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5일 만에 언 땅에 용산 철거민들을 묻다
참사 그해 연말 서울시 협상 제의
이듬해 지방선거 등 고려한 듯
용산범대위-재개발조합 협상 타결
‘정부 사과’는 미흡한 수준 그쳐
1월 초 355일 만에 장례식 엄수
눈발 세찬 날 남일당 앞에서 노제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서 영면
활동가들 장례 뒤 감옥행…보석 석방
생존 철거민, 이명박 정권 내내 옥살이
참사책임 김석기 사과 없이 ‘3선 의원’


2009년에 일어난 용산 참사는 국제적으로도 관심을 끌어낸 사안이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만들어지고, 인권 분야에서 진보가 이루어지던 나라로 인식되고 있었는데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다음에 급격한 인권 후퇴가 일어났다. 국제사회가 우려하던 가운데 일어난 사건이 용산 참사였다. 6월에는 유엔 주거권 특별보고관이 방문했고, 10월에는 국제앰네스티의 아이린 칸 사무총장이 찾아왔다. 이들은 남일당 현장을 찾았고, 유가족들을 만나고 우리 수배자들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11월24일, 유엔 사회권위원회는 한국 정부에 “강제퇴거는 오로지 최후의 수단으로 이용될 것” 그리고 “사전 통지하지 않거나 임시 주거를 제공하지 않은 채 시행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권고했다.

355일 만에 치른 장례식
그해 추석에 정운찬 국무총리가 다녀갔다. 그는 이 사건을 풀기 위해서 나름 노력을 했다. 용산 참사는 정부에도 부담이 되고 있었다. 국제사회의 압력도 있었고, 2010년에는 지방자치선거도 치러야 했다. 2009년 12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서울시가 다급하게 협상을 제안해왔다. 며칠 동안 비공개로 서울시의 주선으로 ‘이명박정권용산철거민살인진압범국민대책위원회’(용산범대위)와 용산4구역재개발조합 간의 협상이 진행됐다. 유가족과 용산범대위의 위임을 받은 천주교인권위의 김덕진과 전국철거민연합회(전철연)의 성낙경이 협상 실무를 맡았다.
12월30일, 용산범대위와 재개발조합 간의 협상이 타결되었다. 유가족 위로금, 용산4구역 철거민에 대한 피해보상금, 장례비용을 재개발조합이 부담하는 등의 내용이었다. 용산범대위는 마지막까지 정부의 사과를 요구했다. 정부를 대표하여 정운찬 국무총리는 “‘용산 참사’는 그 원인이 어디에 있든 농성자 다섯명과 경찰관 한명이 소중한 목숨을 잃은 우리 시대에 결코 있어서는 안 될 불행한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안타까운 일이 발생한 데 대해 총리로서 책임을 느끼며, 다시 한번 유족 여러분들께 깊은 유감의 뜻을 표합니다”라고 말했다. 미흡했지만, 더 이상 끌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장례식은 2010년 1월9일로 정해졌다. 장례위원을 모집했더니 순식간에 8천명이 이름을 올렸다. 그날 영하의 날씨에 바람도 불고, 눈발도 날렸다. 순천향병원 장례식장에서 출발한 장례행렬은 명동을 거쳐서 영결식장인 서울역으로 향했다. 추운 날씨임에도 사람들이 서울역을 가득 메웠다. 그 장면을 인터넷 생중계로 지켜봤다. 노제는 남일당 앞에서 있었다. 눈발은 더욱 세차게 날렸다. 그들은 마석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에 묻혔다. 355일 만이었다.
1월11일, 삼우제를 마친 유가족들과 대책위 관계자들이 명동성당으로 왔다. 이제 우리가 나갈 차례였다. 명동성당의 몬시뇰님을 비롯해 신부님, 수녀님들이 우리가 나가는 길을 배웅해주었다. 들머리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잠시 (감옥에) 다녀오겠습니다. 355일 만에 장례를 치렀지만, 용산 참사의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동안 함께해주신 모든 분들, 정말 고맙습니다.”
우리 3명의 수배자는 이런 말들을 했던 것 같다. 남편을 잃은 유가족들을 한명 한명 안았다. 그들은 벌써 울고 있었다.
“공집장님(유가족들은 공동집행위원장인 우리를 이렇게 불렀다)들이 왜 감옥에 가요. 어떡해요.”
울음이 날 것 같았지만, 마지막까지 참았다. 성당 앞에는 우리가 타고 갈 경찰차가 와 있었다. 조금 전까지는 가슴이 아팠지만, 차를 타면서는 밝게 웃으면서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10개월간의 기막힌 수배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남일당 현장에서는 1월25일까지 모두 철수했다.

