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안다(蟹眼茶): 자존심과 경쟁의 무대를 떠나다

유영현 2025. 3. 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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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권하는 의사 유영현의 1+1 이야기] 22. 심리학 ‘자기수용’과 ‘자기연민’

은퇴하고 1년 가까이 지났다. 알고 지내던 지인들은 모두 내게 얼굴이 좋아졌다고 한다. 젊어졌다고도 하고, 밝아졌다고 한다. 행복해 보인다고도 한다.

내가 봐도 얼굴에 여유가 넘친다. 자존심, 경쟁. 비교…. 은퇴 후 나의 변화를 설명하는데 필요한 단어들이다. 자존심과 경쟁의 무대, 이 무대를 내려온 후 내 얼굴이 편해졌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자존감과 자존심은

같은 듯 다른 개념이다. 주로 심리학에서 다루고 있는 개념인 자존감은 자기 평가에 대한 만족과 자신을 갖는 정도를 의미한다. 자신의 가치에 대하여 내린 긍정적인 평가 또는 자신의 역할이나 수행의 만족스러움에 대한 자기 가치의 평가와 관련된 개념이다.

누구는 자존감과 자존심을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고 어떤 이는 그렇지 않다. 한국인들이 일상생활에서 흔히 사용하는 자존심이라는 단어는 심리학 용어 자존감과 다르다. 한국문화에서 자존심이란 용어는 주로 '자존심 상한다'는 표현에서 등장한다. 평소에 인지하고 있는 개념이 아니라 어떠한 계기를 통해 자존심이 '상했을 때' 비로소 인지되는 특성을 가진다. 자기관찰에서 비롯된 확고한 자기개념을 통해 인식되는 자존감과는 구분되어 사용된다.

자존심이 상하면 특정한 종류의 정서를 흔히 불러일으키고 독특한 행동을 동반한다. 예를 들어, 자존심이 상한 사람은 좌절하거나 강렬한 분노를 표출한다. 다양한 방식으로 손상된 자존심을 회복하려 발버둥 친다.

자존심이 상한 결과는 무겁다. 자존심을 상하게 한 사람과의 관계를 끊기도 하고 자존심을 보상받으려 무리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 나도 자존심을 상하지 않기 위해 연구에 매진하였다.

자존심과 동일하게 은퇴 전 내 삶에 영향을 미친 요소는 경쟁이다. 모든 사회처럼 과학 하는 행위("sciencing")도 경쟁으로 점철되게 마련이다.

경쟁심을 키워간 4가지 과정

첫 번째 경쟁은 의미 있는 질문을 하는 과정이다. 질문의 가치에 비례하여 산출되는 지식과 개념의 가치도 결정된다. 의미 있는 질문을 하려면 지식의 최전선에서 밝혀진 사실들과 해결되지 않은 의문에 제대로 통해야 한다. 뒤떨어지지 않으려면 지치도록 공부하여야 한다.

두 번째 경쟁은 질문에 대한 답을 얻어가는 과정이다. 실험의학을 전공하였던 나는 수십 년 동안 스스로 만든 질문에 대한 답을 얻으려 실험하였다. 실험을 위하여 연구 경력 대부분을 새벽 다섯 시 출근하여 14시간을 실험실에서 보냈다. 대학교에서의 강의와 행정업무를 위한 시간으로는 부족하였다. 연장 근무 이외는 다른 수단이 없었다. 세계 각국의 과학자들은 모두 과(過)하게 일한다.

셋째 경쟁은 연구비를 확보하기 위한 전쟁이다. 실험에는 연구자와 연구재료가 필요하다. 연구자를 유지하고 연구재료를 사들이기 위하여 연구비가 필요하다. 대학원생과 연구자를 지속 유지하고 연구 인력들에 연구재료를 충분히 제공하여야 실험 자료를 얻을 수 있다. 연구비는 연구자의 목줄이 되었다. 그러나 연구비는 언제 어디서나 모자란다. 치열한 경쟁을 거쳐야 수주받을 수 있다.

은퇴하면서 정리하니 연구책임자로 생애 총 18회의 연구비를 수주하였다. 이 중 두 번의 집단연구비는 16대 1 및 13대 1의 경쟁을 통과하여 수주받았다. 여러 명의 우수 연구진들이 모여 대결하는 집단연구비 수주 과정은 전쟁에 버금가는 경쟁이다.

넷째 경쟁은 연구 결과를 알리는 과정이다. 포스터로 학회에서 알리고 잡지에 게재하기 위하여 세계의 전문가들과 경쟁한다. 모든 과학자는 가능하면 지명도가 높은 잡지에 간행하여 논문의 우수함을 인정받고 싶고 더 많은 독자에게 읽히기를 원한다.

