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화 우려’를 아직도 우려먹는 이유 [왜냐면]

한겨레 2025. 2. 26. 19:20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지난 22일 오후 서울 종로구 경복궁 일대에서 열린 ‘윤석열 즉각 퇴진! 사회대개혁! 12차 범시민대행진’이 열려 윤석열 파면을 촉구하고 있다.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황광선 | 가천대 행정학과 교수

필자는 1980년 3월 전북 전주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두달 후 있었던 광주항쟁은 자란 후 부모님으로부터 생생한 경험담을 들었다. 필자의 세대는 엑스(X)세대와 엠(M)세대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불어닥친 스타크래프트는 거의 혁명적 변화였다. 김대중 대통령의 정보기술(IT) 정책과 더불어 1990년대 초 정보기술 호황기에서 시작되어 1990년대 말 게임 시장은 폭발적 성장과 함께 인기가 하늘을 찔렀고 피씨방 시장은 화룡점정이었다. 1990년 초중반부터 등장한 아이돌 가수에 한껏 고취된 케이팝(K-pop) 출현의 서곡을 시작한 세대이기도 하다. 2000년대 초 대학을 다니며 느낀 세상은 엔터테인먼트 세상이었다. 20대 기억에 새 천년을 여는 역사적 주목과 함께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 같은 시선을 받았던 것 같다. 민주화가 마침표를 찍고 더 이상 국사에 대학생이 시위할 일이 많지 않은, 실은 관심을 끄게 되는, 자본주의 중심의 세상이었다. 선진국으로의 도약만 남아있었다. 경제성장과 풍요에 좌우가 큰 이견이 없었다.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말’을 외치며 이념 전쟁의 종식을 선포하기도 하였다.

세월이 흘렀다. 2024년 12월 그리고 이후, 우리는 민주주의와 자유, 국가란 무엇인지, 진보와 보수는 무엇인지, 국가의 정관이고 최고 규범인 헌법에는 대한민국의 기초를 뭐라고 쓰고 있는지, 톺아보는 중이다. 한편에서는 ‘소비, 21년 만에 최저’라는 뉴스를 마주한다. 대통령의 계엄 선언 배경에 일정 수준 이해의 폭을 넓혀보지만, 그 방법밖에 없었나 하는 의문이 밀물처럼 가시질 않는다. 계엄 자체는 일단, 물리력을 동원하겠다는 의지인데 정치력과 법치력이 안 되는 우리나라였나 하는 자괴감도 든다.

누구는 대통령의 계엄 선포가 공산화를 저지하는 ‘계몽령’이라고 한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의 계엄도 최고 지도자 공백에 따른 공산화 우려 아니었던가. 필자는, 1989~1991년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한 지 35년이 흐르고 있는 지금 시대에,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공산화에 대한 우려”를 갖는 것이 적절한 것인가 다시금 질문을 던져보고자 한다. ‘공산화 우려’의 역사는 길다. 남한 독자 정부 수립의 이승만과 어떻게든 한반도 전체의 정부를 그림 그렸던 김구에서부터 군부 독재시대에 반대 세력을 척결하는 방법으로 빨갱이 프레임이 역사적 배경이다. 북한과 중국의 영향을 받는 대한민국으로서는 공산화 우려가 없을 수 없다. 외교·안보는 특히 보수적으로 접근해야 하고 보수 측에서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미국과 유럽의 최근 보수화 경향은 무분별한 이민 수용을 막아 정체성을 지키고자 하는 것처럼, 우리도 북한과 중국을 완전히 차단할 수는 없겠지만 한국의 정체성을 위해 그들의 이념 공세에 대한 방화벽을 구축할 필요는 있다. 북한의 최근 두 국가론 설파와 적대 국가화 및 전쟁 준비 등의 표현 등은 분명 대한민국의 긴장감을 높이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북한 체제의 불안정성에 따른 내부 결집용이라는 분석도 상당하다.

대한민국의 합법성과 정체성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대한민국이 남과 북으로 갈라져 있고 통일을 지향하는 한 지속될 수밖에 없다. 필자는 학문적 검토와 정부 인사들과의 교류, 시민사회 경험, 그리고 무엇보다 전라북도 도민으로서 삶을 토대로 판단하건대 “공산화”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고, “공산화 우려”는 우리 사회를 분열시키는 좀비라고 단언한다. 남북한이 대립하는 상황에서 공산화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는 존중하고 예의주시해야 한다. 간첩이 분명 있을 것이다. 간첩이 없는 사회는 존재할 수 없다. 세계화되고 네트워크화된 사회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왕래가 잦은 유럽 사회는 우리보다 간첩이 더하다. 질문을 던져 보자. 이재명 대표 혹은 민주당 측에서 대통령이 되면, 증권시장이 없어지고 모든 소유권이 국가 소유로 되고 민주적 선거가 없어지고 해외여행도 못 가고 세금이 엄청 올라갈까? 중국, 북한처럼 한 정당이 수십년을 지배하게 될까? 프레임으로 짜 난리법석을 칠 정도로 공산화에 임박해 있는가. 북한 연구에 권위가 있는 세종연구소에서는 한반도 통일을 가능성의 문제가 아닌 ‘시기의 문제’로 본다. 북한이 언제 무너질까를 카운팅하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 공산화 우려라니. 공산화를 막으라고 국가정보원과 군·경찰의 정보 활동, 한미동맹에 따른 미군 주둔 등이 있다. 우리는 통진당 해산의 경험 등 제도적으로 공산화를 제지하는 힘이 있다. 우리가 공산화되면 미국이 가만히 있질 않는다. 더욱이 자유로운 거래의 힘과 사유, 선진 시민으로서의 판단과 책임, 서로를 보듬는 시민의 덕으로 켜켜이 쌓아 올린 우리의 사회적 내공이 공산화를 방기할 것 같은가.

