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적 성차별 정말 없을까”…통계로 본 한국 여성 인권 [여성의 날 45주년]
강간 피해자 97.8% 여성…女 고위 관리자 비중도 OECD 평균의 절반
‘비동의강간죄 입법’ ‘성별근로공시제도 민간 확대’ 필요성 제기
(시사저널=이태준·정윤경·김현지 기자)
세계 여성의 날이 45주년을 맞은 3월8일. 전 세계적으로 여성 인권 향상에 대한 관심과 그 필요성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는 여성 인권 의제가 주요 논의 테이블 밖에 위치하고 있다. 특히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여성가족부 폐지' 논의가 공론화되면서, 그동안 힘겹게 쌓아올린 한국 여성들의 인권이 퇴보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여성가족부 폐지'를 주요 공약으로 내세웠다. 그는 "더 이상 구조적인 성차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피력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여성가족부의 기능을 보건복지부, 고용노동부 등으로 분산하거나 폐지하는 방안이 논의됐다. 여성 고용 및 노동 관련 정책 담당은 고용노동부가, 여성폭력 방지 및 피해자 지원 업무 담당은 법무부와 경찰청이 담당하자는 것이 골자였다.
중앙정부의 성평등 정책 축소는 지방정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경상남도는 지난해 행정조직을 개편하면서 여성가족국을 폐지했다. 그 역할은 복지여성국 여성가족과에서 이어받았다. 경남도는 조직 개편일 뿐 역할은 유지된다고 했으나, 여성가족부 폐지를 내걸었던 윤석열 정부의 정책과 궤를 같이 한다는 평이 나왔다. 경남도는 또 지난해 '제3차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에서 양성평등기금 조성도 확약하지 않았다.
한국의 성 격차 지수(Gender Gap Index)는 전 세계 하위권 수준이다.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2023년 성 격차 지수'에 따르면 한국은 146개국 중 99위를 기록했다. 여성의 경제 참여 및 기회 부문은 115위를 기록하며, 성별 간 경제적 격차가 여전히 크다는 점이 확인됐다. 또 통계청이 지난해 발간한 '한국의 지속가능발전목표(SDG) 이행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성별 임금격차는 2022년 기준 31.2%로, OECD 35개 회원국 중 1위였다. OECD 평균(12.1%)과 비교하면 2.6배 높은 수치이며, 격차가 30% 이상 벌어진 국가는 한국이 유일했다.
한국 여성들이 일상에서 경험하는 차별과 부조리도 여전히 심각하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2023년 기준 강간 범죄 피해자의 97.8%가 여성으로 나타났다. 직장 내 성차별, 경력 단절, 유리천장 등의 문제도 지속되고 있다. 특히 여성 고위직 비율이 여전히 낮아, 의사결정 과정에서 여성의 참여가 제한되고 있다. OECD에 따르면 2021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여성 관리자 비중은 16.3%로, OECD 회원국 평균(33.7%)의 절반에 그쳤다.
일터에서도, 집에서도…'성인지 감수성'은 없다
여성의 날 45주년을 맞아, 시사저널 취재진은 2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각 연령대별로 겪는 성차별과 인권 침해 문제는 달랐지만, 이들은 공통적으로 여성이 사회에서 겪는 불평등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말했다.
대학과 사회 진출 과정에서 성인지감수성 부재를 경험하는 경우도 많았다. 박아무개씨(26·여성)는 "직전 직장에서 인턴으로 근무할 때, 회사 상사와 함께 점심 미팅을 나간 적이 있다. 거래처에서 부장 직급의 남성 2명도 함께 나왔는데, 그 중 한 명으로부터 '오빠한테 오마카세 사달라고 해'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결혼과 출산에 대한 압박이 유독 여성에게 심한 것 같다는 의견도 있었다. 김아무개씨(30·여성)는 "사람을 많이 만나야 하는 직업 특성상 거래처와 미팅 자리를 가질 때가 잦다. 그런데 유독 저에게 '결혼을 했느냐'는 질문이 많았다"며 "이외에도 '빨리 결혼해서 아기를 낳아라' '저출산 시대에 아기를 많이 낳아야 한다' 등의 불편한 발언을 많이 들었다. 남성이었다면 듣지 않아도 될 말을 여성이라 들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직장에서 유리천장을 경험하는 경우도 많았다. 김승연씨(43·여성)는 "여성 관리직 비율이 여전히 낮고, 남성과 동일한 능력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승진 기회에서 배제되는 경우가 흔하다"며 "가사노동의 책임이 여성에게 집중되는 경향이 여전한 것 같다"고 했다.
