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원옥 할머니를 남기는 사람들···“아카이빙은 사회적 기억의 형태를 고민하는 것”

지난 16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자 여성인권운동가였던 길원옥 할머니가 별세했다. 이제 위안부 피해 생존자는 단 7명만 남게 됐다. 휘발되거나 왜곡될 위험이 있는 일본군 위안부 역사에 대한 사회적 기억을 어떻게 잘 보관하고 남길 것인가가 중요한 시점이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길 할머니를 비롯한 피해자들의 증언과 활동가들의 운동 등 역사적 기록물을 수집·정리·보존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난 24일 서울 마포구 정의기억연대(정의연)의 수장고에서 3명의 아키비스트(기록관리사) 고나경(33)·김신석(36)·이민기씨(32)를 만났다. 이들은 “아카이빙은 단순히 기록물을 관리하는 것을 넘어 사회적 기억을 어떻게 남길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23평짜리 빌라에 있는 수장고엔 1970년대부터 최근까지의 문서, 시청각 자료, 피해자 유품 등이 열을 맞춰 보관돼 있었다. 상자 더미 사이에 놓인 전자 온습도계엔 ‘온도 20도·습도 30%’가 표시돼 있었다. 이씨는 “시청각 자료 테이프는 온도가 높으면 눌어붙을 수 있어서 적정 온도가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이날 아키비스트들은 길 할머니의 유품이 담겨 있는 상자를 꺼냈다. 안에는 위안부 피해자 쉼터인 ‘평화의 우리집’에서 길 할머니가 미술치료를 받으며 만든 작품과 길 할머니의 사진 등이 담겨있었다.

아키비스트들은 수장고에서 기록물이나 물품 등을 보관·관리하고 이를 디지털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수장고엔 30여년에 걸친 위안부 피해 관련 운동 과정에서 생산된 기록물들이 주로 보관돼있다. 피해자들의 증언과 일상을 담은 영상이나 정의연의 전신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만든 회의 자료, 개인 연구자들의 연구물 등이 있다.
디지털화한 자료는 정의연이 2023년 문을 연 ‘전쟁과 여성인권 아카이브’라는 웹 아카이브 서비스에 올린다.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도록 인터넷상에 공개하자는 취지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고씨는 “피해 국가가 전세계에 퍼져있고, 운동은 그 밖의 국가에서도 일어났다”며 “공간에 한정되지 않고 최대한 많은 사람이 기록물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고 했다.
이들은 기록물을 자주 접하면서 기록물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알게 됐다고 했다. 고씨는 “작업하다 보면 북받칠 때가 있다”며 “기록물은 기록물 속 사람들에게 마음이 가게 하는 힘이 있다”고 했다. 이씨는 “피해자들과 활동가들이 찜질방에서 편한 옷이나 메리야스(민소매 속옷)를 입고 밥 먹고 있는 사진을 보면서 마음이 따뜻해졌다”며 “혈연으로 맺어진 건 아니지만 가족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말했다.
현재까지 디지털화된 기록물은 아직 전체 기록물의 20%가 채 되지 않는다. 매년 기록물이 기증돼 들어오지만 이를 모두 관리하고 디지털화하는 것은 3명으로는 버거운 일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정부 차원이 아닌 시민단체가 기록물을 아카이빙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다. 현재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연구소 ‘아카이브814’를 운영하고 있다. 고씨는 “정부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운동에 대한 입장이 바뀌고, 기록물을 어떤 관점에서 활용할지 알 수 없다”며 “계속 위안부 문제를 고민해온 시민단체가 아카이브에 더 능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웹 아카이브가 단순히 기록물을 모아둔 곳이 아니라 위안부 문제와 운동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김씨는 “피해 생존자들을 비롯해 그들과 함께한 활동가와 시민, 연구자 등이 사회를 바꾸기 위해 고민한 기록이 잘 남아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아카이빙할 또 다른 기록물도 기대한다. 고씨는 “더 많은 이들이 기록물로부터 영향을 받으면, 그들이 또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면서 새로운 기록물을 생산할 것”이라며 “이런 순환 속에서 일본이나 한국 정부를 압박하는 사람들이 늘게 되면, 일본이 진심 어린 사죄를 할 시점을 당길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https://www.khan.co.kr/article/202502170909001
박채연 기자 applau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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