왜 일부 몰상식한 사람들은 유효가 만료된 ‘공산화 우려’를 그렇게 우려먹는 것일까? 이념이 다른 상대방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비이성은 차치하고 본 칼럼에서는 논리적인 생각을 해보고자 한다. 여러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겠지만, 보수·진보에 대한 삐딱한 지식과 근거 없는 두려움 때문이라고 본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진보’와 ‘보수’를 은유적으로 정의한 바 있다. 옛날에는 사람 사는 곳에 버스가 자주 다니지 않았다. 그래서 중간중간 버스가 서는 곳에서 손님들이 버스를 타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때 기사를 향해 ‘만원이니 그냥 갑시다, 더 실을 곳이 없다’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은 보수요, 이미 타고 있는 승객들을 향해 ‘같이 가게 안으로 조금씩 이동합시다’라고 부탁하는 사람들은 진보라고 말했다. 이 ‘배려의 진보’를 어느 누가 ‘공산당’이라고 말할 것인가. 다만, 이 배려가 지나치면 정의와 경쟁이 희석되고 자유와 창발이 침식될 수 있음은 주지한다.

필자는 학자로서 분명히 하건대 진보·보수 이분법은 강학상 존재하지, 현실에서는 없다. 어느 쪽에 더 가까운지 정도 파악하는 것이다. 정책에 따라 동일인이라도 보수적 접근에 찬성할 때가 있고 진보적 접근에 찬성할 때가 분명히 있다. 보수냐 진보냐는 수단이고 목적이 아니다. 정책 목적에 따라 강조될 뿐이다. 서구 근대화 역사에서 보수와 진보는 대립의 개념이 아니다. 보수는 사회 부문에서 전통적 제도의 보존으로 발전하자는 맥락을 가지고 있고 진보는 경제 부문 발전의 배경에서 출발한다. 세계가 2008년 전환형 복합위기를 맞으며 본격적으로 진입한 ‘수축사회’에서 경제적 진보는 거의 소멸했다고 본다. 우리의 경우, 보수는 기득권(예, 일제시대 관료)으로부터 출발하여 경제적으로 부유한 배경을 가지고 있고, 진보는 상당수가 가난한 환경에 있었거나 가난한 사람들의 고난에 공감하고 돕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다.

필자는 원칙과 법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보수에 가깝다. 동성애의 제도적 인정에 반대하고 무분별한 현금 지원을 싫어한다. 국가의 역할은 최소여야 한다는 생각과 개인의 책임과 자유에 좀 더 방점을 둔다는 점도 보수에 가깝다. 하지만 어려운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더 많고 기득권으로 인해 이들이 많이 힘들다는 사실이 필자로 하여금 진보가 추구하는 ‘개혁’을 놓지 못하게 한다. 진보가 중요하게 보는 일반 시민의 현장, 울분과 흔들림이 있는 그들의 삶을 놓고 싶지 않다. 밑에서부터 발굴해 온 진보의 인간에 대한 감각, 공감력을 아는가. 역대 대통령을 보시라. 진보는 대체로 상향식으로 후보를 내세워 대통령(김대중, 노무현, 문재인)을 만들었고, 보수는 하향식으로 후보의 유명세나 경력으로 대통령(이명박, 박근혜, 윤석열)을 세워왔다.

또 하나, 일부 기독교 보수와 기득권층의 공산화에 대한 근거 없는 두려움이다. 이들의 우려는 상식적이지 않다. 기독교 신앙적이지도 않다. 주된 우려는 공산화에 따른 예배권의 침탈(종교의 자유 문제)이다. 솔직해지자. 공산화 우려를 말할 때,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서의 자유에 대한 우려인가 아니면 쌓아온 권한과 재산을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인가. 하나님이 풍요로움에 한껏 고취된 남한 성도들의 역겨움을 토하시고, 북한 지하교회에 있는 순결한 성도들을 더 귀하게 여긴다면 어떻겠는가. 혹여 ‘자유민주 체제’에 따른 막연한 우월의식과 교회 기득권 유지의 발로는 아닌지. 이 ‘굳은’ 마음이 두려움을 내미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볼 일이다.

