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칼럼] 트럼프 외교, 미친 외교인가 ‘미치광이 전략’인가

이용준 세종연구소 이사장·前 외교부 북핵대사 2025. 2. 21. 00:15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닉슨 대통령 때 첫 ‘미치광이 전략’
적들이 감히 미국에 도전 못 하게
北 벼랑 끝 외교도 트럼프에겐 무용
백기 들고 일대일로 탈퇴 파나마
對우크라·한반도·대만 未변동
지금 우린 美産 쌀 관세 513% 부과
그들이 예고한 철강 관세는 25%
합리적 대응책 준비할 때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25년 2월 18일 플로리다주 팜비치에 있는 마러라고 리조트에서 행정명령에 서명하며 연설하고 있다./AFP 연합뉴스

셰익스피어 희곡에 ‘말괄량이 길들이기‘란 작품이 있다. 사납고 드센 말괄량이 신부감에게 청혼하려는 청년이 그녀를 길들이기 위해 더 거친 미치광이로 행세함으로써 기를 꺾고 얌전한 숙녀로 만든다는 얘기다. 국제 정치에도 이와 유사한 ’치킨 게임(chicken game)‘이란 것이 있다. 자동차 두 대가 마주 보고 전속력으로 돌진해 먼저 피하는 자가 패하는 미친 대결 방식에서 유래한 외교 행태다. 둘 다 안 피하면 함께 죽어야 하기에, 이 게임에서 이기려면 상대방이 죽음의 공포에 질려 먼저 피하도록 온갖 미치광이 행세를 해야 한다.

이런 외교 수법은 20세기 냉전 시대에 적대 진영 사이끼리 종종 사용했다. 미국의 리처드 닉슨 행정부(1969~74)는 적국과 경쟁국들이 닉슨 대통령과 미국 정부를 충동적이고 비이성적이며 언제 핵전쟁을 벌일지 모르는 미치광이로 인식하도록 행동함으로써, 감히 미국에 도전하지 못하게 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닉슨 대통령 자신이 ‘미치광이 전략(Madman Theory)’이라 명명한 이 전략은 당시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을 맡았던 헨리 키신저가 구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능가하는 상투적 미치광이 외교를 3대에 걸쳐 구사하고 있는 강적이 북한이다. 이른바 ‘벼랑 끝 외교(brinkmanship)’라고 하는 북한의 외교 전략은 핵 협상 등에서 치밀하게 계산된 고도의 비이성적이고 무모한 외교 행태를 연출함으로써 한국과 미국의 겁에 질린 정치인과 외교관들을 굴복시키곤 했다. 시도 때도 없이 미사일을 쏘아대는 김정은의 행태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2017년 트럼프 행정부 출범 직후 김정은과 트럼프가 북핵 문제로 극한적 언어 전쟁을 벌였을 당시, 북한의 벼랑 끝 외교는 이를 능가하는 허세와 무모성으로 무장한 트럼프 대통령 앞에서 별로 힘을 쓰지 못했다.

그러한 트럼프 대통령이 백악관에 재입성하자마자 해괴한 대외 정책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파나마 운하에 대한 군사력 사용을 위협하고, 그린란드 매각을 덴마크 정부에 종용하는가 하면, 급기야 가자지구를 미국이 인수해 개발한다는 기상천외한 구상까지 나왔다. 미국이 추방한 불법 이민자 수용을 거부하는 콜롬비아에 대해 50% 관세와 미국 비자 박탈을 통고하기도 했다. 국제사회는 트럼프 행정부의 이런 행태를 미친 외교라 비난하면서, 향후 4년간 미국이 어디까지 미쳐갈지 우려하고 있다.

미국은 정말 미친 걸까? 그건 너무 안일한 해석이다. 트럼프의 미국은 미친 외교를 넘어 고도로 계산된 ‘미치광이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그 해괴한 외교의 심연을 들여다보면 그 나름의 현실적 논리와 속셈이 있다. 중국의 파나마 운하 지배를 막고자 미국이 운하양도조약(1977)에 따른 군사 개입을 위협하자 파나마는 즉각 굴복해 일대일로 사업 탈퇴를 선언했다. 콜롬비아도 미국의 보복 조치 결정 9시간 만에 백기를 들었다. 그린란드 문제 역시 현지 자치 정부와 주민이 법적 선택권을 갖고 있어 단순히 미친 구상은 아니다. 가자지구 구상은 황당하기는 하나 미치광이 전략의 어떤 비책이 숨어있나 더 두고 볼 일이다.

트럼프 외교의 최강 무기는 원칙도 한계도 금기 사항도 없는 무모성이다. 특히 시진핑, 푸틴, 김정은에게는 그들의 무모성을 능가하는 난적이다. 이런 비상식적 외교를 전방위로 벌여가는 미국이 우크라이나, 대만, 한반도에서 어떤 사고를 칠지 유관국들의 우려가 크지만, 현재까지는 정상 궤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도 계속 중이고 대만 방어 공약에도 변화가 없다. 최근의 미일 정상회담 결과를 귀동냥해 들어보면, 한미일 안보 협력을 중시하고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추구하는 바이든 행정부 당시의 한반도 정책 기조에도 별 변화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미국의 국내 산업 보호와 무역 적자 감축, 동맹국의 국방비와 방위비 분담금 증액, 대중국 포위망 확대 등 미국의 첨예한 경제·안보 이익이 걸린 사안에선 비타협적 변화가 예상된다. 한국은 정치적 혼돈의 영향으로 미국이 양국 간 안보 현안을 잠시 접어둔 양상이다. 그러나 미국 국내 산업 보호를 위한 전방위 관세 전쟁은 지난주 철강 관세와 상호 관세 부과 결정을 필두로 이미 시작됐다. 미국산 쌀 수입에 513% 관세를 부과하는 한국 정부가 어떤 비율로 무엇을 주고 무엇을 받을지, 합리적 대응책을 준비할 때다.

△매일 조선일보에 실린 칼럼 5개가 담긴 뉴스레터를 받아보세요. 세상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91170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