서울구치소 1.5평 독방
나는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네번째 감옥이었다. 내 방은 1.5평이었다. 그런데 그 방이 넓게 느껴졌다. 내 몸은 20대에 처음 감옥에 갔던 0.75평 또는 1평의 방을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수세식 좌변기와 수도도 있었고, 방에는 난방이 들어왔다. 감옥 생활은 힘들지는 않았다. 용산범대위의 공동집행위원장으로 수배를 당하면서 지도부 일을 해야 하는 부담감을 덜어서일까, 마음은 오랜만에 평화로웠다. 하루가 모자랄 정도로 시간을 아껴서 살아냈다.
1주일에 한번씩 아내와 고등학생, 중학생인 두딸이 면회를 왔다. 수배당한 다음에 순천향병원 장례식장으로, 명동성당으로 매주 토요일이면 어김없이 찾아와 몇시간 동안 내 곁에서 머무르다 돌아가곤 했다. 집에 갈 시간이 되면 명동성당 들머리 끝에서 안타깝게 포옹을 하고 손을 흔들어서 보내곤 했다.
구치소 면회는 겨우 10분이었다. 우리 사이를 투명 아크릴판이 막고 있었다. 손도 잡을 수 없으니 그 투명 아크릴판 안팎에 손을 대고 인사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먼저 들어가.” 매번 아내는 내가 면회실 문을 열고 들어설 때까지 지켜보다가 딸들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고는 했다.
4월에 재판이 시작되었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일반도로교통법 위반 등등으로 기소되어 있었다. 재판기록은 1만쪽 정도가 되었다. 두차례인가 재판이 진행되었는데, 내 49번째 생일날인 4월30일, 갑자기 보석 결정이 내려져 석방되었다. 14개월 만에 세상에 돌아왔다.
감옥에 갔던 망루 생존자들은 이명박 정권 임기 종료 직전이 2013년 1월31일에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그들은 대한문 앞 환영 문화제에서 “다른 용산들을 위해서 싸울 것”이라고 밝혔다. 나는 용산범대위의 후속 기구인 ‘용산 참사 진상 규명 및 재개발 제도 개선 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을 감옥에 같이 갔던 이종회 선배와 다시 맡았다. 대표는 용산범대위의 공동대표였던 조희주 대표가 이어받았고, 사무국장은 지금은 한국도시연구소 연구원으로 있는 이원호가 맡았다.
우리는 용산 참사 주범인 김석기 전 서울지방경찰청장과 집요하게 싸웠다. 그는 이명박 정권에서 한국자유총연맹 부총재를 거쳐서 오사카 총영사를 지내다가 2013년 10월에는 한국공항공사 사장으로 임명되었다. 한국공항공사가 있는 김포공항에서 노숙 농성을 하면서 싸웠고, 그가 2016년 경주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20대 총선에 출마했을 때도 싸웠다. 유가족들을 포함해 우리는 다시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입건되어 재판을 받았다. 김석기는 3선 의원이 되었다.
지금도 쫓겨나는 사람들
용삼 참사 현장인 남일당 자리는 2016년 11월 공사가 재개될 때까지 공터였고, 주차장이었다. 사람이 6명이나 죽은 그 현장에는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인 용산 센트럴파크가 들어섰다. 센트럴파크 오른쪽에 6층 건물은 공공시설동으로 ‘용산도시기억전시관’이 있고, 그 안에 ‘2009년 용산 참사(기억과 성찰) 기억관’이 들어서 있다.
2018년 8월, 경찰청 인권침해 진상조사 위원회에서는 용산 참사를 조사한 뒤에 “경찰 지휘부가 안전 대책이 미비했지만, 진압을 강행했다”고 발표했다. 위원회는 “(진압 과정에서) 순직한 경찰특공대원과 사망한 철거민 등에게 사과를 하고, 유사 사건 재발방지를 위한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당시 민갑룡 경찰청장은 유가족에게 머리 숙여 사과했다. 참사가 발생한 지 9년 만이었다. 반면, 김석기는 “지금 똑같은 상황이 발생하면 현재 경찰도 똑같은 원칙을 가지고 하지 않을까”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하고 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용산 참사를 다룬 영화 ‘두개의 문’이 개봉된 것은 2012년 6월이었고, 또 다른 용산 참사 다큐멘터리 ‘공동정범’은 2018년에 개봉되었다. 두개의 작품 모두 영상집단 ‘연분홍치마’가 만들었다. 이 작품들은 용산 참사에 대한 기억을 일깨웠다.
용산에서 생존권, 주거권을 주장하던 철거민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망루에 올랐던 지석준, 김영근은 그때 당한 부상으로 오래도록 고생했다. 망루 생존자 김대원은 트라우마에 시달리다 스스로 세상을 떠났고, 김주환은 집 밖을 나오지 못한다. 유가족들은 지금도 수면제 없이는 잠을 자지 못한다.
시인 나희덕은 “새로운 도시가 생겨날 때마다 전쟁은 계속되었다 … 지상의 어떤 방도 그 전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신정 6-1지구에서 용산 4지구까지’)는 시를 썼다. 지금도 여전히 재개발 지역에서는 전쟁이 계속된다. 여전히 철거민은 쫓겨나고, 그 자리에 고층 빌딩이 들어선다.
박래군 | 36년째 인권운동가로 살고 있다. 유가협,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재단 사람을 거쳐서 현재는 4·16재단 운영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 ‘사람 곁에 사람 곁에 사람’, 공저서 ‘이따위 불평등’ ‘새로고침’ ‘살아남은 아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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