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지만 미쳤어요” 끝까지 가는 매운 짬뽕 호러[허진무의 호달달]
감독 안드레이 줄랍스키
배우 이자벨 아자니, 샘 닐
상영시간 124분
제작연도 1981년


영화를 사랑하고, 특히 호러 영화를 사랑하는 기자가 ‘호달달’ 떨며 즐긴 명작들을 소개합니다. 격주 목요일에 찾아갑니다.
“천재지만 미쳤어요.” 호러 영화 팬들에게 ‘호러 프린스’라고 불리는 배우 샘 닐은 2023년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 인터뷰에서 안드레이 줄랍스키 감독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닐은 줄랍스키 감독의 영화 <포제션>(1981)을 자신의 배우 경력에서 가장 힘들었던 작품으로 꼽는다. 닐은 <포제션> 출연을 떠올리며 “정말 미치도록 빌어먹게 초현실적인 시간이었다”라고 말했다. 나도 <포제션>을 보면서 닐과 같은 시간을 경험했다.
<포제션>은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기 전 서독일의 쓸쓸한 풍경에서 시작한다. 분홍색 양말을 신은 남자를 감시하던 스파이 ‘마크’(샘 닐)가 집으로 돌아온다. 아내 ‘안나’(이자벨 아자니)의 표정은 차갑다. 마크는 안나가 ‘하인리히’(하인츠 베넌트)라는 남자와 외도 중이란 사실을 알고선 대판 싸운다. 아들 ‘밥’(마이클 호그벤)을 유치원에 데려다주다 안나와 똑 닮은 교사 ‘헬렌’(이자벨 아자니)도 만난다. 마크는 자신과 아들을 버리고 집에서 도망치려는 안나를 필사적으로 붙잡는다. 마크는 좌충우돌한 끝에 드디어 외도 상대의 정체를 목격한다.
<포제션>은 관객의 멱살을 잡아 막무가내로 끌고 가는 듯이 불친절하고 신경질적이다. 육체를 잔혹하게 손괴하는 고어 장면에다 아무렇게나 던져진 정보 때문에 영화 중반이 지나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무언가 놓친 것이 있는지 자꾸만 찾아보게 하는 신비로운 매력을 가졌다. 일단 <포제션>은 결혼 생활을 은유하는 지독한 농담으로 보인다. ‘포제션’은 ‘빙의’와 ‘소유’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졌다. 안나는 초월적 존재에게 빙의된 여성이면서, 남편의 소유로부터 도망치려는 여성이다. 마크가 안나를 되찾으려면 안나를 가진 괴물과 맞서야 한다.
관객이 마크의 시점으로 보면 안나가 자신에게서 벗어나려 발버둥치는 모습은 빙의된 사람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처럼 보인다. 그런데 <포제션>은 점점 안나의 시점으로 옮겨가며 반대로 마크를 직시한다. 마크와 안나가 서로를 바라볼 때 상대가 어떤 눈동자 색깔을 가진 사람으로 보이는지는 이 작품을 이해하는 실마리라고 생각한다. 한편 분홍색 양말을 신은 남자의 등장을 보면 냉전 세계의 거대한 음모에 마크와 안나가 휘말린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포제션>은 살인, 섹스, 괴물, 음모, 전쟁이 축축하게 뒤범벅된 호러 영화다.


고어 장면보다 더 끔찍하게 광기어린 연기력 덕에 <포제션>은 기과한 아우라를 뿜는다. 박찬욱 감독은 <박쥐>(2009)를 연출할 때 김옥빈에게 <포제션>의 이자벨 아자니를 참고하라고 추천한 것으로 알려졌다. 파란 원피스를 입은 안나는 예수상을 올려다보며 신음한다. 지하철역을 걸어가다 몸이 안쪽에서부터 터지는 사람처럼 비명을 지르며 광란하고 발작한다. 안나를 연기한 아자니의 아름다운 외모는 처절하게 붕괴된다. 호러 영화에 웬만큼 익숙한 관객도 이 장면에선 굉장한 충격을 받을 것이다. 저런 연기를 하는 배우의 정신이 괜찮을지 걱정될 정도였다.
물론 괜찮지 않았다. 실제 아자니는 <포제션>으로 1981년 칸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지만 정신과 치료를 받았고 끝내 자살 시도까지 했다. 아자니는 <포제션>을 ‘심리 포르노’라고 불렀다. “<포제션>은 어릴 때만 출연할 수 있는 영화예요. 줄랍스키는 어둠과 악마의 세계로 빠지게 만드는 감독이죠. 정말 놀라운 영화였지만 저는 속이 멍들었어요.”
줄랍스키 감독은 1940년 소련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나 나치 독일의 학살을 경험하며 자랐다. 데뷔작 <밤의 제3부분>(1971)은 아버지가 나치 백신 실험실에서 일한 경험을 토대로 만든 작품이다. 폴란드로 이주했지만 독재 정권에서 작품 상영이 줄줄이 금지되자 프랑스로 넘어갔다. 평생을 극단적이고 폭력적이며 실험적인 영화를 만들다 2016년 사망했다. 유명 배우 소피 마르소와 16년간 사귀었다. 줄랍스키는 “내가 영화에서 참을 수 없는 단 한 가지는 지루함”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허진무의 호달달> 연재를 마감합니다.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허진무 기자 imagin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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