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공정 재판·테러범 몰이 언론…용산 참사 법정은 가혹했다

한겨레 2025. 2. 24.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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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color: #333333;"><strong>[길을 찾아서-박래군의 인권의 꿈] 41화 </strong></span><strong>‘용산 참사’ 책임 규명 ②</strong>

철거민들 국민참여재판 요청 불허
검찰수사 기록 3분의 1 열람도 금지
불공정 재판 항의해 변호인 사퇴도

용산범대위, 남일당 지키며 투쟁
수배자 3명 장례식장 갇혀 지내다
특수분장 도움받아 여장하고 탈출
명동성당 보호처 삼아 싸움 이어가

현실 법정 맞서 국민법정 연 그날
강제진압 진실 규명 요구 판결 ‘땅땅’
현실에선 철거민들에게 중형 선고

2009년 10월18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 가톨릭회관 강당에서 열린 ‘용산 철거민 사망 사건 국민법정’에서 변호인단이 변론을 하고 있다. 이날 재판에는 국민법정 준비위원회가 선정한 각계각층 시민 배심원단 50명과 희생자 유가족 등이 참석했다. 이종근 선임기자 root2@hani.co.kr

ㅍ용산 참사는 서울 한복판에서 온라인으로 현장이 생중계되는 상황에서 벌어진 국가 권력에 의한 학살이었다. 철거 용역들이 불법적으로 폭력을 저지르고 다닐 때는 묵인했던 공권력, 아니 어떤 경우에도 철거 용역의 편이었고 결과적으로는 토건 자본의 편만 일방적으로 들었던 공권력이었다. 철거 용역의 폭력에 시달리다가 망루를 짓고 올라가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게 철거민들의 투쟁 방식이었다.

재판도 철거민들에게 불리하게만 진행되었다. 재판부는 국민참여재판 요청을 불허했다. 검찰이 수사기록 1만쪽 가운데 3천쪽가량을 열람조차 못 하게 했지만, 재판은 그대로 진행되었다. 나중에 공개된 3천쪽의 수사기록은 사건 초기에 경찰에 연행된 관련자들의 진술이 담겨 있었다. 특히 현장의 경찰들은 최초의 진술에서 ‘철거민들이 화염병을 던지는 것을 못 봤다’고 진술했다. 검찰은 오로지 모든 죄를 철거민들에게 뒤집어씌우려고, 이런 진술이 공개되면 불리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공정하지 못한 재판 과정에 항의해 권영국 변호사팀이 사임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 국선 변호사들에게 사건을 맡길 수는 없어서 천주교인권위원회의 김형태 변호사에게 사건을 부탁했다. 어려운 일을 맡아달라 했지만, 김형태 변호사는 변론 팀을 꾸려서 사건을 맡아주었다.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정치권에서는 당시 민주당을 비롯한 야 4당으로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하지만 철거민들을 ‘도심 테러범’으로 몰아가는 정부와 여당, 그리고 보수언론의 공세를 이겨내진 못했다. 뉴타운 바람이 몰고 온 재개발 방식에 대한 문제 제기도 성과가 없었다. ‘이명박정권용산철거민살인진압범국민대책위원회’(용산범대위)는 ‘강제퇴거금지법’을 제정하자고 정치권에 요구했다. 그 법안은 발의는 되었지만 심의로 가지 못했다.

특수분장으로 수사망 피하다

용산범대위는 참사가 일어난 남일당 현장을 지키면서 대정부, 대정치권 싸움을 이어가야 했다. 그 과정에서 순천향병원 장례식장에 갇힌 우리 수배자 세명은 용산범대위의 짐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려면 탈출만이 답이었다. 완강기 밧줄을 걸치고 도시가스관을 타고 내려갔던 첫번째 탈출극은 실패로 끝났다. 이제는 특수분장으로 벗어나고자 했다. 용산범대위 공동집행위원장을 함께 맡았던 진보네트워크 대표 이종회 선배가 아는 인맥을 동원했다. 영화 하는 사람들, 방송 하는 사람들이 다녀갔다. 몇팀이 다녀갔지만, 장례식장을 경찰이 철통 감시하는 것을 보고는 자신 없어 했다. 그러다가 영화 특수 분장 전문팀이 왔다. 그들이 해보겠다고 했다. 우리 수배자들 사진을 찍어갔다. 그걸로 연구를 한 모양이다.

9월 초의 어느 날, 먼저 남경남 전국철거민연합회(전철연) 의장은 완전 백발노인으로 변했다. 남 의장 옆을 따라갔던 전철연 사람들도 그 사람이 남경남이라는 것을 모를 정도였다. 다음은 이종회 선배였다. 대머리의 중년 남자가 되어 선배도 밖으로 빠져나갔다.

앞의 두사람이 분장할 때는 한 사람당 2시간 이상 걸려서 완전히 딴 사람을 만들어냈다. 분장 팀은 내게는 여자로 변장하자고 했다. “누가 박래군씨가 여장할 거라고 생각하겠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의 선입견을 깨자는 것이었다. 가발을 뒤집어쓰고, 브래지어를 착용한 뒤 수건을 넣어 가슴을 만들었다. 그리고 여자 상복을 입었다. “절대 고개 들지 말고, 남편 잃은 여자처럼 고개를 숙여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 후문 쪽에 대기하고 있는 승용차를 타고 나가면 된다고 했다. 전철연 두 여성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 1층으로 내려가 후문을 열었더니 마침 승용차가 있었다. 차 문을 잡아당겼는데, 안 열렸다. 알고 보니 약속했던 전철연 회원이 겁이 나서 차를 대지 않았던 것이었다. 2인 1조 경찰들이 10m 간격으로 양쪽 길가에 서 있었다. 거기서부터 병원 정문까지는 150m였다. 가슴이 쪼였다. 옆에 나를 부축하는 전철연 여성들이 더 떨었다. 남편을 잃고 슬픔에 젖어서 우는 여자처럼 행세했다. “그만 울어. 어떻게 해. 산 사람은 살아야지.” 등에서는 진땀이 흘렀다. 차가 다니는 길까지 어찌어찌 나왔다. 택시를 잡으려는데, 상황을 지켜보던 활동가가 우리 앞에 차를 댔다.

