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두과자 다섯 알에 빚진 편지[고수리의 관계의 재발견]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어떤 기억은 사무쳐 평생 잊지 못할 이름으로 남기도 한다.
누군가에겐 평범한 이름들이 나에게는 우유와 눈사람과 쪽지와 카세트테이프로, 그에 깃든 유일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보미는 나에게 호두과자로 남아 있다.
동그랗고 말랑하고 다디단 호두과자를 까먹으며 나는 촬영장으로 출근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졸업 후에 우리는 꿈 대신 밥을 선택했다. 당장 돈을 벌기 시작했다. 첫 월급은 소중한 사람에게 쓰는 거라며 보미가 배즙을 보내줬을 때, 네가 어떤 일을 하며 월급을 받고 이 비싼 걸 보내줬는지 묻지 못했다. 그저 고마워. 배즙이 너무 달아서 목구멍까지 알알했다. 직장과 상황이 자주 바뀌는 사이에도 우리는 가끔 만났다.
그래도 나는 밥 말고 꿈. 진로를 바꿔 방송일을 시작하며 고군분투하던 시기에 보미는 고향에 내려가 있었다. 우연한 기회로 중국 예술 작품 통번역 일을 보미에게 소개해줬다. 서울에서 보미가 번역했던 무대를 함께 보았던 날, 보미를 자취방에 재워 보냈다. 네가 만든 무대가 얼마나 멋졌는지, 나는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 밤새워 얘기했다. 나는 보미가 여기, 이 세계에 있었으면 했다.
보미는 편지와 호두과자 다섯 알을 두고 갔다. ‘수리야. 네가 지치고 힘겨울 때도 넌 여전히 햇살 같은 아이란 거 잊지 마. 훗날 쓰게 될 네 글이 기대된다. 지금 내가 줄 수 있는 건 호두과자 몇 알뿐이지만, 또 보자.’
그저 고마워. 동그랗고 말랑하고 다디단 호두과자를 까먹으며 나는 촬영장으로 출근했다. 허무하게도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바쁘게 살다 보니 우리는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연결될 연도, 접해질 점도 없는 우리는 미숙하게 헤어졌다. 보미는 사라졌다.
언젠가 그늘진 운동장에서 내가 말했지. “나 밝아지려고 노력할 거야.” 그때 네가 대답해줬어. “노력하지 않아도 넌 밝은 사람이야”라고. 그저 고마워만 했던 게 미안해. 후회는 그림자가 길다. 이제라도 호두과자 다섯 알에 빚진 마음을 보낸다. 그간 부지런히 글을 썼으니 우연히라도 읽어주길 바라면서. 보미야. 잘 지내니. 호두과자 가게를 지날 때마다 널 생각해. 네가 준 기억으로 나는 여전히 밝은데, 너는 어떻게 살고 있니. 보미야. 또 보자.
고수리 에세이스트
Copyright © 동아일보.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尹, 25일 탄핵심판 최후 진술…헌재, 3월 중순 선고 가능성
- 尹 “빨리 직무 복귀해 세대통합의 힘으로 대한민국 이끌겠다”
- 첫 국정협의회, 추경엔 공감…연금·반도체특별법 합의 불발
- [단독]“너희들은 개야” 경찰에 폭언-폭행…서부지법 폭력난입 63명 공소장 보니
- [단독]의료공백 피해신고 933건중 ‘연관성’ 인정은 0건
- 美상무장관 “트럼프 목표는 국세청 폐지”… 6000명 해고 착수
- 이재명 ‘중도보수’ 발언에…與 “李, 국힘 입당하라”
- 조기 대선 가시화에 여야 지자체장들 들썩 왜?
- 정부 “‘AI 국가대표’ 꾸려 독자적 모델 개발”…업계는 “실효성 의문”
- ‘65세’ 노인 연령기준, 44년만에 상향 추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