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게 마주한 익숙한 풍경들
![리만머핀 서울 갤러리에 전시 중인 홍순명의 풍경화. [사진 리만머핀]](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2/22/joongangsunday/20250222004933888asjx.jpg)
한남동 리만머핀 서울 갤러리에서 만난 홍순명 작가는 거대 화폭에 그려진 몽환적인 저수지 풍경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보는 것만으로 물안개의 촉감이 느껴지는 듯한 그림이다. 3월 15일까지 열리는 4인 작가의 풍경화 전시 ‘숭고한 시뮬라크라’의 일환이다.
서울에서 활동하는 미국인 큐레이터 앤디 세인트루이스가 기획한 이 전시는 상업화랑 전시임에도 두 가지 면에서 참신한 기획이 돋보인다. 첫째는 작가의 구성이다. 이미 세상을 떠난 김창억(1920~1997)을 포함해 김윤신(90), 스콧 칸(79), 홍순명(66) 등 베테랑 작가들이 참여하는데 작품들의 신선함 때문에 작가들의 나이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먼저, 한국 제1세대 추상미술가 중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김창억(1920~1997)이 1970~80년대 기하학적 추상에서 구상으로 전환하던 시기에 그린 풍경화들이 눈에 띈다. 자연의 형태를 대담한 원색과 기하학적 형태로 리듬감 있게 구성했다. 세인트루이스 큐레이터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린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2023)에서 그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지난해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에서 자연의 근원적인 에너지를 발산하는 나무 조각과 보석 조각을 내놓아 전 세계를 매료시킨 김윤신은 이번 전시에 나뭇잎을 묘사한 회화들을 내놓았다. 유화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채색 나무 판자를 콜라주한 듯한 질감이 느껴져서 작가의 나무 조각작품과 연결되는 그림들이다.
![조각가 김윤신의 회화. [사진 리만머핀]](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2/22/joongangsunday/20250222004935351rezn.jpg)
최근 특히 각광 받고 있는 화가인 홍순명(65)은 본래 ‘사이드스케이프’ 연작으로 이름이 높다. 사건을 다룬 뉴스 사진에서 독자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중심을 제거하고 오히려 간과되는 주변을 그리되 추상적으로 보일 만큼 확대해 숭고와 아이러니를 창출하는 그림 연작이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는 ‘낯설게 마주한 익숙한 풍경’이 중심을 이루는데, 그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혹자는 이 풍경화가 ‘사이드스케이프’ 연작과 일관성이 없고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나는 굳이 연관성에 대한 강박이 없어요. 남들보다 늦게 마흔에 회화를 시작하면서 (어릴 때는 서예를, 부산대에서는 미술교육학을, 파리 에콜 데 보자르에서는 판화를 전공했다) 나는 오히려 전통적인 회화를 하고 싶었고 전통적이면서 어딘지 다른 회화를 하고 싶을 뿐입니다. 게다가 앤디(큐레이터)와 대화하면서 이 또한 보드리야르가 말한 시뮬라크르(라틴어 ‘시뮬라크룸’의 프랑스어)의 개념으로 연관성을 지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시 제목에도 나오는 ‘시뮬라크룸’은 이 전시를 참신하게 하는 두 번째 요인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이상적인 실재·원본인 ‘이데아(idea)’의 질 떨어지는 복제·재현 이미지가 ‘시뮬라크룸’이라고 했지만 20세기 프랑스 사상가 장 보드리야르는 원본을 압도하며 원본을 대체하는, 혹은 원본이 없는데 존재하는 가상 이미지를 ‘시뮬라크룸’이라고 했다. 예를 들어, 원본을 결코 알 수 없거나 원본이 없을지도 모르는 신의 이미지를 묘사한 성상·우상이 시뮬라크룸이다. 세인트루이스 큐레이터는 “풍경화는 현실의 복제품에 그칠 수 없으며 풍경화는 이성적 귀결이 결여된 주관적 경험의 양상을 드러내기에” 이번 전시의 주제를 ‘시뮬라크룸’이라 했다고 밝혔다.
그의 견해는 현상학적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몸의 감각기관을 통해 풍경을 접하기 때문에 모두가 지각하는 풍경이 조금씩 다르며 ‘객관적인’ 풍경을 결코 알 수 없다. 즉 우리가 각자의 시각과 뇌의 작용으로 보는 풍경 자체가 일종의 시뮬라크룸이라 할 수 있다. 폴 세잔 같은 후기인상파 화가들부터 동시대의 데이비드 호크니까지 그런 생각을 바탕으로 개성 넘치는 풍경화를 그려왔다. 이 전시는 각 예술가의 독특한 눈과 마음이 빚어낸 시뮬라크룸으로서의 풍경을 보여준다.
문소영 기자 sym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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