때는 거지도 많고 과객도 많이 다녔제. 한번은 국을 낄앴는디 과객이 왔어. 조리고 건더기를 건져서 드렸어. 잘 드리고 자퍼서. 우리 식구들은 멀국만 묵었제.”(남원 김정숙 할매, 153호)

보리 한말을 도둑맞고는 그것 먹고 몇끼는 안 굶었겠지, 나눠 먹은 셈으로 친다, 이것은 보시다. 거지에게 개다리소반에 밥을 차려 준다, 과객에게 건더기 건져 주고 우리 식구는 국물만 먹었다, 잘 드리고 싶어서, 이것은 보시이며 인(仁)이다. 누구에게 술 한잔 사주는 일은 보시지만, 그놈은 맨날 얻어먹기만 하네 하면서 은근히 술 되사기를 바라는 것은 보시가 아니다. 가면 간 줄도 모르는 것, 주고는 까맣게 잊어버리는 것, 그것이 보시다. 보시는 채권 전표가 없는, 기본적으로 손해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으므로 그저 가고 마는 것이 아니라, 인(因)은 남는다.

“짐치는 간 치는 것이 좌우허는 벱이여. 배추가 잘 죽어야 짐치가 맛나. 배추가 지 성질대로 펄펄 살아있으믄 맛이 요목조목 어우러지가니? 부부지간에도 성제지간에도 놈의 식구들끼리도 나만 혼자 뚝성질 부리고 살믄 쓰가니? 나는 그라고 살아. ‘나는 없소’ 허고 살아. 평생 이 가심(가슴)에다 간을 허고 살아.”(진안 마령면 월운마을 김경자 할매, 162호)

“똥장군을 비단 보자기로 덮고 밥상을 꺼적으로 덮는다고 속이 바꽈지겄는가. 아무리 잘 입어도 나는 나고, 아무리 못 입어도 나는 나여. 나는 헌 옷이 편하고 흙 묻은 옷이 편해. 옛말이 있어. ‘헌 옷 입고 일하기 좋고, 새 옷 입고 말하기 좋다’고.”(강진 성전면 송월리 조태남 할배, 139호)

“촌에서는 ‘삼성상회에서 이라고 서운하게 주드라’ 그 한마디 나오믄 아홉시 뉴스맹키로 전 군민이 다 알게 되야 있어. 한주먹이라도 더 가믄 괜찮여도 한주먹이라도 빠지믄 안 되야. 재벌(두번) 달고 있으믄 기냥 도라고(달라고) 허는 사람이 있어, 그라믄 내가 그려. 빠진 것 안 주믄 저승 가서라도 갚아야 헐 것인디, 여그서나 쌀장사 허제 저승 가서 쌀장사 허겄냐 그려.”(임실 강진면 갈담리 ‘삼성상회’ 김해용 할배, 87호)

쌀 한주먹 안 빠지게 저울에 두번 단다, 이것은 상도를 지키는 지계다. 쌀 한주먹 안 빼먹고 말지, 저승까지 가서 쌀장사 하겠냐, 이것은 밥보다 더 배부른 말, 판소리의 ‘아니리’ 같은 것. 나는 헌 옷이, 흙 묻은 옷이 편해, 이것은 새 옷에 흔들리지 않는 정진이다. ‘나는 없소’, 하면서 배추 간 하듯이 가슴에 간을 하고 살아, 이것은 인욕이며 무아(無我)다.

“사람 사는 시상에 숭헌 일이 왜 없당가. 소소헌 고통은 금방 잊어 불어야 사는 거제. 그것이 뭣이 아까와서 담고 있당가. 몹쓸 마음은 얼릉 띵겨불고 살아야제. 우리는 이날 평생 볼 때마다 웃고, 볼 때마다 좋아.”(광주 김정봉 순옥 자매, 49호)

“애착하문 괴로와. 밑간(밑진) 날은 오늘도 밑갔네 허고 탁탁 털어. 한푼 덜 번 것에 매이문 내 맘만 괴로와. 일이 재밌들 안 허고 고통이 돼야. 주머니 속에 돈 안 시고 있으문 웃어져. 알탕갈탕 살 필요가 뭐 있는가. 하하!”(구례장 어물전 김만순 할매, 155호)

“시시로 때때로 포래도 뜯고, 톳도 뜯고, 반지락도 캐고…. 쌔고(많고) 쌨어. 갱번에 뜯어 묵을 것 천지여. 이라고 걸고(넉넉하고) 깨깟한 물가에 산께, 우리는 쩌 숲에 새맹키로 하하하하 웃고 살아.”(여수 화정면 낭도리 박송자 할매, 98호)

소소한 고통은 얼른 잊어버리고, 몹쓸 마음은 멀리 던져 버린다, 한푼 덜 번 것에 매이면 고통이 되고, 주머니 속의 돈을 안 세고 있으면 웃어진다, 이것은 선정이다. 선정에 들면 걸림이 없는 천의무봉이라, 저 숲의 새처럼 하하 웃으며 날아다닌다. 선후가 따로 없이, 선정에 이르면 바로 지혜다.

앞에 독기장수, 굴에 물을 치지 않고 짠 것 그대로 파는 어매, “언제 볼지 모린 사람인게 더 주제.” 언제 볼지 모르는 사람이니 덜 준다는 말을 들어봤어도, 더 준다는 말은 처음 듣는다. 이 선한 말이 어디 가지 못하고 내 입에 붙어 있다. “똥은 옆에 놔뚜고 묵어도 사람을 옆에 두고 나 혼자는 못 묵는 벱이여”(고흥 외나로도 염포마을 할매, 138호), “나는 없소 허고 가슴에 간을 허고 살아”, 경(經)의 반열에 오를 말씀들. 여기서 인(因)은 연(緣)을 만난다. 이것이 지혜다. 지혜는 육바라밀이고 뭐고, ‘내 것을 덜어내는 데서 온다’는 것을, 어느덧 보살이 된 할매가 알려준다.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나 아닌 것이 없다’는 원시 불경 ‘숫타니파타’의 경구를 한마디로 압도하는 저 무아의 경지. 거기 서서 보니 해인사 장경각 팔만대장경의 목판이 빨래판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광이 | ‘정말로 바다로 가는 길을 나는 알지 못하지만, 그러나 바다로 가는 노력을 그쳐본 적이 없다’ 목포 김현문학관에 걸린 이 글귀를 좋아한다. 시와 소설을 동경했으나, 대개는 길을 잃고 말아 그 언저리에서 산문과 잡글을 쓴다. 삶이 막막할 때 고전을 읽는다. 읽다가 막히면 ‘쓴 사람도 있는데 읽지도 못하냐?’면서 계속 읽는다. 해학이 있는 글을 좋아한다. 쓴 책으로 동화 ‘엄마, 왜 피아노 배워야 돼요?’, ‘스님과 철학자’(정리), ‘절절시시’, 산문집 ‘행복은 발가락 사이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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