노후 준비에서 불이익을 겪는 경우가 많다는 증언도 있었다. 임희영씨(57·여성)는 "남성보다 경제활동 기간이 짧고 임금 수준이 낮아, 연금 격차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며 "가정에서 돌봄 노동을 도맡아야 하는 부담도 크다"고 했다.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성평등 교육' 실시해야"
전문가들은 여성 인권은 사회 발전의 중요한 지표이며, 이를 개선하는 것은 모든 사회 구성원의 몫이라고 꼬집는다. 한국 사회가 이전보다 양성평등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정부와 기업, 시민사회가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여성가족부 폐지 논의와 같은 급진적 정책 변화는 여성 인권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에 신중히 검토하고, 여성의 목소리를 생생히 반영한 정책 수립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헌법재판소는 지난 2019년 4월 낙태죄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며, 국회에 2020년 12월31일까지 법안을 개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그러나 21대 국회는 관련 개정안을 정비하지 않았고, 22대 국회에서는 법안 발의조차 없는 상황이다. 이에 전문가들은 지금이라도 국회에서 여성 인권 보호를 위해 낙태죄 후속 입법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고 지적했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낙태죄 관련한 법이 당연히 만들어져야 되는데 안 하고 계속 미루고 있다"며 "여성 전반뿐만 아니라 남성도 관계되는 문제인 만큼, 조속히 입법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최근 정혜경 진보당 의원이 입법 발의한 '비동의 강간죄'에 대한 사회적 토의도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왔다. 신경아 교수는 "우리 사회에서 비동의 강간죄와 관련한 논의는 충분치 않았다. (지난 2018년 당시) 나경원 당시 자유한국당(국민의힘 전신) 의원이 대표발의한 법안인데, 이후 7년여 간 충분한 논의가 이뤄지지 않았다"며 "비동의강간죄에선 폭행이나 무력 행사의 위협 여부 등이 중요한 판단의 근거가 되는 사안이다. 쟁점 사항인 동의와 비동의를 가르는 기준이 무엇인지 등이 복잡하기에 이제라도 사회적으로 토론하고 학습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여성 임원 비율이 지금보다 더 높아져야 된다는 의견엔 전문가들 사이에 큰 견해 차가 없었다. 특히 윤석열 정부의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으로 기업에 부정적 시그널을 줬다는 지적이 나왔다. 신 교수는 "유리천장을 깨고 여성 임원 비율을 늘리는 것이 기업 경영의 합리화에도 매우 도움이 된다는 건 전 세계적으로 이미 증명됐다"며 "임원진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차원에서도 여성 임원진의 비율을 훨씬 더 늘리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김난주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박사는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5일(현지시간) 발표한 '유리천장 지수'(The glass-ceiling index)에서 한국은 조사 대상 29개국 중 28위를 기록했다. 한국은 2024년까지(2023년 기준 조사) 12년 연속으로 꼴찌를 기록했다"며 "꼴찌를 견인한 건 성별 임금 격차, 여성 관리자 비율, 여성 임원 비율, 경제활동 참가율"이라고 지적했다.
성별근로공시제도의 민간 확대가 필요하다는 것이 여성 정책의 출발점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김예림 한국외대 미네르바교양대학 겸임교수는 "공공부문뿐만 아니라 민간기업에도 성별 임금 격차 공시제를 확대하여 임금 차별을 줄여야 한다"고 했다. 이어 김 교수는 "특히 중소기업에서도 여성의 경력 단절 방지를 위해 육아휴직 확대 및 보육 지원 정책을 강화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여성 인권 정책에 대한 공감대를 어릴 때부터 조기 교육시켜야 이들이 성인이 되어서도 성평등 문화를 확산시키는데 있어 연대 의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견해도 있었다. 허창덕 영남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는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성평등 교육을 실시해야 성차별적 표현과 행동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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