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275] 백지에 스며든 먹물처럼

가이는 경찰에 발각될까 봐 불안해한 적이 지금껏 한 번도 없었다. 늘 그의 마음속에 있는 불안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그 불안감이 너무 고통스러워 차라리 법이 개입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양심의 법에 비하면 사회의 법은 느슨하기 짝이 없었다. 법에 다가가 자백할 수도 있었지만, 자백은 단순한 시늉일 뿐 진실을 회피하는 쉬운 길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법의 집행을 받는다 해도, 그건 단순한 제스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열차 안의 낯선 자들’ 중에서
가이와 브루노는 열차 안에서 우연히 만나 함께 술을 마셨다. 브루노가 물었다. “혹시 누군가를 죽이고 싶었던 적 있어요?” 그는 다른 남자의 아이를 배고도 인연의 끈을 놓아주지 않는 가이의 아내 미리엄과 자신의 아버지를 교환 살인하자고 제안한다. 오늘 처음 만난 사이, 서로에게 제공할 수 있는 완벽한 알리바이, 브루노는 완전 범죄가 가능하다고 가이를 설득한다.
농담으로 치부하고 열차에서 내린 그는 브루노를 잊으려고 애썼다. 가이에겐 인생을 함께하고 싶은 앤이 있었고 미리엄은 독거미처럼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미리엄만 없다면, 하고 바랐지만 그렇다고 살인이라니. 가이는 양심적이고 성실한 남자였다. 그런데 어느 날, 미리엄이 살해당했다. 곧이어 살인의 채무 상환을 독촉하는 브루노의 편지들이 배달된다.
가이에겐 미리엄의 죽음에 아무런 책임이 없을까. 무죄를 주장하면 브루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가이는 두려웠다. 그에겐 누가 봐도 미리엄을 죽일 만한 동기가 있었다. 알리바이가 있어도 청부 살인 가능성은 남는다. 앤과 행복하게 살고 싶었던 가이는 양심 때문에 얼마나 괴로워하게 될지 상상도 못 한 채 브루노의 지시대로 총을 집어 든다.
악의 부채는 원금의 몇 배에 달하는 이자를 붙여 갚더라도 벗어날 길이 없다. 악은 애초에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인생과 영혼을 송두리째 바치고도 벗어날 수 없는 그물. 한지에 번진 먹물처럼 한번 스며든 악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것이 잠시나마 악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마음이 흔들린 대가다.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달콤하고 눈부신 미래가 허망한 신기루인 것을 어찌 알아차릴 수 있을까. 어느새 크게 자란 욕망이 양심을 밟고 서서 천사 같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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