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수경의 무비시크릿] '서브스턴스'와 '아노라'가 보여준 용기

자기만족이나 자아존중감은 정신건강의 중요한 지표로 꼽힌다. 그러나 이는 다양한 요인에 크게 영향을 받기에 늘 안정적 상태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자아도취나 자의식 과잉에 빠지는 건 위험하다. 본연의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격려해 줄 수 있는 마음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최근 해외 시상식에서 트로피를 휩쓸며 주목받고 있는 영화 두 편을 봤다. '서브스턴스'와 '아노라'다. 이 작품들은 완전히 다른 장르와 주제를 담고 있지만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 바로 '나'를 받아들이는 용기를 역설한다는 점이다.
올해 미국 배우 조합상과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데미 무어는 '서브스턴스'에서 한물간 스타를 연기하며 배우 인생의 새 장을 열었다. 그런 그를 누르고 미국과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거머쥔 이는 혜성처럼 등장한 신예 마이키 매디슨이다. '아노라'에서 실존 인물을 보는 듯한 완벽한 연기를 펼쳐냈다.
코랄리 파르자 감독이 연출한 '서브스턴스'는 과거 명예의 거리까지 입성한 대스타였지만, 현재는 TV 에어로빅 쇼 진행자로 전락한 엘리자베스(데미 무어)의 이야기를 그린다. 여성의 몸에 대한 사회의 시선과 집착을 기괴한 편집 방식을 동원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35년 전 '사랑과 영혼'에서 극강의 청순미를 뽐냈던 데미 무어는 숏컷 열풍을 일으키며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1962년생인 그는 어느덧 60대가 됐고 이미 40대 시절부터 수억 원을 들여 전신 성형을 받았다는 소문에 시달렸다. 엄청난 관리와 노력도 뒷받침됐겠지만, 대중은 자연의 섭리를 거부한다며 데미 무어를 손가락질하고 어색한 외모를 지적했다.
그런 그가 '서브스턴스'를 선택한 건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운동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축 늘어진 엉덩이와 탄력을 잃은 전신을 노출하고, 극단적인 분장과 망가짐을 불사하며 모든 신들에 혼을 불어넣었다. 스스로를 영화에 그대로 투사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리얼한 연기였다. 각본과 연출도 인상적이지만, 작품의 메시지가 더욱 선명하게 전달된 데는 캐스팅의 공이 컸다.
속물 프로듀서에게 상처를 입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던 엘리자베스는 한 간호사에게서 받은 USB 스틱을 통해 인생이 바뀐다. 7일간 아름답고 탱탱한 젊은 수(마가렛 퀄리)로 살아갈 기회를 얻은 그는 "둘의 균형을 지켜야 한다"는 규칙을 깨고 더 많은 시간을 수로 버텨보려 애쓴다. 수의 일주일을 경험할수록 엘리자베스의 일주일은 초라해진다. 자아는 늙은 엘리자베스를 거부하고 삶은 점점 붕괴된다. 나르시시즘과 자기혐오의 첨예한 대립이 매우 흥미롭게 전개된다.
결국 엘리자베스는 모든 것을 되돌려 원래의 모습을 찾기를 희망하지만 불가능하다. '오늘의 내가 가장 젊다'는 말을 새기고 감사하며 살아야 함을 영화의 과격한 설정들을 통해 느끼게 된다.

'아노라'의 주인공 아노라(마이키 매디슨)는 스트립 댄서로 일하는 성노동자다. 그는 본명 대신 애니라고 불린다. 가게의 에이스답게 능수능란한 영업 스킬로 손님들을 유혹하는 여자. 화려한 조명 속에서 웃음을 팔지만 해가 뜬 아침, 민낯으로 퇴근하는 그의 얼굴에선 삶의 고단함이 보인다.
그런 아노라의 앞에 러시아 억만장자의 아들 바냐(마크 아이델슈타인)가 나타난다. 어리고 돈 많은 이 손님을 완전히 매료시킨 아노라는 급기야 집에도 초대를 받는다. 외부에서 만남을 가질 때도 아노라의 정산은 정확하다. 확실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두둑한 돈을 챙긴다. 바냐는 1주일간 자신만의 여자가 되어달란 요청을 하고 아노라는 1만 5천 달러(한화 약 2천만 원)에 이를 수락한다.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 헤어짐을 준비하는 아노라에게 바냐는 급작스러운 청혼을 한다. 아노라는 진심인지 묻고 바냐는 확신에 차 대답한다. 두 사람은 라스베이거스에서 충동적인 결혼을 한다. 바냐의 으리으리한 집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도 잠시, 이들에겐 곧 위기가 닥친다. 바냐의 부모가 아들의 혼인을 무효로 하기 위해 손을 쓰기 시작한 것. 집으로 들이닥친 하수인 삼인방과 아노라는 격하게 대립하고, 바냐는 달아나 버린다. 도망친 바냐를 찾기 위해 뉴욕 거리를 누비는 네 사람의 여정이 시작된다.

영화는 흔한 신데렐라 스토리나 해피엔딩을 다루지 않는다. 미숙하지만 진심 어린 사랑을 고백했던 바냐의 눈빛을 아노라는 믿었고, 그가 자신을 지켜주길 기대한다. 하지만 이는 스트립 클럽의 섬광만큼이나 환상에 불과했다. 바냐 부모와 하수인들의 "꽃뱀" "창녀"라는 험악한 단어의 공격 속에서 맹수처럼 물어뜯으며 스스로를 방어한 것도 아노라였다. 결국 그는 지금까지 그래왔듯 주체적으로 삶을 이끌어나가야 하는 것이다.
러시아 유명 가문의 며느리가 될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분투하다가 결국 갈기갈기 찢어지며 자기존엄성에 눈을 뜨는 아노라의 이야기는 깊은 여운을 남긴다. 엔딩 속 모든 것을 내려놓은 아노라의 토해내는 듯한 울음은 더 나은 '나'로 다시 태어나는 고고지성인지도 모르겠다.
유수경 기자 uu84@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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