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회복, 해방, 평등, 연대…엘렌 식수의 ‘여성 명사들’ [.txt]

한겨레 2025. 3. 8.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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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color: rgb(0, 184, 177);"><strong>신유진의 프랑스 문학 식탁</strong></span>
작가이자 페미니즘 사상가 엘렌 식수는 특정 성별이 주도적 역할을 맡고 다른 성별이 보조적·종속적 역할을 하는 언어 체계에서 권력관계의 구조를 읽어냈다. 클로드 쯔엉응옥, 위키피디어 코먼스

단어마다 성별 위계 둔 프랑스에서
몸의 리듬·욕망 드러낸 글쓰기 시도
성차별 해체하고 ‘공존의 언어’ 모색

프랑스어에서 명사는 남성 명사와 여성 명사로 구분된다. 예를 들면 남성 명사는 능동성, 해, 낮, 아버지, 지적인 것, 로고스이고, 여성 명사는 수동성, 달, 자연, 밤, 어머니, 감정적인 것, 파토스이다. 작가이자 페미니즘 사상가, 엘렌 식수는 이 목록의 은유를 살펴보기를 권한다.

모든 것을 이항 대립적으로 짝짓고, 두 개 중 하나를 우월한 것으로 간주하는 개념을 비판한 것은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이고, 엘렌 식수는 데리다의 이론에서 여성과 남성에 관련된 목록을 나열하여 언어의 대립 구조와 그곳에 내재한 위계 관계를 밝혀냈다. 특정 성별이 주도적 역할을 맡고, 다른 성별이 보조적, 종속적 역할을 하는 언어 체계에서 권력관계의 구조를 읽어낸 것이다. 식수는 이 구조를 로고스 중심주의 산물로 봤다. 식수가 보는 로고스 중심주의는 가부장적 사고방식과 연결되어 있으며, 이성과 합리를 남성적 속성으로, 감정과 몸은 여성적 속성으로 분류하며 남성과 여성의 위계를 규정한다. 물론 한국어에는 남성형과 여성형이 없지만, 우리가 식수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는 이유는 명사 구분 대신 직업명과 호칭, 발화 방식에서 성차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로 여성임을 강조하는 접두사를 붙이는 단어가 있다. 여교사, 여기자, 여경, 여배우 등, 모두 남성 중심적 세계관이 언어에 뿌리박혀 있음을, 여성을 부차적 존재로 규정함을 증명한다.

언어가 단순히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세계를 인식하고 사고하는 틀이라면, 우리는 기존 언어 체계의 한계와 편향성을 극복하기 위해 그 틀 자체를 의심하고 해체할 필요가 있다. 다만 여기서 해체는 종결이 아닌, 새로운 언어의 출발점이 되어야 하고, 그것이 바로 엘렌 식수가 주장하고 시도하는 바다. 식수는 여성의 경험과 목소리가 왜곡되거나 축소되지 않는 언어,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넘어 다양한 정체성이 공존하는 언어를 모색했고, 그 방법으로 여성적 글쓰기를 제안했다. 그렇다면 식수가 말하는 여성적 글쓰기란 무엇일까?

식수는 여성적 글쓰기는 규정할 수 없고 이론화할 수 없으며, 철학적, 이론적 영역과는 다른 곳에서 일어난다고 했다(‘메두사의 웃음/출구’, 동문선). 다시 말해 고정된 개념의 바깥에서, 이론화 불가능한 영역에서 발현된다는 뜻이다. 이러한 글쓰기는 논리적이고 구조적인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감각적이고 신체적인 경험에 연결되어 몸의 리듬과 욕망을 표현한다. 특히 몸의 감각적 경험과 기억을 말하는 것은 여성에게 가해졌던 언어적·정서적 억압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기에 여성적 글쓰기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여성적 글쓰기의 또 다른 특징은 무의식적 세계를 쓰는 일이다. 언어적 규범에서 벗어나 직관과 감정의 흐름을 따라 쓰는 것으로 이러한 글쓰기는 새로운 사유와 표현의 가능성을 연다. 예로 엘렌 식수가 여성적 글쓰기의 중요한 사례로 언급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작품을 살펴보자. 리스펙토르의 글은 의식의 흐름을 따라 내면을 깊게 파고든다. 로고스 중심주의 문학이 외부 세계의 사건이나 행동 중심의 서사를 펼쳤다면, 리스펙토르는 여성의 시선과 경험을 담은 내면적 세계, 비선형적 서사, 자아의 본질을 표현하며 새로운 문학적 경험을 제공한다.

엘렌 식수의 여성적 글쓰기의 세번째 특징은 ‘타자를 품기’이다. 식수의 문학에서 타자는 두 가지 형태로 존재하는데, 먼저 무의식 안에 존재하는 ‘나’라는 타자가 있다. 나를 발견하는 것이 글쓰기의 시작이라면, 그것은 나를 타자로 인식할 때 가능하다. 다시 말해, 자기 안에 있는 새로운 정체성의 가능성을 열고, 자아를 유동적 존재로 바라보는 것이다. 또 다른 형태의 타자는 나와 다른 존재, 하지만 나를 형성하고 변화시키는 외부의 존재를 말한다. 여성적 글쓰기에서 타자는 상호작용과 소통 속에 있고, 나는 타자를 객체화하지 않으며 그의 경험과 관점을 수용한다. 이러한 포용은 여성적 글쓰기를 자기중심적 서술 안에 갇히지 않게 하며, 개인적 차원이 아닌 사회적 문화적 차원에서 목소리를 내는 일로 확장한다.

엘렌 식수의 문학은 여성이 여성을 쓰는 일이다. 여성을 쓴다는 것은 남성 중심적인 언어 체계에서 억압되어 온 여성의 경험을 여성의 언어로 풀어내는 것이고, 그것은 모두가 주체적으로 발화할 수 있는 언어를 고민하는 일이기도 하다. 물론 이 시도는 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남성에게도 고정된 성 역할로부터 해방의 기회를 제공하고, 새로운 인식과 자유로운 표현의 가능성을 제안하기 때문이다.

엘렌 식수의 말에 의하면 글쓰기는 변화의 가능성 자체이고, 사회 그리고 문화적 구조들의 변형을 예고하는 움직임이자 전복적인 사상의 도약대가 될 수 있는 공간이다. 그러니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모든 억압된 목소리의 해방과 평등을 예고하는 일이 아닐까. 물론 여기서 여성은 생물학적 성별로서의 여성이 아닌, 주체가 되지 못하고 타자화된 모든 존재를 포함한다. 여성과 여성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는 이들에게 자신의 가치를 회복하는 여성적 글쓰기를 제안해본다. 우리가 그 안에서 만나게 될 이야기를 상상해보자.

삶, 재건, 회복, 해방, 자유, 평등, 연대, 글쓰기 같은 게 아닐까?

이 단어들은 모두 여성 명사다. 어디에도 종속되지 않는 존재의 언어다.

신유진 작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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