그러나 지면이 한정되어 논문 게재 경쟁은 치열하다. 연구자가 생각하는 가치를 다른 과학자들이 인정하지 않는 경우도 흔하다. 이들을 설득하는 과정도 경쟁이다. 이 경쟁에서 실패하는 때도 다반사다.

특히 우수한 잡지일수록 논문 거부율이 높다. 내가 작성한 논문 한 편은 정상급 잡지 13곳에서 거부되기도 하였다. 기대와 다른 결과가 나오면 충격도 받았다. 한 번은 새벽에 논문 거부 이메일을 열면서 순간 비틀거려 한참 안정을 취한 적도 있다.

경쟁은 비교를 수반하였다. 내 여건을 다른 연구자 여건과 비교하는 때도 흔하였다. 지방사립대학에서 연구하였던 나는 항상 내 여건이 불리하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비교를 세계로 넓혀 세계 정상급 연구자들과 비교하면 현저히 열악한 내 여건을 탓하는 마음도 자주 생겨났다. 비교는 몸을 갉아 먹었다.

연구에 몰입하던 초기 시절에는 연구라는 무대가 내게 꽤 고매하게 보였다. 몸과 마음이 상하여도 나는 꽤 가치 있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였다. 자존심과 경쟁은 목표를 달성하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였고, 성취동기를 강화하고 나를 성장시키는 요인이 되기는 하였다.

그러나 내 연구 성취를 인정받는데 너무 과도한 가치를 두면서 오히려 스트레스와 불안감이 유발되었다. 자존심이 상처 입지 않으려는 노력이 신체적, 정신적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수면 부족, 운동 부족, 불균형한 식습관이 따랐다. 실제 몸이 상하여 입원하고 치료받기도 하였고, 깨어진 감정을 수습하느라 고생하기도 하였다.

몇 번의 충격적인 상황을 맞고

나는 내 마음을 분석 받았다. 그리고 내 연구의 모티브가 남에게 인정받겠다는 미숙한 동기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을 알았다. 그러나 이를 알게 되었다고 연구하는 사람이라는 내 정체성을 갑자기 벗어 던질 수 없었다.

인정욕구라는 미숙한 동기에서 일하였지만, 연구의 결과는 가치 있다고 합리화하고 연구를 이어나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과거보다 훨씬 여유를 찾았지만, 은퇴 때까지 경쟁과 자존심의 무대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다.

지난 2004년, '심리학회보'(Psychological Bulletin)에 자존감을 유지하려는 경쟁적 행위가 건강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에 대해 논문이 나왔다. 그에 따르면 외부의 인정, 사회적 지위, 성취를 통해 자존감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비교하고 경쟁하며, 인정받기 위해 과도하게 노력한다.

논문은 또한, "이러한 경쟁적 상황은 높은 스트레스와 불안을 유발하며, 이는 심리적 건강뿐만 아니라 신체적 건강에도 악영향을 미친다"고 해석하였다. 코르티솔과 같은 스트레스 호르몬의 분비를 증가시켜 면역 체계가 약화하고, 심혈관 질환의 위험성도 증가시킨다고 지적하였다. 내 과거가 이에 꼭 맞게 해당한다.

논문 저자들(크로커, 박)은 "건강한 자존감을 유지하기 위하여 자존감을 외부의 인정에 의존하지 말고 내면의 자원으로부터 끌어내라"고 권유한다. 그들에 의하면 자신 내부를 향하는 내재적 자존감은 정신적, 신체적 건강에 오히려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들은 내재적 자존감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기수용'과 '자기연민'을 발전시키라고 제언한다.

자기수용과 자기연민은

자기수용은 자신의 단점과 실패를 포함한 모든 부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며, 자기연민은 스스로의 고통과 어려움을 이해하고 자신을 부드럽게 다루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수용과 자기연민은 자존감을 안정적이고 건강하게 유지해주고 스트레스를 감소시키며 심리적 웰빙을 촉진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은퇴 이전 나는 크로커와 박의 논문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혹시 이 논문을 일찍 발견하였다면, 자존심과 경쟁 대신 자기수용과 자기연민을 취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필자가 암 환우들에게 차를 따르며 얘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유영현 제공]

1년 전 은퇴와 동시에 암(癌) 환우들과 차 마시며 그들의 마음을 돌봐드리는 무대로 옮겼다. 자기수용이나 자기연민조차도 필요하지 않은 담담한 무대이다. 이 무대에서 온종일 차와 함께하며 여유 있고 편하다.

해안다(蟹眼茶). 게 눈처럼 작은 물방울이 찻잔 속을 휘감아 도는 찻물 구름을 의미한다. 중앙 정치무대의 치열한 삶을 마감하고 낙향하여 즐기는 여유로운 선비의 삶을 묘사한다. 자존심과 경쟁의 무대를 떠난 현재의 내 삶이 곧 '해안다'이다.

유영현 엘앤더슨병원 진료원장

유영현 원장 (yhyoo@da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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