우리는 서울 명동의 천주교인권위로 들어갔다. 6개월 만에 순천향병원 장례식장을 벗어났다. 거기서 하룻밤 자고 우리는 명동성당에 들어갔다. 본당 신부님이신 몬시뇰께서 영안실을 내주었다. 옛 계성여고 후문 담 옆에 지하 영안실이 있었다.

‘용산 철거민 사망 사건 국민법정 준비위원회’의 조희주 위원(마이크 잡은 이) 등이 2009년 10월23일 오전 서울 용산구 한강로2가 용산 참사 현장 인근에서, 같은 달 18일 열린 국민법정의 판결문을 발표하고 있다. ‘시민 배심원단’은 이명박 대통령과 용산 참사 관련 책임자 20명에게 유죄를 평결했으며, 준비위는 철거민과 유족을 위한 사죄와 손해배상을 촉구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용산 참사 국민법정’을 열다

경찰은 우리가 탈출한 것을 다음날까지 전혀 몰랐다. 순천향병원 장례식장을 정리하고, 남일당 현장으로 유가족들도 갔다. 이후 용산범대위는 용산 참사의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한 투쟁을 이어갔다. 그중 하나는 10월18일에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연 ‘용산 철거민 사망 사건 국민법정’이었다. 전국을 돌면서 기소인들을 모았고, 배심원들도 모아서 하루 종일 재판을 열었다. 말하자면, 모의법정이었다.

재판부는 이명박 대통령, 김석기 전 서울지방경찰청장 등 관련자 20명에게 “피고인들은 용산 참사에서 자행한 강제 진압의 실체를 한점 의혹 없이 밝히고 유가족과 국민에게 진심으로 사죄하라”고 판결했다. 또 “망루 농성에 참여한 철거민들은 도심 테러범이 아니라 기본 권리를 실현하기 위해 투쟁한 것인 바, 그들의 명예를 모두 회복시키고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라”고도 판결했다. 특별검사에 의한 재수사와 용산 4구역 세입자에 대한 재정착 지원, 피해배상, 재개발 관련 법 개정 등도 권고했다. 우리가 간절히 듣고 싶었던 판결이었다.

그렇지만, 현실의 법정은 냉혹했다. 10월28일 1심 재판부는 아버지를 망루에서 잃은 용산4구역 철거민대책위원장 이충연씨에게 7년의 징역형을 선고한 것을 비롯해 7명에게 5~6년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구속되어 있던 2명에게는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철거민들의 주장은 일축하고, 검사의 공소장을 그대로 옮긴 것 같은 판결문이었다. 법정에서 선고를 들은 유가족들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했다.

2009년 10월20일 서울 용산 참사 현장에서 문규현 신부님의 집도로 추모미사가 열리고 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단식하다 쓰러진 문규현 신부

용산범대위는 남일당 현장에서 끈질기게 투쟁을 이어갔다. 현장에서는 매일 저녁 천주교 미사가 열렸고, 문화제가 열렸다. 그럴 때마다 경찰은 우리의 집회가 불법이라면서 폭력을 휘둘렀다. 부상자가 매일 속출했다. 하지만 우리는 현장을 문화적인 공간으로 계속 바꾸어갔다. 문학인들은 시를 짓고 낭독회를 했고, 화가들은 ‘파견 미술팀’을 만들어서 철거 현장을 꾸며 나갔다. 종교계에서는 천주교가 가장 적극적이었다. 매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이 현장을 지켰다. 남일당을 본당이라고 하면서 본당 신부로 천주교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의 이강서 신부를 세웠다. 불교계에서는 명진 스님이 천일기도를 마치고 거액의 후원금을 갖고 방문하기도 했다. 기독교, 원불교까지 종교계는 용산 참사의 진실을 규명하고 해법을 찾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결국 용산범대위는 참사를 외면하는 정부를 향해 단식 투쟁을 결의했다.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대표단이 단식을 하다가 끌려갔지만, 남일당 현장에서 단식을 이어갔다. 우리 수배자들도 명동성당 영안실에서 단식 투쟁에 합류했다. 단식 열하루날 새벽, 문규현 신부님이 쓰러져 병원에 갔다는 소식이 들렸다. 문 신부님은 단식을 하면서도 일정을 모두 소화하느라 무리를 했다. 문 신부님은 이틀이 지나도록 의식이 돌아오지 않아서 노심초사했다. 신부님이 돌아가실 것만 같아서 초조했다. 나는 천주교 신자도 아니었지만, 정말 진심으로 기도했다. 다행히 사흘 만에 신부님이 깨어나셨다. 나는 “신부님이 부활하셨다”고 기뻐했다.

박래군 | 36년째 인권운동가로 살고 있다. 유가협,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재단 사람을 거쳐서 현재는 4·16재단 운영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 ‘사람 곁에 사람 곁에 사람’, 공저서 ‘이따위 불평등’ ‘새로고침’ ‘살아남은 아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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