혹자는 말한다. ‘오죽했으면’. 윤 대통령이 계엄을 한 것은 ‘오죽했으면’ 때문이란다. 이 말은 대한민국 행정의 수준을 몰라서 하는 소리다. 행정의 최고 수반인 대통령이 쓸 수 있는 행정 수단이 얼마나 많은데, 사회가 혼란할 때나 쓰는 계엄 수단을 쓴단 말인가. 예를 들어 보겠다. 야당에서 탄핵을 많이 하는가. 차관 중심으로 국정운영 하면 된다. 차관, 실장 및 국장 중심으로 운영하면 된다. 우리나라 행정 정책 운용의 핵심은 국장이다. 우리나라의 관료 수준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예산을 삭감했는가. 그대로 정책을 해보시라. 그 삭감 때문에 정책이 실패하였다면 증거를 잘 마련하고 국민에게 보이시라. 국민들이 추경 편성하라고 난리일 것이고 민주당 심판할 것이다. 필자의 정무 감각으로 감히 판단하건대, 그 ‘오죽’은 윤 대통령의 나라를 생각하는 최후의 결단이기보다 대통령의 최고 위치로서 느끼는 ‘비루함’에서 나온 고육지책이었다고 본다. 윤 대통령의 탄핵 재판 최후진술도 장황하고 비루하다. 행정(行政)의 핵심적 역할은 최적의 제도 설계와 ‘지혜로운’ 살림살이로써 공공성을 발현하여 사회적 질서(秩序)와 안정(安定)을 가져오는 것이다. 행정학적으로 계엄 카드는 혼란(混亂)이요 실정(失政)이다. 민주당의 ‘정도(正道)를 벗어나고 엄중(嚴重)하지 못한’ 권력 쟁탈 행위 역시 비난과 더불어 책임을 떠안게 될 것이다.

최근 보수 유튜브가 상한가다. 지난 1월21일 시사인의 이오성 기자가 극우 유튜브를 한 달간 관찰한 내용을 소개한 바 있다. 거짓, 왜곡, 과장이 난무했다. 필자 또한 그들의 주장을 귀담아듣기 위해 살폈다. 아쉽게도 콘텐츠 끝자락에는 항상 거의 인신공격이나 분노성 멘트였다. 전통적 언론의 신뢰도가 바닥을 기고 있지만, 아직도 많은 기자는 사실을 수집하고 의심스러운 부분은 크로스 체크를 거친다. 그럼에도 오보가 나기도 한다. 진보든 보수든 유튜브 채널들은 이런 최소한의 필터링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하버드대 정치학자인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공저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에서 정치인, 기업가, 언론 등 제도권이 폭력적이거나 반민주적인 행동을 거부할 때 극단주의자들은 고립되고 힘을 잃게 되고, 그들을 암묵적으로 용인하면 극단주의 이념이 정상적인 것으로 인정받게 된다고 지적했다. ‘충직한 민주주의자’는 정치적 타격을 입더라도 반민주적 극단주의자와 확실하게 선을 긋는다.

2025년에는 이 지긋지긋한 ‘공산화 우려’를 폐기하자. 몰상식한 보수주의자들은 ‘애국’이라지만 ‘중독’ 상태이다. 분명한 사실은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확고히 자리 잡았고 이는 국가의 정체성으로나 역사적으로 양보와 타협이 불가능하다. 우리는 북한과 중국을 경계하는 체계를 갖추고 있다. 우리 성숙하고 충직한 시민들, 특히 미래 세대인 청년들은 이들을 분별해 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무엇에 목소리를 낼 것인가. 콘텐츠와 엔터테인먼트 소비에 침윤된 대학생과 젊은 층에는 좋은 기회이다.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는 유혹과 극단적 비이성 세력에 휘둘리지 말고 ‘부드러운’ 마음을 지녔으면 한다.

진보와 보수의 ‘대립’은 우리의 진취적 현실에 더는 설 자리가 없다. 선거에서 혹 중대한 정치적 결정에서 국가 운영의 균형을 위해 좌우가 있어 보일 뿐이다. 상식과 양심, 근거에 기대어 목소리를 내자. 서로 지적만 해서는 될 일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를 길러낸 부모들이고 나라의 희비를 함께 했던 이웃이고 친구들이다. 진보든 보수든 그 이념의 허망함에 방황하지 말고 국가의 활력을 되찾는 데 지혜를 모으고 힘을 쏟자. 서구 사회에서는 한국을 ‘진심으로’ 선진국으로 인식하고 부러워하고 있다. 유럽과 중국은 경제적으로 힘들고, 미국은 트럼프로 인한 헌정 질서 우려가 쏟아지고 있다. 중국의 딥시크는 요동친다. 국가 활력을 찾는데 위정자들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은 각자의 역할에 최고의 전문가가 되자. 국민이 바르게 위치하면 정부와 정치도 정위치로 돌아온다. 톱니바퀴는 맞물려 돌아간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