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우크라 응원하는 중국인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의 중심부 ‘마이단 광장’ 한쪽엔 수많은 우크라이나 국기가 꽂힌 잔디밭이 있다. 일명 ‘영웅 광장’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의 깃발은 지난 3년간 러시아의 침공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 우크라이나인들을 상징한다. 2년여 전 찾았을 때 수천 개였던 깃발의 수는 이제 1만여 개에 이른다. 깃발들 주변에는 가족과 친지들이 가져다 놓은 것으로 보이는 꽃다발들도 가득했다.
이 중 잔디밭 앞 길에 늘어선 화분 100여 개가 눈길을 확 사로잡았다. 우크라이나 국기 색깔인 노란색과 파란색 꽃, 또 흘린 피를 상징하는 붉은색 꽃 화분이 도열해 있었고, 화분마다 A4 용지에 중국어 간체로 빼곡히 쓰인 메시지가 붙어 있었다. 부족한 한자 실력을 총동원해 읽어보니 놀랍게도 상하이(上海), 허난(河南), 저장(浙江), 톈진(天津), 선양(沈陽) 등 모두 중국 본토 사람들이 보내온 것들이었다.
내용 역시 중국인이 썼다고 믿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러시아는 침략 행위를 당장 중단하라” “푸틴을 즉각 (국제 법정에) 기소하라” “우크라이나 자유(加油·힘내라)” 등이다. 중국은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후 겉으로는 ‘중립’ 입장을 취하면서, 실제로는 서방의 경제 제재로 인한 러시아의 고립을 해소해주는 방식으로 러시아를 적극 지원해 왔다. 또 러시아와 함께 브릭스(BRICS)를 이끌면서 미국과 서방에 반하는 세계 질서 재편을 노려왔다.
화분에 쓰여진 글은 이러한 중국 정부의 입장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다. 여전히 일당 독재 국가인 중국에서 이런 의견을 내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혹시나 화분을 놓은 이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하는 희망으로 며칠간 주변을 서성이다 결국 그 주인공을 만날 수 있었다. 상하이에서 변호사로 일하다 우크라이나에 왔다는 리훙화(57·李洪華)씨였다.
그는 이날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침공과 방관 혐의로 기소해야 한다”는 팻말을 들고 서 있었다. 100여 개의 화분은 그와 함께 뜻있는 중국인들이 사비를 들여 갖다 놓은 것이라 했다. 가족과 풍족한 생활을 뒤로한 채 왜 이곳에 왔을까. 그는 “법률가로서, 중국 사회의 ‘진보’를 위해 노력했지만 한계가 있었다”며 “이 와중에 러시아의 불의한 전쟁이 벌어졌고, 참다못해 올해 초 이곳으로 달려왔다”고 했다.
리씨는 ‘정의로운 국제 질서’를 강조했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중국인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트럼프가 주도하는 협상으로 러시아가 패배하지 않는 종전이 오면, 세상은 ‘강자의 횡포’가 지배하는 혼란의 시기가 올 겁니다.” 그는 ‘한국 같은 나라는 어떻게 되겠느냐’고도 했다. 곧 전쟁 3주년, 러시아의 공습이 계속되는 키이우 거리에서 중국인 변호사가 던진 한마디는 우리 앞에 펼쳐질 수 있는 공포스러운 현실의 무게를 절감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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